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0.
점심 식사를 하며 10살짜리 막내가 같은 반 여학생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 겨우 10살인데 벌써 사춘기가 왔나.
엊그제는 단지 내에서 자주 보던 27개월짜리 여자 아기가
인사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아기 아빠가 자기 딸이 벌써 사춘기가 왔는지 요즘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다고 걱정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세상 일은 점점 빨라지고, 점점
고효율과 가성비를 중요시하니 사춘기도 빨리 오는 모양이다.
막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60년 전 나의 모습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진천 읍내리 지금의 상산 약국 자리에서 제과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내가 누워 있던 방의 창문이 떨어지며 태어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은 나를 덮치지 않고 간신히 비켜갔다며 서둘러
교성리로
이사를 했다.
교성리는 '새터'라는 별명이 붙은 새로운 주거단지로 읍내에서
불과 200m의 거리로 두 개의 개울을 건너야 했다.
작은 개울은 백곡저수지에서 보내는 물이 흐르는 농수로요,
조금 큰 개울은 봉화산에서 발원이 된 백사천의 지류인데,
제법 물이 많은 개울이라 여름밤에는 어르신들이 상류와 하류를
정해놓고 여자와 남자가 목욕을 하기도 했다
우리 또래들은 이 개울에서 구역을 구분하지 않고 아무데서나
발가벗고 물놀이를 즐겼으니 전라도 말로 '깨복쟁이' 친구라
할까.
상산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4학년이 되던 해니 10살이던가.
동갑내기인 진천 등기소장의 딸과 진천농고 교감선생의 딸인
두 명으로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으며 먼 훗날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던 사연이 생각난다.
전기가 겨우 들어오기 시작한 시절, 이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10살짜리인 나는 매우 충격이었고 어른이나 형들에게도 상의를
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만 묻었다.
6학년이 되자 교감선생의 딸은 괴산 연풍으로 전학을 갔고,
한 학년 아래였던 등기소장의 딸 광옥이는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부회장이 되었다.
딸이 6명이나 되던 등기소장인 어르신은 내가 장래 셋째
사윗감이라며 귀여워하셨고,
성장과 함께 사랑을 이어가며 군대 시절까지 서로 결혼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일에 때 묻지 않은 동심의 10살,
막내 승현이가 이성에 대한 눈이 트이기 시작했으니 나의 열 살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10살의 나이로 보는 세상은 하나의 백지(白紙)이다.
이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동심을 갖고 성장을 하면서
백지에 그림을 그려가는 나이인데 꾸밈없이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한쪽으론 걱정이 되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 녀석 덕분에 잃었던, 수십 년간 망각을 했던 나의 동심을
잠깐이라도 만나봤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다.
"긴 인생을 살아 가면서 추억이라는 거는 중요하다.
먼 훗날 나이가 들면 추억은 또 하나의 생명이 되기에 추억에서
달아나지 말고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게 좋다"라고
말이다.
빗소리가 들려 창문을 연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금세 굵어지고 세상의 모든 잡음을
흡수한다.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의 묵은 때를 벗기고 잃었던 동심을
찾았다.
2022. 7. 10.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잘 읽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