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뉴욕의 어느 출판사, 원고를 고치는 편집자의 손이 보인다. 타자기가 쓴 기계적 글자들 사이로, 그는 색연필을 든 손으로 원고에 줄을 긋고 있다. 건물 밖으로는 비가 내린다. 그곳에서 비를 맞는 남자는 바로 소설가 토머스 울프(주드 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이 첫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면, 처음의 젖은 공간이 미래의 풍경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행위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차는 날 삶 속으로 데려다줬다. 인생의 길은 늘 흐른다. 때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다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토머스 울프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첫 장면에서 교차된 컷들과 겹친다. 영화에서 울프의 처녀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탄생은 그렇게 미묘하게 그려진다. 출판사 건물을 사이에 두고서 두 남자는 안과 밖에 따로 서 있고, 그들의 사이를 잇는 두꺼운 원고 다발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둘로 갈린다. ‘오, 잊혀진 것들’이라 이름 붙은 원고더미는 이후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작품이다.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의 책장에 꽂힌 수많은 명저 사이에서, 이 글은 색연필을 든 우아한 편집자의 진짜 가치를 알려주는 또 다른 역할을 맡는다.
작가와 편집자/ 감독과 제작자
너무 당연해 보이는 질문 한 가지를 해야 한다. 영화 속의 ‘지니어스’는 누구인가?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넘치는 재능으로 유혹적인 글을 썼고 그리하여 불우한 시대에 사치스런 긍정의 흐름을 제공해준 작가 토머스 울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가 미국인에게 안겨준 두권의 책은 그의 유명세에 부합할 만큼 강렬하고 아름답다. 37살에 요절한 이 아까운 인물이 느꼈을 창작의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영화는 두권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 콜린 퍼스가 연기한 편집자 퍼킨스는 이처럼 응석받이인 작가를 수용해서 대중 앞에 내세우는 일을 한다. 말 그대로 그는 원석을 발굴해서 다듬는 자이다. 실상 그의 모습은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선지 ‘지니어스’ 타이틀이 퍼킨스의 모습에 겹쳐지는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공공연한 대중 사이의 유명인보다는 이 숨은 인물, 명백한 능력을 지닌 야심찬 모험가에 좀더 마음이 쓰인다. 영화는 창작의 고통과 창작의 원동력을 지닌 낭만주의적 천재의 유형보다는 현대적인 재능에 점수를 주려는 것 같다. 편집자 퍼킨스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발굴했다는 점을 꾸준하게 알리면서, 퍼킨스야말로 현대적 브리콜뢰르형 인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때 모두에게 추앙받던 스콧 피츠제럴드(가이 피어스)는 더이상 글을 쓰지 못한 채로 영화에 등장한다. 그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제목만이 위대할 뿐, 이 글의 창작자는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행색이다. 하지만 퍼킨스는 “피츠제럴드가 쓴 다섯 글자가, 당신의 5천자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며 울프를 몰아세운다. 생각해보면 <지니어스>가 천재 작가들을 조망하는 방법은 이렇듯 간접적이다. 등장과 동시에 천재라 불린 토머스 울프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슬픈 자화상과 겹쳐지는 미래를 지니고 있다. 비록 울프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타인의 우울한 말로가 그의 것인 양 멜랑콜리하게 그려진다. 어쩌면 이 관계의 화살촉은 마지막에 감독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몫인 것 같다. 비록 이 작전이 실패해서 영화의 내적 의미만이 살아남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모든 의미 작용은 실상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간 관계, 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자의 관계나 다름없다. 이 영화의 제작은 1978년 출판된 전기소설 <맥스 퍼킨스: 천재의 편집자>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처럼 편집자가 주인공으로 부상되면서 드라마는 소설의 개별 콘텐츠에서 벗어나 좀더 입체적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한다. 소설을 쓰는 창작자로서 울프는 허무와 순간성에 빠져 있던 20년대의 ‘로스트제너레이션 작가’들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를 통해 30년대 미국 문학은 긍정성과 미래지향적 성향을 공급받는다. 첫 소설의 순수한 표현과 자기반성적인 테마는 일차적으로 작가의 실제 삶으로부터 기인했다. 하지만 이차적으로는 미국의 당대 경제공황 상황과 굴레를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니어스>는 소설을 각색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호매체적 특성보다는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영화가 지니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대화 흔적을 우리는 함께 찾아내야 한다. 실제로 제작자 존 로건이 소설의 판권을 구입한 후에 영화가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로건은 제작뿐 아니라 각색에도 참여했다. 만일 콜린 퍼스가 결정되기 이전인, 200만파운드의 저예산영화로 작품이 완성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신인감독 마이클 그랜디지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을지 모른다. 완성된 영화 역시 더 개성적인 외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 퍼킨스가 성공시킨 바로 그 부분을, 로건은 실패한다.
영화 안팎에 존재하는 상실과 회귀의 패턴
토머스 울프가 남긴 소설은 총 네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영화에 등장하는 두권만이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변증법적 현실 인식의 체험적 글쓰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은 고향을 방문하는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실체를 깨닫는다. 반복적인 여행을 통해 유사 아버지로서의 역동적 미래의 고향을 상상하며, 그들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이때 ‘귀향’이란 라이트모티브는 영화에서 ‘출판’으로 변형돼 등장한다. 처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물의 행동이 ‘아버지’에게 돌아간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바뀌고, 다음으로 그 아버지가 ‘편집자’인 맥스 퍼킨스에게 전달되는 구성이다. 이렇듯 영화는 원작이 지닌 원심적 향수의 대상을 캐릭터로 이양시킨다. 그런 면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울프의 아내나 로라 리니가 연기하는 퍼킨스의 아내 역은 ‘유사 가족’의 개념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예컨대 이들의 관계를 동성간의 애정 척도나 집단주의적 사회의 권력 체계로 읽을 필요는 없다. 울프가 자신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속 칼리반으로 비유하는 것은, 그 스스로 자신을 끔찍한 괴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복자 혹은 아버지로서 프로스페로가 상처를 감싸주기를 그는 갈망하고 있다. 퍼킨스의 저녁식사 초대는 그러한 바람에 대한 간곡한 대답처럼 보인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삶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냈던 울프의 실제 삶, 20, 30년대 미국 소설의 아버지가 된 편집자 퍼킨스의 감춰진 인생, 그리고 울프가 만든 소설 속 가상의 여행이 지닌 상실과 회귀의 패턴은 서로 닮아 있다. 과거의 이상적 아버지는 더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경험을 통해 찾아낸 바람직한 새로운 아버지상을 찾아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향으로의 회귀, 혹은 그 회귀의 불가능을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중요시 여긴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 가까운 미래에 좀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영화는 주장한다. 이 순환적인 여정이 감독 자신에게 와닿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유감스럽게도 <지니어스>의 내면적인 취향은 존 로건과 마이클 그랜디지의 관계를 환기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이 잔잔한 사실주의 성향은 인생과 역사의 속성을 변화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거시적 지혜의 명분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사라져버린 과정의 정서를 기억하는 노스탤지어가 잔잔한 물결을 통해 희망의 실마리를 토해낼 것이다.
출처: 씨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