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답사 3> 도툴굴 먼물깍 묵시물굴 - 20. 06 .06.~07
선흘리에는 동백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동백동산'이라 이름 붙은 숲이 펼쳐져 있다. 숲은 옛적 이곳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숲에서 동백나무 기름을 얻고 나무들을 벌채해 숯을 구워냈다. 이를 통해 얻은 것들로 아이들도 키워내고 마을을 꾸려나갔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숲. 주민들의 삶터였던 동백동산이 2011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면서 이제 반대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람사르 습지란 국제적인 협약을 통해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습지를 지정, 보호해나가는 것이다. 제주에는 선흘리 동백동산과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리오름, 1100고지 습지 등 4곳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동백동산이 자리한 선흘1리 마을은 주민들이 함께 숲을 가꾸고 지켜나가는 노력을 꾸준히 해온 덕분에 2013년 세계 최초로 '람사르 마을'이란 의미 있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동백동산 숲길은 지대가 완만하고 평탄해 아이들이 걷기에도 무난하다. 선흘반못 건너편 동백동산 탐방안내센터에서 출발해 선흘분교가 있는 서쪽 출입구로 나오거나 다시 습지센터로 한 바퀴 돌아 나올 수 있다. 전체 탐방로 길이는 약 5km이며, 느릿한 걸음으로 2~3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아름다운 동백동산은 지역주민의 가슴아픈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동백동산에는 화산활동으로 인한 용암동굴이 곳곳에 자리해 있는데 이곳은 1948년 4·3의 광풍이 불 때 마을 주민들이 숨어서 지내던 은신처가 되어주기도 했던 곳이다.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 10분정도 들어가면 도틀굴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4·3당시 마을 주민들이 피신했던 은신처인 동시에 학살 현장이기도 하다. 1948년 11월 25일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밧못에 밥할 물을 길러 나갔다가 수색대에 발각이 되면서 도틀굴에 피신해 있던 마을주민 25명 중 18명이 현장에서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목시물굴에 주민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실토하게 되고 11월26일 아침 그곳에 숨어있던 150명 중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40여명이 희생되었다.
선흘1리 낙선동 쪽에는 제주 4·3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높이 3m, 폭1m의 성곽이 총 500m길이로 둘러져 있는 낙선동 4.3성터가 그것으로, 이것은 토벌대의 무력 진압이 있을 때 무장대 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던 전략촌이다. 지금의 낙선동 4·3성터는 2009년도에 복원된 것으로, 당시 주민의 생활상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며, 2017년 낙선동 4·3성터에서 선흘곶 동백동산까지 걸어서 올 수 있는 도보길을 조성해 놓았다.
조천읍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는 우리나라 최대 상록활엽수림지대인 선흘곶자왈의 서쪽에 붙어 있다. 선흘2리 소재 서검은이오름에서 분출된 곶자왈 용암이 선흘1리 동백동산까지 폭 1∼2㎞를 유지하며 7㎞정도 흘러가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구실잣밤나무와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활엽수 군락이 풍성하다. 주변보다 지형이 낮고 곶자왈용암류가 습도와 지열을 유지해 주는 것이 군락형성의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 주변에는 크고작은 자연용암동굴이 많다. 난대림 속에 산재한 자연동굴은 4·3사건의 와중에는 피난처가 됐다. 그래서 선흘리 주민들은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해변 마을로 가지 않은 사람들은 선흘곶지대의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 대섭이굴 등에 숨어들었다.
선흘에서 덕천 방면으로 가다 동백가든을 지난 후 한모씨의 양봉장을 옆으로 돌아 안 쪽 숲 지대에는 당시 선흘 주민들의 피난처와 굴이 나타난다. 지금은 인근에 도로가 뚫려 있지만 4·3 당시에는 그야말로 중산간 숲지대였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은신하기에는 적당했을 것이다.
지금도 4·3당시 주민들이 움막을 지어 생활했던 피난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이며 길이는 100m 가량이다.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형성해 울퉁불퉁하고 낮은 곳이 많지만 안에 다소 넓은 공간이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용암선반·승상용암이·아아용암·용암주석·용암종유·동굴산호·용암곡석 등이 관찰되는 곳이다.
북쪽 입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만 철문을 달아 출입을 금하고 있다. 남쪽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힌 자세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1948년 10월 31일 몇몇 사람이 총살당하자 청년들은 피신생활에 들어갔고 일부 노약자들은 그냥 마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11월 18일 밤 늦게 불을 켜고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에게 줄 떡을 만들던 집을 덮쳐 3,40대 여인들 5명을 총살하고 집에 불을 지르자 모든 주민들이 이불과 식량 등 생필품을 짊어지고 선흘곶 등지로 은신생활에 들어갔다.
11월 21일에는 토벌대가 텅빈 마을에 불을 질렀고, 숨어 있는 주민들에게도 소개령이 전해졌다. 해변 마을에 연고가 있는 일부 노약자들은 내려갔고 일부는 계속 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학살은 해변에 내려간 사람들에게부터 시작되었다.
11월 23일 소개민수용소에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들 5명을 끌어내 함덕 모래밭 등 여기저기에서 총살했다. 이제는 산에 있던 사람들은 내려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곳에는 4·3 당시 선흘주민 200여명이 은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11월 21일 함덕 주둔 9연대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되자 피신했던 주민 중 40여명이 한꺼번에 총살을 당했다.
11월 25일 목시물굴에서 1㎞남짓 동쪽에 있던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총살을 당하거나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토벌대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끝에 또 다른 은신처였던 목시물굴을 파악했다. 다음날인 11월 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전 날 도틀굴에서의 희생 소식을 이 날 아침에야 감지한 주민들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더러는 식사준비를 하던 중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토벌대는 선흘곶을 향해 박격포를 쏘며 묵시물굴로 향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목시물굴로 들어갔다. 굴 속에다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숲으로 도망가지 않고 굴 속으로 숨었던 주민들은 대치 끝에 결국 총살을 당해야 했다.
이곳을 안내했던 사람(한모씨)도 함께 총살을 했다고 한다. 조명옥(여, 03년 82세) 씨는 "채 돌도 안 지난 여자아이는 자꾸 우니까 울음소리 때문에 들킬 것을 염려한 아이 아빠가 입을 틀어막았는데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고 했다.
일부는 인근 숲속으로 뛰었다. 김형조 씨는 “아내와 형님 등 가족이 목시물굴에 숨어 있었다. 집에 있으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임시 먹을 것을 들고 주민들이 목시물굴에 숨었다. 토벌대가 총을 쏘면서 들어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목시물굴로 숨어 들어갔다.
형님이 나한테 빨리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이왕 죽을 거 다른 데로 뛰자고 생각해서 동쪽 숲으로 뛰었다. 결국 그 때문에 살아났다."고 증언했다.
내부가 넓은 목시물굴에는 노약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토벌대는 30명 가까운 사람들을 총살한 뒤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태웠다. 이 날 희생된 사람은 60대 1명, 50대 2명, 40대 1명, 30대 8명, 20대 6명, 10대 후반 10명이다.
그리고, 일부는 현장에서 사살하지 않고 함덕리 대대본부로 데리고 갔다. 토벌대는 이들을 취조하다가 이틀 후인 11월 28일 북촌 지경인 속칭 '엉물'로 데려가 20대 5명, 10대 후반 2명을 총살했다.
토벌대는 목시물굴에서 붙잡은 주민 한 사람을 앞세워 11월 27일에는 '밴뱅디굴'에 숨어 있던 주민들 6명을 총살했다.
목시물굴에 숨었던 고춘석 씨는 “군인들과 굴 안에 있던 청년이 말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씩 대치했다. 결국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이 모여지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벌써 굴 밖에는 총살당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태어난지 100일도 안된 어린아이도 죽었고 50세 넘은 노인도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마을이 불태워지자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어린 아들 둘과 함께 선흘곶에 있는 목시물굴에 숨었다가 잡혔어요. 군인들은 주민 대부분을 굴 입구에서 죽이고 아기 업은 여자 등 일부는 따로 분리해 함덕으로 끌고갔지요. 난 두 살난 아들을 업고 있어서 학살을 모면했습니다. 일곱 살난 아들을 급히 '빌려업은' 김형조씨 부인도 구사일생했습니다." (조명옥씨 증언)
"난 목시물굴에 숨어 있었는데 반못굴에 있는 사람들이 희생되자 이튿날 몇몇이 모여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반못굴로 향하던 중 갑자기 박격포 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다시 목시물굴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난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더 위쪽을 향해 뛰었습니다. 웃밤오름 부근까지 올라가 밴뱅디굴에 숨었지만 다음날 밴뱅디굴도 발각되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맞서 싸우자며 굴 안에 방호벽을 쌓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굴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곳을 열심히 팠더니 굴 밖으로 구멍이 뚫렸어요. 밖으로 나오자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난 '노랑개다' 고 외치며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결국 그 굴에서 5명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희생되었습니다."(당시 선흘 주민, 1997년 75세 김형조씨 증언)
"목시물굴에 들어가지 않은 네 명이 덕천리 지경의 높은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노라니까, 낮 시간이 되니 막 연기가 나고 총 쏘는 소리, 사람 죽어가는 소리가 엄청 들렸습니다. 눈 뜨고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습니다.
시신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웠는데 서로 뒤엉켜 있었습니다. 우리(탈출에 성공한 몇몇 젊은이)는 까마귀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시신을 가매장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 명단을 적은 노트를 두 권 만들어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죽거든 이 항아리에서 문서를 찾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선흘1구는 300가호였는데 157명이 희생됐습니다."(김형조씨 증언)
목시물굴에 은신했던 주민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을 '반못'까지 끌고 오면서 건장한 남자들에겐 목시물굴에서 먹던 식량을 지고 오라고 했는데, 장정들이 식량을 지고 와서 GMC 차량에 싣자 그들을 반못 바로 옆 '궤우물' 인근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은 고백선, 고달홍(고달옥), 안창학(안창하), 고순규 등이다. 또 고태근은 무겁게 식량을 지고 와서 힘들어서 비틀거리니까 새동네 쪽으로 끌고가 총살시켜버렸다. 군인들은 총살에서 제외된 주민들을 GMC 차량에 태우고 함덕 대대본부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고문을 받고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인근 대섭이굴과 벤뱅듸굴 등을 안내한 후 총살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억물에서도 15명 이상이 집단학살 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이 날 총살된 희생자는 고경환, 고달옥, 고백선, 고순규, 고영백, 고일생, 고임형, 고태근, 고태휴, 김기환, 김병규, 김삼준, 김성천, 김성홍, 김정봉, 김태진, 김홍인, 김봉수, 부사인, 부서남, 부원화, 부좌룡, 부희룡, 부춘하, 안도훈, 안두용, 안창성, 안창윤, 안창하, 안태규, 안태인, 양중근, 윤구성, 윤한생, 임원준, 정창호, 조영순, 조홍배, 한정선, 한재준, 한재준의 딸 등 40여명이다.
[출처] [향토문화]선흘주민 200여명 은신.. 선흘1리 목시물굴|작성자 고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