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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건강칼럼 (596)... 한국스포츠의 ‘큰 별’ 타계
박명윤(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김운용(金雲龍)과 태권도(跆拳道)
한국 체육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김운용(金雲龍) 前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향년 86세를 일기로 10월 3일 타계했다. (사)김운용스프츠위원회에 따르면 김 전 부위원장은 10월 2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다음날 3일 오전 2시 21분 별세했다. 지난 9월 2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의 개촌식 참석 등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사망하여 체육계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 장례는 태권도장(葬)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9일 오전 8시 30분 국기원에서 엄수된다.
고인은 세계 스포츠계에서 역대 한국인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인 IOC 부위원장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며, 우리나라의 국기(國技)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인은 2015년도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어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62)와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인 박신자(74)와 함께 올림픽파크텔에서 11월 13일 열린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참석했다.
김운용(Kim Un-yong)은 1931년 3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구주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조선민보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서울 태생으로 신세대 여성이었다. 김운용은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후 어머니를 따라 상경했다. 서울 앵정소학교(현 덕수중학교)에 입학했으며, 학창시절 김운용은 권투, 유도, 스케이팅, 공수도(空手道) 등 운동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또한 공부도 잘 했으며, 특히 영어를 잘해 외교관이 꿈이었다.
김운용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학년 때인 1950년 북한의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장교로 입대하여 능숙한 외국어 실력으로 UN 연락장교로 선발되어 근무했다. 미국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55년에는 미국 텍사스주의 웨스턴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61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1961-63년 군정(軍政)하에서 내각수반의 의전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김운용은 196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과정을 그리고 1963년에는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1963년부터 68년까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UN주재 한국대표부 참사관, 주영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이 원산항 앞 공해(公海)상에서 미국 해군 소속 정보함 푸에블로(USS Pueblo)호를 납치한 사건이 일어나자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김운용을 대통령경호실 보좌관으로 발탁했다.
김운용이 태권도(跆拳道)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1971년 박종규(朴鍾圭, 1930-1985)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대한태권도협회(Korea Taekwondo Association)는 이미 1961년에 창립되었으나 여러 파벌이 난립한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로서의 위상을 목표로 단일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김운용(金雲龍)을 회장으로 영입했다.
박종규의 지원 아래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취임 초부터 의욕적인 사업을 펼쳐 1971년 4월 15일 계간 <태권도>지 창간호를 발간했다. 창간호 첫 쪽에 박정희 대통령의 ‘국기태권도’ 휘호를 게재했다. <태권도>지 발간은 당시 1백30만 태권도인에게 기술적인 측면의 이론화와 최초로 협회 공인 ‘태권도교본(‘품새’편)’의 발간(1972년)은 통일된 기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태권도(跆拳道)는 고대 국가의 제천(祭天)행사에서 신체 단련의 하나로 행하던 무예(武藝)에서 기원한 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시대에는 택견(태껸, 托肩), 수박(手搏)으로 불리며 무인들에 의하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택견이 무예뿐 아니라 스포츠로도 성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광복군 등 항일투쟁을 하는 애국자들이 신체단련으로 태권도를 하였다. 해방 후 1961년에 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되었다.
태권도는 1960년대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국제적인 스포츠로 성장하였다. 1973년에 서울에서 세계 태권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세계 각국에 태권도 사범을 파견하여 많은 나라에 태권도를 보급했다. 세계태권도연맹을 설립하고 규정 등을 정립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 경기’ 종목으로 치러졌으며, 마침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경기’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첫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태권도 4종목 중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태권도가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합류한 까닭에 언제든 올림픽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으나 201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에서 발표한 2020년 도쿄 올림픽대회부터 실시할 핵심 종목 25개에 태권도가 포함되어 향후 올림픽에서도 계속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한 국가에서 남녀 각각 2체급씩 모두 4명만 참가할 수 있었으나, 2016년 리우 올림픽에는 세계 태권도연맹 체급 랭킹에 따라 한 국가에서 8개 체급에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태권도는 선수의 체중에 따라 체급을 나뉘며, 올림픽 경기는 남자 58kg/ 68kg/ 80kg/ 80kg 이상 등 4체급이며, 여자는 49kg/ 57kg/ 67kg/ 67kg 이상으로 나뉜다. 태권도는 경기 시간 2분 3회전으로 치르며, 회전 간 휴식 시간은 1분이다.
태권도의 기술에는 두 사람의 ‘겨루기’ 외에 상대방 없이 스스로 연마하는 방법으로 ‘품새’와 ‘격파’ 기술이 있다. 이는 호신술(護身術)로도 효용가치가 높으나 올림픽 경기에는 해당되지 않는 분야이다. ‘겨루기’는 2명의 선수가 상대를 지르기, 차기 등의 기술로 공격해 승패를 겨룬다. ‘품새’는 가상의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기술이며, ‘격파’는 태권도 기술 연마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판자나 벽돌 등을 주먹이나 손날, 발을 이용하여 격파한다. 필자의 손자는 7세부터 태권도를 시작하여 초등학교 5학년인 현재(11세) ‘품새’ 3단으로 시범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울 역삼동에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인 국기원(國技院)을 1972년 11월에 건립되어 이곳을 태권도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김운용은 태권도의 국제화에 관심을 가지고 1973년 3월 최초로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국기원에 개최되었다. 또한 세계 35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세계태권도연맹(世界跆拳道聯盟ㆍWorld Taekwondo Federation)이 1973년 5월 28일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김운용은 연맹의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2004년까지 총재로 활동했다. 2004년부터 조정원(前 경희대 총장)이 총재직을 맡고 있다. 연맹은 2017년 7월 기준으로 208개국의 회원국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은 1975년 10월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GAISF)에 가입하여 태권도 세계화에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다. 특히 일본의 ‘가타테’와 북한의 지월을 받고 있는 국제태권도연맹(ITF)에 앞서 인정받았다.
테권도는 1994년 9월 4일 파리 제103차 IOC총회에서 만장일치로 2000년 9월에 개최되는 호주 시드니올릭픽의 정식종목으로 승인되었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올림픽에 진입하기까지 100년 정도 걸렸지만 태권도은 불과 20년 만에 정식종목이 되었다. 이 역사적 쾌거는 김운용이 오랫동안 공들여온 물밑작업의 노력과 그의 IOC 내에서의 업무능력 인정 그리고 해외 태권도 사범들의 열정 등 총체적 결실이라는 평가이다.
김운용은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그해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ㆍ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총회에서 사망한 박종규 위원의 뒤를 이어 한국의 6번째 IOC 위원에 선출되었다. IOC 위원은 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하며, 위원으로 선출된 자격은 영구적이다. 대한민국은 1947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1차 IOC 총회에서 5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되었으며, 북한은 1963년에 가입이 승인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초대 위원장으로 비켈라스(Demetrius Vikelas) 선출되었으며, 첫 올림픽 대회는 1896년 4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IOC는 올림픽 대회의 정기적인 개최, 국제경기의 조직과 스포츠 정신 고양 등을 목적으로 한다. 비켈라스에 이어 2대 위원장에 쿠베르탱, 3대 라투르, 4대 에드슈트룀, 5대 부론다자, 6대 키라닌, 그리고 제7대는 사마란치(Juan Samaranch), 8대 로게(Jacques Rogge)에 이어 현재 위원장은 2013년에 취임한 토마스 바흐(Thomas Bach)이다. 역대 위원장 9명은 모두 백인이다.
태권도는 김운용의 영향력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94년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결정되었다. 김운용은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동시입장과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도 기여했다.
김운용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폭넓은 대인 관계로 국제 스포츠 관계자의 신망을 얻어 1992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IOC 집행부는 임기 8년의 회장 1명, 임기 4년의 부회장 3명과 이사 5명이 있으며 모두 투표로 선출한다. 김운용은 1990년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세계 스포츠계 인사들 중에서 2위로 평가를 받았고, 유럽 언론에서도 포스트 사마란치(Samaranch)로 그를 손꼽아 동양인이 사상 최초로 IOC 위원장이 될 가능성도 점쳐졌다.
김운용은 2001년 7월 제112차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치러진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유색인종 최초로 백인 전유물이었던 ‘세계 스포츠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는 IOC가 지나친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올림픽의 근간인 청소년 교육과 평화 추구하는 올림피즘(Olympism)을 최대한 살리겠다고 위원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솔트리에크시티 동계올림픽 개최지 뇌물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그의 도덕성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120명의 IOC 위원 가운데 50%가 유럽파인 탓에 김운용에게 불리했으며, 사마란치 위원장의 방해공작으로 2차 투표에서 김운용은 23표에 그쳐 59표를 얻은 벨기에의 자크 로게에게 패했고, IOC 부위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김운용은 IOC에서 불거진 스캔들과 함께 한국태권도계를 오랜 기간 지배해 온 그의 영향력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단적으로 대한태권도협회 운영에 개입했으며, 그 과정에서 횡령 혐의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김운용은 각종 의혹으로 2002년 대한체육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에 김운용은 IOC 위원 제명 위기에 몰려, 2005년 7월 싱가포르 IOC 총회를 앞두고 IOC 위원직을 사퇴했다.
김운용은 지난 2000년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동행했다. 올해 대선에서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돕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김운용은 ‘나는 은퇴한 사람’이라며 현안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 참가와 관련된 조언을 하기도 했다.
2005년 이후 김운용은 칩거 생활에 들어갔으나 국내 스포츠계에서는 조용히 활동을 했다. 2016년에는 한국 스포츠 발전과 스포츠 외교 강화, 태권도 육성과 세계화를 목적으로 ‘사단법인 김운용스프츠위원회’를 설립했다. ‘김운용컵 국제오픈태권도대회’를 2017년 10월 28일-11월 1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급격한 노환(老患)으로 10월 3일에 타계했다.
글/ 靑松 朴明潤(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아시아記者協會 The AsiaN 논설위원) <청송건강칼럼(596). 2017.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