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의심 없이 믿어 봅시다.
우리가 살면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사는 부부와 자식들도 믿지 못하는 구석이 있고,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어 마음도 상하고 싸움도 하고, 또 상처도 있고, 그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자신과 같아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같은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환경이고, 처지이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 의심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때로는 자금이 아주 급해서 은행을 찾게 되면 아주 철저하게 신용을 조사하고, 그 신용의 해당범위 안에서 대출을 해줍니다. 그래서 심사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참 더러워서’ 그만 두고 싶은 때가 많은데 한편으로 은행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신용이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돈입니다.
그래서인지 친척이나 친구와는 절대로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신자들끼리 돈 거래는 더구나 조심하라고 권고 합니다. 특히 대부 대자의 관계나 가까운 신자들끼리 돈 거래를 하고 마음이 상해서 신앙도 저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흔히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듯이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따라 일어나 마음이 불안해지도록 되어 있지요. 그리고 선입관은 옳은 판단을 빗나가게 합니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도둑을 맞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게 생각되고 그를 의심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걸음걸이를 보거나 안색을 보아도 그렇고, 말투 또한 영락없이 자기 집 도끼를 훔쳐간 도둑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우연히 밭두렁에서 도끼를 찾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 아이를 만났는데 거동이 수상하기는커녕 그렇게 착해 보이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웃집 뜰에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보았는데 주인에게 “말라죽은 오동나무는 불길합니다.”하고 충고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주인이 오동나무를 당장 베어버렸는데 그 베어낸 오동나무를 땔감으로 쓰게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를 내며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불길하다고 한 이유는 땔감 욕심에서 비롯된 음흉함이었군요.”라고 말하였답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 모두 편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와 별 관련이 없으면 일견 무심하지만 자신의 이해와 얽히게 되면 아무리 옳은 것도 편견과 선입견으로 먼저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암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믿지 못하고 의심으로 가득 찬 우리들이 곱씹어 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문도 잠겨져 있고, 제자들은 의심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면서도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같이 우리의 모임 한 가운데에 서 계시는 예수님,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안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희망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내 중심과 내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행동하는 것도 편하고 안락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살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을 우선으로 살아갑니다. 나만 구령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분을 멀리 떠나 있어서 그분이 우리 가운데 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 때는 우리는 예수님을 멀리 떼어놓고 싶어지고 그분이 나를 간섭하시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분의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너희가 평화와 함께'가 아니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평화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신부님은 말합니다.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축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있겠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내 중심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만 평화와 축복과 사랑이신 주님께서 내게 오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음을 주님께서 강조하십니다. 평화도 사랑도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평화와 사랑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니 정말 어려운 삶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함께 하겠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실체로써 확인시켜 의혹을 없애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형체가 있는 존재이셨고, 그 이름은 인간의 이름입니다. 제자들의 스승이셨던 분은 인간이셨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분은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 분은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신 분으로 신성과 인성을 같이 가지신 신인(神人)이십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살과 몸을 만져보면서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도 우리의 몸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못자국도 보고, 손과 발을 만져봅니다. 일에 지쳐 막대나무 같은 어머니의 손에서 예수님의 못 자국을 봅니다. 하루 종일 일하다가 피곤에 지쳐 쓰러질 듯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에게서 예수님을 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외롭고 지친 형제들의 눈동자에서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소리 지르시며 아버지를 찾는 예수님을 봅니다. 아픈 환자를 간호하며 더러움을 마다않고 똥오줌을 받아내는 선한 손길과 미소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열려고 노력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곁에서 얼마나 오래 동안 대기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열쇠를 움켜쥔 우리의 작은 몸짓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 분은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실 것입니다. 그게 해방이고 구원이며, 회개입니다. 그러나 작은 몸짓을 원하는 그분의 뜻을 우리가 깨닫기가 왜 이토록 어려운지 모릅니다. 모든 의혹을 없애고 오직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세상에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