지난 1주일여간 러시아 루블화의 달러당 환율이 가파르게 올랐다(루블화 가치 하락). 루블화는 러시아 중앙은행 고시 기준으로 지난 20일 달러당 100루블을 돌파한 뒤, 29일에는 109루블까지 올랐다가 한풀 꺾였다. 그 기간에 온라인 외환거래 시장 포렉스(Forex, 장외시장)에서는 루블화는 장중 120루블을 기록(27일)하기도 했다. 12월 2일 중앙은행의 루블화 고시는 달러당 107.74루블.
지난 1주일간 러시아 루블화의 달러 대비 환율의 변동 추세. 오른쪽 표는 날짜별 중앙은행 고시 환율과 증감 폭/사진출처:얀덱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후 한차례 크게 요동쳤던 루블화 환율은 2022년 3월 달러당 100루블 이하로 떨어지면서 2년 7, 8개월간 두 자리 수를 유지했는데, 다시 100루블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올해 초 기준으로 루블화는 달러 대비 16%, 위안화 대비 15% 하락했다.
루블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지정학적 긴장과 환율 변동성을 제한할 정책적 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내년에는 달러당 약 120루블까지 오를 것이라는 우려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루블화 폭락에도 통화당국이 느긋한 이유
가장 궁금한 것은 갑작스런 루블화 가치 추락의 이유다. 시기적으로 외화 수요가 물리는 연말(11~12월), 또 월말(11월 하순)에 미국의 대(對)러시아 추가 금융제재가 겹치면서 외환시장이 출렁거렸다는 게 기본적인 분석이다. 진정되지 않는 '전시 경제'의 활황세에 좀체 꺾이지 않는 인플레이션 심리도 루블화 추락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통화당국도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아직은 긴급 대책이 필요없다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필립 가부니아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는 29일 기준금리가 연 21%에 이르기 때문에 루블화 약세에 따른 긴급 조치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기준 금리가 경제 전체, 특히 수입품에 대한 수요를 위축시켜 통화 수요를 줄이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러시아의 기준금리는 현재 개전 직후인 2022년 3월(20%)보다 1%포인트 높은 21%다. 금리의 추가 인상설도 나오고 있는 상태다.
러시아 중앙은행/사진출처:위키피디아
푸틴 대통령은 전날(28일) "루블화의 변동(폭락)이 계절적 요인을 비롯해 인플레이션과 국제 유가, 예산 지출 등 다양한 요인과 연동돼 있다"며 "당황할 이유가 없으며 상황은 통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외에도 환율을 안정시킬 다른 수단을 갖고 있으며, (적절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중앙은행에 힘을 실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루블화 가치의 급락이 수출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중의 우려를 일축했고, 막심 레셰트니코프 러시아 경제개발부 장관은 “이번 주 환율 변동은 투기적 성격을 포함한 일회성 요인에 따른 것으로, 조만간 시장의 불안이 멈추고 루블화의 '기본 가치 (가격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수행한 레셰트니코프 장관은 “루블화 약세는 러시아의 경제 펀더멘털(기초)과는 무관하다"며 "달러화의 전세계적인 강세 흐름과 가스프롬방크 등 러시아 은행에 대한 미국의 추가 제재에 따른 시장 참여자들의 선제 조치(달러화 조기 매입)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경제는 이제 비우호적인 국가의 통화(달러, 유로화)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줄였고, 외환시장에서는 과도한 감정적(투기적)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며 “경험칙상, 환율 변동성이 일정 기간 증가한 뒤에는 다시 안정되는 것으로 늘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고위 인사들의 이같은 자신감은 외환시장이 기본적으로 중앙은행과 국영은행 등을 통해 통제 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블화의 기준 환율(고시 환율)은 지난 6월 중순부터 중앙은행이 매일 15시 30분(모스크바 시간) 장외 외환시장(주로 은행간 거래)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한다. 그 이전까지는 중앙은행이 매일 10시~15시 모스크바 거래소의 외환 거래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시 환율을 결정해 왔는데, 서방의 제재조치로 모스크바 거래소의 외환 거래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현재의 방식으로 변경됐다.
따라서 러시아 외환시장은 우크라이나보다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경제적 요인이나 시장 참가자들의 심리, 기대(전망)가 아니라 크렘린의 경제적, 재정적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전시 경제의 통제 하에 있다고 보면 된다.
모스크바 거래소/사진출처:홈페이지
◇루블화 하락세를 방치하는 진짜 이유는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7일 "루블화의 하락세는 러시아 당국의 의지를 거스려며 진행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의 발언을 예로 들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인들은 월급을 루블로 받기 때문에 루블화 가치 하락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크렘린은 오히려 루블화 하락을 전시 체제하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게 이 매체의 진단이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 당국이 세 가지 의도하에 루블화 하락을 묵인하고 있다고 봤다. 우선, 가스프롬방크 등에 대한 미국의 추가 제재로 미리 외화 자금을 확보하려는 수입업자들의 움직임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고 위기 국면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대금의 결제 창구인 가스프롬방크가 미국의 제재로 막히면, 당분간 외화 자금의 유입이 줄면서 외환시장의 동맥 경화 현상이 불가피한데,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결제 수단을 찾아) 풀릴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루블화 약세는 또 21%에 이르는 고금리로 고통을 겪는 수출업체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인식도 있다. 러시아 수출업체들은 그동안 고금리와 이에 따른 금융 비용 증가로 당국에 불만을 표시해 왔는데, 환율 하락세는 고금리에 대한 보상적 차원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루블 환율은 수출업체에 유리하다"는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스트라나.ua는 또 루블화의 평가절하(가치 하락)는 러시아 당국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사용해온 전통적인 수단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루블화 환율이 높을수록 에너지 등 수출업자의 (외화를 기준으로 한) 수출 세금과 각종 수입제품의 관세 수입은 외형적으로 더 많아진다. 막대한 예산을 전쟁 비용으로 쏟아붓는 상황에서 재정 수입의 확대는 러시아 당국에게는 최우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루블화/사진출처:SNS ok 이즈베스티야 계정
물론, 환율의 약세는 해당 국가의 대외 부채가 많을 경우,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대외 채무가 적고, (서방의 제재 등으로) 주요 수입품에 대한 의존도가 낮기 때문에 루블화의 평가절하를 다른 개도국들보다는 훨씬 덜 고통스러운 정책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러시아도 이를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지만, 서방의 제재 강화(이번에는 가스프롬방크 등 은행 제재)나 수출품(특히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의 가격 하락시에는 유용한 정책적 도구라고 할 만하다. 다만, 전쟁 특수를 누리는 러시아의 방산업체들이 수입 부품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블화 약세를 오랫동안 용인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루블화 약세는 또 전쟁중인 국가가 으레 치러야 하는 대가이기도 하다. 상대인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여서 흐리브냐화(UAH)도 달러화 대비 그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비록 루블화와 같은 하락 추세는 아니더라도 하루에 달러당 약 10코페이카(1흐리브냐는 100코페이카)씩 올라가면서(가치 하락) 매일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11월 28일 기준 UAH고시 환율은 달러당 41.6010 UAH다.
전쟁이 끝나고, 군사비 지출이 줄어들면, 러시아든 우크라이나든 경제에 대한 압박이 해소되면서 환율이 안정되고 강세로 돌아갈 수 있다. 트럼프 당선자의 '조기 전쟁 종식' 호언장담이 현실화하면 그 시기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대책과 환율 전망
러시아 중앙은행은 루블화 폭락의 경보가 울린 지난 27일 국내 외환시장에서 외화 구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모스크바 거래소에서는 루블화가 장중 달러당 114루블(조직적인 대규모 거래는 불가능하다/편집자), 국제외환 시장에서는 120루블까지 치솟았다. 위안당 가치도 모스크바 거래소에서 15루블로 떨어졌다.
중앙은행이 취한 조치는 두 가지다. 연말까지 외화 구매를 중단하고, 위안화 판매를 기존(하루 42억 루블)보다 두배인 84억 루블로 늘린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이를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통화량 압력을 줄이기 위한 조치도 계속되는 느낌이다. 푸틴 대통령이 '특수 군사작전'에 참전하는 계약병의 채무를 최대 1천만 루블(약 1억 4천만원)까지 면제해주는 법안에 서명한(11월 23일) 게 대표적이다. 대신에 입대 계약에 따른 현금 지불을 일정 부분 조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통화량 증가를 막을 수 있다.
문제는 러시아가 '특수 군사작전' 이전까지 주로 사용해온 외환시장의 개입 수단이 거의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서방 은행에 들어 있는 러시아의 외환 보유고가 동결됐기 때문에 달러와 유로를 이용한 시장 개입(중앙은행의 외화 매도)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은행이 단기 처방으로 외화의 매도(판매)가 아니라 매입을 중단하고, 위안화의 매도만 2배 가량 늘린 이유다.
전쟁 개시 직후 러시아 중앙은행이 취한 루블화 안정화 조치의 하나는 수출업자에게 강제한 외화수입의 일정 비율 의무적 판매였다. 이 조치는 아직 유효하지만, 2023년 10월 이후 의무 판매 비율이 상당히 완화됐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이 루블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 비율을 높일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루블화는 달러당 110루블 선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러시아 알파방크/사진출처:은행 인스타그램
알파방크(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나탈리아 오를로바는 "루블화 약세의 이유는 서방의 제재 압력과 지정학적 긴장의 증가에 따른 것이어서 루블화는 한동안 달러당 약 110루블 수준에서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러시아 투자은행 피남(Finam)의 전문가 알렉산드르 포타빈은 "환율이 2022년 3월의 달러당 121루블로 돌아갈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시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브렌트유의 가격이 배럴당 7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루블화 가치는 훨씬 더 빠르게 떨어질 것"이라고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선 시장의 투기적 분위기를 가라앉힌 뒤, 수입 외화의 의무 판매 비율을 높여 루블화 안정시키고, 기준 금리의 인상으로 인플레 심리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명목및 실질 금리 수준은 이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게 형성돼 있어 기준 금리 인상은 경제 체력이 버틸 수 있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반박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