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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9) 초기 교회의 성화와 성물
순교자 모발이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성물로 몸에 지니다
- 1925년 파리에서 간행된 「조선과 프랑스인 순교자」에 수록된 삽화. 형장에 효수된 천주교인의 머리를 그린 것으로 그 옆에 나무 목패가 함께 걸려있다.
봉물짐에 숨겨온 성화와 성물
1784년에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뒤 얼마 못 가서 조선 천주교회에는 1000명에 달하는 신자가 생겨났다. 신앙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앞서 「송담유록」에서 명례방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압수품 중에서 성화 상본이 든 작은 주머니가 사람마다 나왔고, 충청도에서는 신자들이 저마다 상본과 편경 등을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기록을 살핀 바 있다.
한편 이승훈은 1789년 말, 윤유일을 통해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지은 몇 가지 독성죄(瀆聖罪)를 고백했다. 그중 세 번째 질문 중에 “북경에서 귀국할 때 저는 상본을 외교인들에게 맡겼다가 그 후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것은 독성죄가 아닙니까?”라고 한 내용이 있다. 국경 검색에 걸릴까 봐 지녀온 성물을 외교인의 손에 맡겼다가 되찾았는데, 이것이 신성 모독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질문이 너무 순진해서 미소가 지어진다.
이 질문은 몇 가지 사실을 일깨워준다. 1784년 봄, 이승훈은 귀국할 때 천주당에서 받거나 자신이 구입한 많은 서학 관련 서적을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 십자가와 상본, 그리고 성인 메달과 묵주 등의 성물도 듬뿍 받아와서, 신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명례방 집회 당시 저마다 성화 상본을 지녔다고 한다면, 당시 그가 가져온 물건의 부피가 만만치 않았을 테고, 이는 정상적인 국경 심문에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는 물품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승훈은 어떻게 무사히 반입할 수 있었을까? 위 편지에서 이승훈은 외교인들에게 맡겼다가 다시 돌려받았다고 썼다. 아마도 수색에 예외가 되는 국왕에게 가는 봉물짐 속에 이 물건들을 숨겨왔을 테고, 그것은 서장관의 직분에 있던 아버지 이동욱 윗선의 양해와 지시가 있거나, 해당 실무 담당자와의 뒷거래가 있어야만 가능할 일이었다.
귀국 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신자들에게서 상본과 성물에 대한 요청이 빗발쳤고, 여기에 부응하려면 제작이 불가능한 편경 같은 성인 메달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집회 때 내걸 예수상이나 십자가와 묵주 같은 것은 점차 자체 제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이글에서는 「사학징의」에 부록으로 수록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 중에서 책자와 문서류를 제외한 물품을 살펴 당시 전례에 소용된 성화와 성물에 대해 알아보겠다.
먼저 흥미로운 것은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한 물품 중 도상판(圖像板)의 존재다. 도상판은 성상을 새긴 판목인 듯하고, 여기에 먹물을 묻혀 찍어낸 뒤 채색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유년의 순교자 송재기(宋再紀)의 직업이 각수(刻手)였다고 밝힌 「사학징의」 속 공초 기록과 묘하게 겹쳐진다. 크기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미사 전례를 드릴 때 벽 뒤에 붙여놓는 제법 큰 성화를 찍는 원본 틀로 보인다. 또 정광수의 집에서 나온 물품 중에 요화초(妖畵草) 1장이 있다. 성화를 직접 그린 초본으로, 복제를 위한 범본(範本)으로 보관된 것일 듯하다.
- 묵주 형태에 성인 메달이 달린 초기 교회의 성물. 다산영성연구소 제공.
두발과 나무 조각이 든 주머니
이밖에 성화 관련 물품은 한신애의 집에서 나온 도상족자 3개와 윤현의 집에서 압수된 요상족자(妖像簇子) 3개, 그것을 담아둔 요화갑(妖畵匣) 4개, 그리고 김희인의 집에서 나온 요화족자(妖畵簇子) 3개가 더 있다. 족자는 마족(魔簇) 또는 요족(妖簇)으로도 불렀다. 윤현과 김희영의 족자 중에는 여상(女像)이 하나씩 포함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화상이었을 것이다. 조금 큰 크기의 상본을 족자로 표구해 예배 장소에 펼쳐 거는 용도였을 것이다. 목인판(木印板)도 있으나 인문(印文)이 새겨진 것인지 성상을 찍어내는 인판(印板)인지 가늠키 어렵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많은 작은 주머니들이다. 새끼 꼬듯 엮어 짠 승낭(繩囊)과 진홍빛의 폭넓은 수낭(繡囊), 이밖에 백목각낭(白木角囊), 대목낭(大木囊) 외에 소소낭(小小囊), 색소낭(色小囊), 소소수낭(小小繡囊) 등 명칭과 종류가 다양하다. 이 주머니들은 앞선 글에서 보았듯 상본이나 편경을 넣어두고 호신부(護身符)처럼 몸에 차고 다니던 용도였다. 상본만 든 경우와 편경을 넣은 경우는 모양이 달랐던 것 같다. 성두(盛斗)로도 불린 주머니는, 편경을 솜으로 싸서 채워 넣은 모양이 가득 채운[盛] 됫박[斗]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던 듯하다. 조혜의의 공초 속에 사학하는 사람들이 몸 주변에 의례 차고 다니던 것들이라고 쓴 물건이 바로 이것이다.한신애 집에서 나온 작은 주머니 6개 중에, 두발과 나무 조각 및 잡분말 등이 들어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또한 앞서 보았듯 사학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두발과 그들이 목이 잘릴 당시 목 아래에 고였던 목침의 도막이었다. 목침은 왜 받쳤나? 희광이의 칼날이 목을 자르고 나서 땅바닥을 찍어 칼날을 상하게 할까 염려해서였다. 굳이 붉은 천으로 주머니를 만든 것은 순교자의 보혈(寶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정섭의 집에서 나온 작은 주머니에서도 작은 나무 조각과 머리카락이 함께 들어있었다.
순교자의 두발이나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 등을 주머니에 담아 몸에 지님으로써 그들의 순교 영성이 자신과 일체화되고, 자신을 지켜주기를 꿈꾸었다. 한편으로 이들 주머니 속 물건들은 단순하게 상징적 소지에 그치지 않고, 기적을 만드는 성물(聖物)이 되기도 했다.
주머니 속 물건의 용도
조선 교회는 윤지충 순교 이후 북경 밀사 편에 윤지충의 선혈을 적신 수건을 여러 장 가져갔다. 이때의 사정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자세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에 형장에서 목이 잘렸다. 관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공포에 질리도록 사형당한 시신을 현장에 그대로 두었다.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도 좋다는 허락은 형이 집행된 지 9일 만에야 떨어졌다.
시신을 거두려고 형장을 찾은 친지들은 크게 놀랐다. 겨울이라지만 9일 동안 야외에 방치되었던 시신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고, 피부 또한 혈색을 띠고 있는 데다 경직 없이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희광이가 목을 자를 때 머리를 얹었던 나무토막과 판결문이 적힌 명패에는 묽고 신선한 피가 전혀 응고되지 않은 채 방금 흘린 것처럼 흥건했다. 그해 겨울은 추위가 유난히 매서워 그릇에 담은 물이 얼 정도였으므로 그들의 놀라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떤 이는 이같은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하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며 천주께 찬미를 올렸다. 그들은 많은 손수건을 가져와 두 순교자의 피를 적셨다. 그중의 몇 조각은 이같은 사정과 함께 북경 주교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의사마저 손을 놓아 죽음만 기다리던 어떤 환자는 피에 젖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밖에 죽어가던 여러 사람이 피가 묻은 손수건을 만지는 것만으로 병이 말끔히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작은 주머니 속에 들었던 물건들은 이렇게 해서 치유의 기적을 가져오는 거룩한 신앙의 징표가 되었다.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정섭(鄭涉)의 공초에도 이 주머니가 등장한다. 심문관의 질문 속에 “네 베개갑 안에서 나온 염주와 네가 ’흑진(黑珍)‘이라 부르는 이른바 성혈(聖血)을 담은 주머니”에 관한 내용이 있다. 정섭은 묵주를 베개 안에 넣어두고 그것을 베고 잤다. 또 성혈을 흑진이라 불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피가 오래되어 검은색으로 변한 것을 흑진, 즉 검은 보배로 불렀다. 정섭의 주머니 속 머리카락과 나무 조각에도 검은 보배가 묻어 있었다.
정섭의 공초는 이랬다. “압수된 염주는 재작년 여름에 제 아들이 천연두를 앓을 당시, 약 마시기가 어려울 때 잠시 가지고 놀던 물건입니다. 과거 기름장수 여인이 주었던 것으로, 여태 베개갑 안에 있었습니다. 두발과 자잘한 나무 조각이 담긴 주머니는 갑인년((1794) 12월에 제 아들이 복학증(腹症)으로 위독했는데 양근 사는 윤유일이 마침 땔감 값을 받으러 저의 집에 왔다가 제 아들이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 자기 몸에 지녔던 이 물건을 꺼내주며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의 학질 증세는 이 약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마시게 했는데, 끝내 효험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 기록은 주머니 속에 든 머리카락과 나무 조각의 실체와 용도를 잘 보여준다. 초기 신자들은 순교자의 보혈과 두발, 그리고 그 보혈이 묻은 나무 조각들을 잘게 쪼개 작은 주머니에 담아 몸에 지니거나 베개 속에 넣어두었고, 중병이 든 환자에게 이것을 담근 물을 마시게 하거나, 손을 대게 하는 것만으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이밖에 편경(片鏡), 요경(妖鏡), 또는 마경(魔鏡)이라 불린 성인 메달과 미사를 드릴 때 벽장 가운데 예수상을 그린 족자를 걸고, 족자 위쪽에 장식용 장막으로 드리웠던 금수홍앙장(綿紬紅仰帳)이나 목홍금수앙장(木紅綿紬仰帳), 자적장(紫的帳) 따위의 물건들이 압수 품목 중에 더 들어 있었다. 목자목납요상(木字木妖像)도 궁금한 물건 중 하나다. 짐작건대 나무 목자 모양으로 된 나무 틀 한가운데, 주석 합금 재질로 된 성상(聖像)이 박혀있는 스탠드형 물건인 듯하다. 벽에 거는 족자 대신으로 탁자 위에 세워놓고 예배를 드릴 때 썼던 것으로 보인다. 납요상(妖像) 또한 편경이 아니라 조금 큰 형태의 성상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0)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
가성직 신부들이 난동과 반촌에서 미사와 성사를 베풀다
- 마태오 리치가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관을 쓴 모습. 동파건(東坡巾)으로 불리던 관이다. 위에서 보면 왼쪽 사진과 같다.
로마 교황청에 남은 이승훈과 유항검의 편지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중 중국 및 동인도 관계문서(1791~1792) 속에, 1789년 말과 1790년 7월에 북경의 북당 선교사에게 보낸 이승훈의 편지 2통과 그에 앞서 ‘현젠(Hiuen-Chen)’으로 표기된, 유항검으로 추정되는 인물(항검(恒儉)의 중국음이 ‘헝젠 Heng-jian’이다)이 이승훈 등 교회 집행부에 보낸 편지 1통이 프랑스어 번역으로 남아 있다. 한문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모두 윤유일 편에 북경으로 전해진 편지다. 문서 속 한자의 알파벳 표기는 당시 번역자가 광동 지역 방언에 따른 한자음을 자기네 언어로 표기한 것이어서, 정확하게 대응하는 한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승훈은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유항검 추정 인물이 자신에게 의례에 관해 문제 제기한 편지를 첨부해 6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장 핵심이 되는 질문은 1786년 가을, 조선 교회에서 미사성제와 견진성사를 거행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 당시 가성직 신부 10명 중 한 사람이 그것이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함을 지적했고, 「Cheng kiao Iva yao」라는 책에서 해당 근거를 찾았으니, 이에 대한 유권해석을 청한다는 것이다. 한자음으로 추정할 때 ‘성교입요(聖敎入要)’쯤으로 볼 수 있을 듯하나 이런 책은 없다. 음이 가장 비슷한 「성교절요(聖敎切要)」에는 문제가 된 신품(神品)과 인호(印號)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 또 문제다.
편지에는 자신을 신부로 뽑은 집행부의 토론과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모임에서 독성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적었다. 또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에서 열린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음을 항의하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글은 당시 조선 교회의 집행부에 해당하는 가성직 제도 아래 10인의 신부들이 란동과 판쿠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규칙적으로 가졌고, 이 모임에서 교회의 사목 지침이나 의례, 그밖에 주요 결정사항의 의결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란동은 지금의 회현동
이 편지 중에 당시 서울 지역의 집회 공간으로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란 두 지명이 나온다. 우선 란동은 난정동(蘭亭洞) 또는 난동(蘭洞)으로 불리던 오늘날 회현동 2가에 있던 공간으로 보인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서울에 사는 최관천 요한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성사를 거행하였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고 몹시 총명하여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을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고 했고,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도 “서울에서도 규정에 따라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별명이 관천인 최요한이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집 한 채를 세낸 것을 보았다. 그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성격으로 신부들을 영접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고, 귀찮아하거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고 적혀 있다.
당시 가장 비중 있는 집회 공간으로 적시된 이 집이 바로 편지 속의 란동이었을 것으로 본다. 글 속의 최관천은 최창현(崔昌顯, 1759~1801)이다. 황사영의 백서에 따르면, 최창현의 집은 지금의 을지로 3, 4가에 해당하는 중구 입정동(笠井洞)에 있었다. 입정동은 갓[笠]을 만드는 곳에 우물이 있어 갓방우물골이라 불린 곳이다. 관천(冠泉)은 관(冠)이 갓이고 천(泉)은 샘이니, 갓우물 즉 입정의 다른 표현이다. 최창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난정동에 집 한 채를 세내어서 교인들의 집회 공간으로 제공했던 듯하다.
판쿠는 어디?
유항검이 지목한 또 한 곳은 판쿠다. 이곳은 동반촌(東泮村) 김석태의 집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판쿠는 반구(泮口)로 비정되고, 반촌(泮村) 어귀라는 뜻이다. 지금의 대학로에 해당하는 낙산(駱山) 아래 살았던 이민보(李敏輔, 1720~1799)가 지은 시에, “꽃과 바위 전해오는 반촌 어귀 마을은, 유거(幽居)가 말쑥해서 티끌 어둠 저 너멀세(花石相傳泮口村, 幽居淸隔塵昏)”라고 한 용례가 있다.
이곳은 1787년 당시 이미 이승훈과 정약용이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성균관의 유생들을 불러모아 천주교 강학을 진행했던 공간이다. 난동을 최창현이 맡아 운영했다면, 반촌 쪽은 김석태가 같은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앞서 보았듯 정약용이 쓴 제문에 나오는 김석태는 대단히 열성적으로 당시 가성직 제도하의 신부였던 이승훈과 정약용 등을 보좌했던 인물이었다.
이곳 교회는 정미반회 사건 이후로도 같은 곳이거나 혹 인근의 다른 장소를 옮겨서 운영되었던 듯하다. 다음 「벽위편」의 대목이 음미할만하다.
“1800년 6월에 주상께서 승하하시자, 옥사가 마침내 풀렸다. 새 주상이 나이가 어려 정순대비께서 반년 간 수렴청정하시니, 다시 신칙하여 금지함이 없었다. 사학의 무리가 아무 거리낄 것이 없게 되자, 가을과 겨울 이후로는 배나 성하게 되었다. 곳곳에서 설법하여, 심지어 부녀자들이 새벽과 밤에 등불을 밝혀 거리를 왕래하며 끊이잖고 잇달았다. 섣달이 되었을 때는 성균관의 제생들이 밤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거의 어깨가 맞닿을 지경까지 갔다. 나졸들이 이를 괴이하게 보아, 전날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일로 여겼다. 1801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왕래가 마침내 끊기니, 그제서야 그들이 사학의 무리인 줄을 알았다.”
정조 승하 후 국상(國喪) 기간 동안 모든 옥사가 중단된 틈을 타서, 천주교 신자들이 반년 간 아무 거리낌 없이 천주교 집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밤중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졌다. 교세가 폭발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집회 장소도 여러 곳으로 확장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밤에 귀가할 때, 부녀자들이 등불을 밝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서로 어깨를 닿을 정도여서 해괴하게 생각했는데, 신유박해 이후 종적이 완전히 끊긴 뒤에야 그들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굳이 성균관 유생의 이야기를 넣은 것은 당시까지 여전히 반촌 일대에서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1800년 12월 19일에는 형조의 나졸들이 장흥동(長興洞) 어귀를 지나다가 집안에서 나는 박자 치는 소리를 들었다. 투전판이 벌어진 것으로 판단해 창문으로 뛰어드니, 방안 풍경이 몹시 기괴했다. 사람들이 다소곳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그들이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몸을 수색하자 여러 사람의 몸에서 점례단자(占禮單子), 즉 축일표가 나왔다. 그것을 들고 형조로 돌아간 그들이 뒤늦게 물건의 실체를 알고 다시 집회 장소로 달려왔다. 하지만 모였던 사람들은 그 사이에 다 달아났고, 최필공의 종제(從弟) 최필제(崔必悌)와 오현달(吳顯達) 스테파노가 붙잡혀 왔다. 이후 최창현 등 교계의 중심인물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오면서 좌우 포도청의 감옥이 천주교인으로 가득 찼다. 신유박해의 서막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동과 판쿠, 이 두 곳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헤드 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신부의 역할을 정하고, 미사 경본을 조정하며, 미사와 성사를 행하는 주요 활동이 이뤄진 공간이기도 했다.
미사와 고해성사
이승훈의 1차 편지에서 북경에 올린 6가지 문목 중 다섯 번째는 고해성사의 적법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1786년 봄, 이들은 신자 상호 간에 고해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그 결과 갑은 을과 병에게 고해를 하되, 갑과 을 또는 을과 병은 서로 고해하지 못하게 하는 교차 고해의 방식을 채택했다. 1786년 가을에는 가성직제도에 따른 10인의 신부가 임명되었고, 미사성제와 견진성사 거행의 권한이 부여되었다.
당시의 미사 전례는 「시과경(時課經)」, 즉 「성무일도(聖務日禱)」 외에 미사경본을 형편에 맞게 첨삭한 형태를 채택했던 듯하다. 정미반회 때도 「조만과경」을 외운 이야기가 보인다. 당시 신부는 중국 비단으로 만든 제의를 입었고, 중국의 서양 신부들이 쓰던 모자와 비슷한 관을 만들어 썼다. 「미사제의(彌撒祭義)」에 나오는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의 제건(祭巾)이었을 것이다. 고해 성사 때 신부들은 단 위 높은 의자에 앉았고, 고백자는 그 앞에 서서 죄를 고백했다. 보속은 대부분 희사였고, 죄가 중할 경우 신부가 회초리로 죄인의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신부들의 가장 큰 고충은 지체 있는 부인들의 고해성사 요청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터에 여인네들의 죄 고백을 면대하고 듣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이 너무도 졸랐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해는 이를 원하는 신자들이 신부가 있는 곳을 찾아와 성사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해를 마친 이들은 마음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은 개운한 표정이 되어 기쁘게 돌아갔다.
서울을 비롯해 양근, 여주, 이천, 충주, 내포, 전주 등지에서 조직과 공간을 마련하고 신부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전국적으로 신자의 숫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1) 잇닿은 담장
포도청 감시망 피해 신자 가옥 담장 사이에 비밀 통로를 만들다
- 강완숙 골룸바가 왕족인 은언군 부인 송씨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탁희성 화백 그림.
초기 교회의 공간 운영법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 이후, 천주교 집행부는 부쩍 촘촘해진 포도청의 감시망에서 모임 공간과 조직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다. 말단의 세포 조직은 잘라내면 그만이었지만, 신부나 핵심 조직의 노출은 자칫 조선 교회 전체의 와해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포도청에서는 끊임없이 간자(間者)를 풀어 비선(秘線)에 닿음으로써 천주교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럴수록 조직의 은폐와 접선, 공간 위장을 위한 방법도 강화되었다. 포교를 하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손길을 내뻗어야 하고, 이것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위험 속으로 자신들을 통째로 몰아넣는 일이기도 했다. 특별히 1795년 이후로는 만에 하나 신부가 체포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극소수의 검증된 신자들만이 첩보 작전을 수행하듯이 비밀리에 신부와 접촉할 수 있었다.
인구가 밀집하여 외부의 시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서울의 경우는, 규모가 작거나 동족 부락의 성격이 강한 지방보다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신자들은 아래 윗집으로 담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몇 집이 얼려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으면, 무엇보다 출입에 외부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비상시에는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급히 피신할 수도 있었다.
- 「사학징의」에 수록된 윤운혜 공초 기록.
「사학징의」 중 윤운혜의 문목(問目)에는 “지아비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기꺼이 사학의 소굴이 되어, 접옥연장(接屋連墻) 즉 집이 맞붙고 담장이 잇닿은 것이 모두 사학하는 자들의 집이고, 문호상통(門戶相通) 곧 대문이 서로 통해 밤낮으로 뒤섞여 왕래하니” 운운한 대목이 보인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웃으로 모여 살며 담장을 사이에 두고 문을 통해 왕래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기찰포교에게 적발될 위험이 있으면, “이웃한 서너 집의 요서(妖書)와 요물(妖物)을 거두어 모아서, 전부 임조이(任召史)의 집에다가 감추어 두었다”고 썼다. 임조이는 윤유일의 숙부 윤현(尹鉉)의 아내였다. 이들은 조직의 보호를 위해 한 구역을 블록화해서 체계화된 비상 방호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 윤운혜의 남편 정광수 바르나바는 1799년 아내 윤운혜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 벽동(碧洞)에 집을 구해 이사한 뒤, “설법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몇 칸의 방사(房舍)를 빈터에다 정밀하게 얽어 지어, 매번 무리들을 모아 날마다 강습하였다”고 했다. 공초에서는 “1799년 서울의 벽동으로 이사 와서 최해두(崔海斗, 1668~1740)와 조섭(趙)의 집과 이웃에 살면서 대문과 담장이 서로 통하였고, 정사(精舍)를 얽어서 첨례하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이때 안국동 살던 약방 주인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가 첨례 공간의 도배까지 맡아서 해주었다. 정광수 내외는 새로 이사한 벽동 집의 빈터에 새로 예배용 건물을 지었고, 그 아래 윗집에는 천주교 신자인 최해두와 조섭이 살고 있었으며, 도배 등 공간 내부 인테리어를 당시 신도 조직에서 역할을 맡아서 함께 진행했다. 그러니까 그 집은 정광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선 천주교회의 공적 자산이었던 셈이다.
가운데 정광수의 집은 천주교 집회가 열려도, 들어오는 출입구는 여러 곳이고, 세 집은 담장으로 연결된 문이 따로 있어, 외부인이 볼 때는 특별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구조였다. 집과 집 사이의 연결통로는 외부인의 시선을 엄폐하고, 비상시 탈출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담장 사이의 비밀 통로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정조의 서제(庶弟) 은언군 이인(李)의 양제궁(良宮), 또는 폐궁(廢宮)으로 불린 공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 이 집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아들 이담(李湛)의 부인인 신씨가 살았다. 두 사람은 1791년경 천주교에 입교했다. 천주교 내부에서조차 역모와 관련된 은언군 집안의 두 여자가 재앙의 근원이 될 것이라 하여 이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강완숙 골룸바만이 겁내지 않고 두 왕족을 보러 그 집을 자주 출입했고, 뒤에는 주문모 신부를 그 집에 모셔가서 성사를 받게 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이른바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왕가의 두 여인은 본명이 모두 마리아였다. 신앙 또한 대단히 열심이어서 그녀들이 부리던 종도 여럿이 입교했고, 두 사람은 뒤에 명도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을 정도였다.
달레의 기록은 이렇다. “그들은 신부를 궁에 모셔 들이는 것을 기뻐했다. 홍익만 안토니오의 집이 바로 붙어 있었다. 신부가 거기 있을 때는 담에 비밀리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그 집과 왕래할 수 있게끔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신부는 그 집 대문을 통해 들락거리지 않았다. 옆집으로 슬며시 들어가 별채에 숨어 있다가 인적이 완전히 끊긴 뒤에 담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갔다. 왕가 두 여인의 신앙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완숙은 그 옆집을 매입해서 연결 통로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왜 하필 홍익만이었을까? 강완숙의 아들 홍문갑이 그의 사위였다. 당시 천주교도 사이의 인적 네트워크는 물샐 틈 없이 촘촘했다.
도심에는 여러 집을 연결 지어 블록화했다. 여의치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진 공간을 골랐다. 반촌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외진 곳에 있었다는 김석태의 집이 그랬고, 내부를 중국식으로 꾸민 천주당을 차려두고 주문모 신부를 모셨던 종로의 계산동(桂山洞) 깊은 골짝에 자리한 최인길의 집이 그랬다. 떨어져 있어야 바깥의 관심을 차단할 수 있었고, 저들의 접근을 이쪽에서 먼저 알 수가 있었다.
주문모 신부의 은신술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를 통한 주문모 체포 작전이 실패하고,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의금부에 끌려가서, 당일 자취 없이 형을 받아 죽은 뒤, 조선 정부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가 중국인 신분이었기에, 자칫 이 문제는 중국과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었다. 그에 대한 수배와 추적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정조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그를 체포해 덮을 생각이었다.
포도청에서는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했지만, 천주교도들의 신부 보호를 위한 필사적 노력에 가닿지는 못했다. 「벽위편」에 당시 우포도대장 이해우(李海愚, 1760~1832)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해우가 연부(蓮府), 즉 장용영(壯勇營)에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사학의 무리를 자세히 조사하며 주문모를 기찰하여 잡으려 한 지가 벌써 4, 5년이 되었다. 그간 단서를 많이 얻어 주문모를 거의 잡을 뻔한 기회가 여러 차례였지만, 혹 부인의 가마를 타고, 혹은 상복을 입고, 정처 없이 거처를 자주 옮기는지라, 매번 팔을 스치며 지나가면서도 놓쳤다.”
1795년 실포 이후 결정적인 순간에 간발의 차이로 번번이 체포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주문모 신부를 붙잡으려는 쪽과 지키려는 측 쌍방간에 필사적인 두뇌 싸움이 치열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당시 책임자가 이해우를 찾아가서 자문을 청했을 때, 이해우는 말없이 「염문기(廉問記)」란 제목의 서류 한 뭉치를 내어주었다. 그 안에는 그간 자신들이 수집한 천주교 신자 조직에 관한 정보와 탐문 실패의 증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제공한 이 고급 정보들이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조직 와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중간 거점의 존재
박해의 불길이 점차 거세지면서, 천주교도들은 고정 거점이 노출되었을 경우 급하게 피신할 만한 장소를 도처에 마련해두어야 했다. 교계 중심 인물들의 집은 이미 감시망 안에 포착되어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중간 거점들이 곳곳에 필요했다.
「사학징의」 중 김계완(金啓完)은 공초에서 “올해(1801년) 2월 초에 나라의 금지령이 지극히 엄한지라 저는 황사영, 이용겸 등과 함께 도피하여 용호영 안에 있는 사학하는 매파(媒婆) 김연이(金連伊)의 집에서 유숙했습니다”라고 했다. 검거조직의 턱밑에서 이들의 동태를 한눈에 보면서 이들은 숨을 죽인 채 한동안 숨어 있었다. 이른바 허허실실에 해당하는 움직임이었다.
다시 검거망이 좁혀 오자 김계완 등은 동네 안 돈녕부 근처의 우물이 있는 대장장이 최가네 집에서 10여 일 은신했고, 다시 반촌에 갔다가, 계동으로 계속 거처를 옮겨가며 숨어지냈다. 이후 그는 앞집에 살며 자신을 포교했던 과부 윤씨의 도움으로 아현의 활 만드는 한성호의 집 뒷방에 세를 들어 숨어 살았다. 이 과정에 다시 소공동의 필공(筆工) 곽정근과 동구 안 최가, 재동 사는 곽정근의 스승인 이가 등의 존재들이 잇달아 거명되고 있다. 손경윤 또한 공초 과정에서 동막의 처족 과부 태씨(太氏)의 집과 연서(延曙) 촌가, 아현 최봉득의 집, 편자동에 사는 여종 판례의 집 등의 중간 거점들을 계속 노출시켰다.
이렇듯 도심의 곳곳에 신자의 가옥이 세포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지도부의 검거를 막기 위해 며칠 간격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2) 정광수의 성물 공방
대궐 옆 동네 벽동에 집회소 만들어 미사 봉헌하고 성물 보급
- 「청구요람」에 실린 벽동 지도.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 벽동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벽동 본당의 천주교인들
1799년에 상경한 정광수(鄭光受)는 벽동(碧洞)에 자리를 잡았다. 벽동은 오늘날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길가인데도 다락처럼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벽장처럼 길게 끼어 있어서, 벽장골 또는 다락골로도 불렸다. 지금은 공사 중인 송현동 미 대사관 직원 숙소 서쪽과 중학동 북쪽 일대에 해당한다.
대궐과 인접한 이곳은 관리들이 들락거리던 고급 술집과 기생집이 연이어,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던 멋쟁이들이 많았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이언(俚諺)」 연작 중 「염조(艶調)」에서 “외씨 모양 하이얀 버선 신고는, 벽장동에 가지는 말아야겠지. 요즘 유행 따라 하는 침선비(針線婢)에게, 조롱을 당하지 않을 수 있나(白襪瓜子樣, 休踏碧粧洞. 時針線婢, 能不見嘲弄)”라고 썼다. 소박한 외씨 버선을 신고 벽동에 가면, 그 동네의 옷 짓는 여자들에게 뭐 이런 후진 차림새로 이 동네에 들어오느냐고 타박을 받기 쉽다는 얘기다.
대궐 바로 옆 동네인 벽동에 정광수는 별채를 들여, 천주교 집회소를 열었다. 그는 천주교 신도들에게 돈을 모금하고, 가까운 이들의 도움을 받아 벽동 집을 마련했다. 「사학징의」에 보면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가 충훈부(忠勳府) 후동(後洞), 즉 안국동에 집회 공간을 마련할 때도 김계완, 황사영, 이취안, 김이우 등이 각각 100 냥씩을 염출해서 마련했다고 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새로 본당 하나를 연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사학징의」 중 윤점혜의 공초에 따르면, 이곳에서 이들은 “매달 첨례와 송경(誦經)을 6, 7차례 또는 10여 차례씩 행하였고, 첨례날에는 각처에서 모임을 갖고, 남녀가 섞인 채 강학하였다.”
벽동 집회소는 최해두와 조섭의 집을 양옆에 두고 있었다. 최해두는 윤유일의 숙부인 윤현(尹鉉)의 둘째 사위였고, 여주 사람으로 순교한 최창주의 조카였다. 조섭 예로니모는 조도애(趙桃愛)의 오라비로 정광수를 도와 주문모 신부를 모셔와 함께 천주교를 공부하고 미사를 드렸던 인물이다. 벽동에는 이 세 집 말고도 천주교 신자들이 널려 있었다.
정광수의 집이 있던 곳의 통수(統首)였던 최경문(崔慶門)도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정광수의 집에 사서(邪書)를 은닉해두었다가 1801년 3월 19일에 검거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윤유일의 숙부 윤현과 임조이(任召史) 내외도 정광수의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안국동에 옮겨 와서 살고 있었다. 광주(廣州)에서 올라온 심낙훈(沈樂薰)도 그 집에 임시로 머물렀다. 윤현의 셋째 딸이 심낙훈의 아들과 혼인했다. 그러니까 윤현과 심낙훈은 사돈 간이었다. 심낙훈의 여동생 심아기도 동정녀로 신앙을 지키다가 포도청에서 맞아 죽었다. 똘똘 뭉쳐 안팎으로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다.
이렇게 보면 정광수가 굳이 벽동에다 집회소를 마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소를 정할 때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있던 홍필주가 입지 조건의 타당성을 살피러 왔던 것만 보더라도, 당시 교회 본부의 지시에 따른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주변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동네에 술집과 기생집이 많아 뜨내기 길손이 많았다. 이런 점도 천주교인들의 빈번한 왕래가 바깥사람의 특별히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어 유리했다.
- 복자 정광수·윤운혜 부부 초상화. 오동희 화백 작.
김치 가게 여주인 최조이
「사학징의」에 당시 필동에 살며 장과 김치를 담가 술집과 기생집에 판매하던 최조이란 노파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가게로 정광수 집 어린 계집종이 자주 와서 장과 김치를 사갔다. 첨례일에는 밤을 새워 기도했으므로 함께 식사를 해야 했고, 따로 음식을 마련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단골이 되어 안면이 익었다. 겨울이 되자 계집종이 값비싼 면화솜 뭉치를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 그녀는 고맙고 미안해서 답례로 자신이 담근 장과 김치를 보내주었다. 그러자 계집종이 자기 주인 마님이 한번 보자신다는 전갈을 전했다.
최조이는 여종 합덕(合德)과 같이 정광수의 집을 찾았다. 그녀는 평소의 입버릇대로 “나무아미타불! 솜도 주시고, 쇤네를 이렇게 불러주시기까지 하시니,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정광수의 처 윤운혜(尹雲惠) 루치아가 질색하며 급히 말을 제지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죽어 지옥에 갑니다. 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더니 윤운혜는 최조이에게 사학의 십계명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이것을 외우면 죽은 뒤에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답니다.”
이후로도 최조이는 윤운혜에게 자주 들렀고, 그때마다 윤운혜는 환대와 함께 그녀가 십계명을 외웠는지 점검하곤 했다. 하지만 최조이는 나이가 많아 번번이 십계명을 외우지 못했다. 윤운혜는 그녀를 답답해 하며 말했다. “고기를 안 먹는다면 정신이 절로 맑아져서, 십계명을 외울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최조이가 집에 돌아가 밥상에 오른 소고기에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딸이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물었고, 윤운혜가 한 말을 들려주자 그녀의 딸이 펄쩍 뛰면서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천주교인들이 주변에 전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단골이 되어 가까워 지면 선물과 호의로 상대의 환심을 사서 이쪽에 대해 경계를 풀게 한 뒤에, 십계명만 외우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로 그들을 끌어들였다. 복잡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입에 붙어있던 나무아미타불 대신에 십계만 외우면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들이 잘되며,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데, 못할 게 없었다. 게다가 한번 그 무리에 들기만 하면 무슨 일이건 서로를 위하고 성심껏 도와주었다. 신분이 낮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고기를 못 먹게 하면서까지 십계를 외우게 하려 한 것은 그것이 세례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801년 3월 26일, 최조이는 딸 성조이와 함께 포도청에 붙들려 왔다. 공초에서 성조이는 소고기 사건 이후 어머니를 그 집에 다시는 가지 못하게 했다고 진술하였고, 최조이의 순실(淳實)한 태도에 거짓일 리 없다고 믿은 심문관의 판단에 따라 모녀는 과연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운혜 집 여종은 포도청에 끌려가서, 두 모녀가 모두 세례를 받아, 성조이는 본명이 마르타(馬達), 최조이는 본명이 이사벨(二四發)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성물 제조 공방
정광수의 벽동 집은 당시 서울 지역에 공급할 교리서와 성물, 성화 등을 제작하는 성물 제작 및 판매소이기도 했다. 검거가 시작되자, 정광수는 자기 집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서적과 성물들을 황급히 안국동 윤현의 집으로 옮겼다. 하지만 포도청의 정보망이 한발 더 빨랐다. 윤현의 집 구들장을 들어내자 그 안에서 천주교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정광수의 일기장도 있었다. 일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누구 누구의 집에 왕래한 내용과 포교 대상으로 삼은 남녀의 동향에 관한 내용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의금부에서는 이 일기책을 밀봉해서 포도청에 내려보내 이를 근거로 정광수를 취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붙들려 왔다. 이문동에 살던 송건(宋健)은 그의 아내가 돈을 받고서 교리 서적을 베껴 써준 죄로 부부가 함께 검거되었다. 필사본 자료를 전문적으로 베껴 써주고 사례를 받는 직업 필경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이 미치지 못하니 이렇게 해서라도 신자들의 수요를 맞춰주어야 했다.
서울의 여러 집회소 중 성물의 제작과 판매에 관한 기사는 정광수 관련 인물들에게서만 나온다. 그가 성물의 제작과 보급을 전담했다는 의미이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보급도 중앙에서 맡았던 듯하다. 또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손경윤은 요서(妖書)를 직접 베껴 전해 주거나, 봉전행매(捧錢行賣) 즉 돈을 받고 판매하기까지 했다. 그는 앞서 정광수 집의 도배를 해주었던 인물이다.
「눌암기략」에는 “1797년과 1798년 사이에 사서(邪書)가 크게 행해지자, 책을 빌려주는 자가 큰 이익을 얻었는데, 언문책이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고 썼다. 도서대여점에서도 비밀리에 천주교 서적을 취급하여 큰돈을 벌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언문으로 풀이한 책이었다고 했다. 실제 신유박해 당시 압수한 「요화사서소화기」에 보이는 서책 목록만 보더라도 한문책보다 언문책이 훨씬 많았다.
「사학징의」 중 윤운혜의 공초에 김흥련(金興連)과 이흥임(李興任) 김경애(金景愛)가 요서(妖書)와 요화(妖畵)를 사갔다고 자백한 내용이 있고, 스스로도 요화 같은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수조행매(手造行賣)’ 즉 직접 제작하여 판매한 일을 자백하기까지 했다. 정광수의 공초에도 요상(妖像)과 요화를 직접 만들어 매매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행매(行賣)란 표현은 돌아다니며 판 것이 아니라, 판매를 했다는 뜻이다.
정광수의 벽동 집에서는 주일마다 신자들이 모여 미사와 송경을 하고, 수시로 교리 공부 모임이 열렸다. 주문모 신부가 직접 미사를 집전할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서와 성화, 성상 등 성물의 제작도 이곳에서 직접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책의 경우는 전문적으로 필경하는 사람을 고용해, 비용을 주고 책자를 제작게 하여 납품을 받았고, 성화와 성물 등도 직접 만들어 신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성당과 그에 딸린 성물 공방과 판매소까지 갖춘 형태였던 셈이다. 성화와 성상에 관한 내용은 따로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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