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 양희용
내비가 ‘잠시 후 우회전입니다.’라고 안내한다. '잠시'라는 말이 얼마의 시간과 거리를 지나야 하는지 헷갈린다. 샛길에서 우회전한 후 가속페달을 밟는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초행길을 나설 때마다 한두 번 꼭 듣는 잔소리는 운전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한참을 가다가 유턴해서 내비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재진입한다. 지도를 머릿속에 넣을 수 있거나 자율주행차가 빨리 보급되었으면 좋겠다.
철새는 텃새보다 많은 지리적 정보를 갖고 있다. 텃새는 마을버스 기사처럼 일정 지역의 정보만 잘 알면 된다. 철새는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먹잇감이 풍부하고 온도가 알맞은 서식지를 찾기 위해 자신의 생체 시계와 함께 지구의 자기장, 태양의 위치, 별자리 등을 이용하여 행로를 결정한다고 한다. 우둔한 사람을 '새대가리'라 놀리기도 하는데 꼭 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철새들은 사람이 만든 내비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좌표를 오래전부터 알고 서식지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좌표는 직선이나 평면, 공간에서 특정 위치를 지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값을 의미한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가 침대에 누워있던 중에 파리가 천장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해서 발견한 게 좌표의 출발점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좌표를 만들며 산다.
관심 지역의 경도와 위도 파악, 비행기와 열차, 공연장의 좌석 배치, 아파트의 동호수 지정, 마우스를 이용한 컴퓨터 화면의 커서 이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나는 지루한 시간에 좌표를 이용해 만든 스마트폰 게임, 오목이나 바둑, 지뢰찾기를 즐긴다. 장거리 여행을 계획할 때는 컴퓨터 지도를 열고 경로와 시간, 휴게소와 식당 등을 미리 검색하며 사전 준비를 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정해진 위치에 머물거나 이동하면서 주어진 좌표 안에서 활동한다.
3년 동안 좌표만 찍은 적도 있다. 중화기중대 사격지휘소 상황병으로 근무하면서 총보다 지도를 더 소중하게 다루었다. 곡선으로 날아가는 포탄은 관측병으로부터 받은 적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도에 찍고, 좌표를 이용하여 거리와 각도를 계산해서 발사한다. 양궁 선수가 쏜 화살이 표적지를 이탈할 때가 있듯이 좌표를 잘못 산출하면 포탄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폭발한다. 훈련 중 포탄이 무논으로 날아가 자칫 인명사고가 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좌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좌표는 수학과 지리, 과학과 국방, 우주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사람과 사물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위치정보시스템(GPS)이 항공기, 선박, 자동차 등의 내비게이션장치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동네 맛집 검색과 배달, 도심에 출현한 멧돼지와 맹금류를 비롯한 여왕벌과 철새들의 이동 경로 추적, 치매 노인과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 파악, 등산객들이 고립되거나 화재로 인한 긴급상황이 발생할 때 좌표를 활용한 위치정보시스템은 우리 생활을 한층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준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지도를 읽어라.'고 지리학자들은 말한다. 영국 외교부 기자 출신인 '팀 마샬'의 저서, 『지리의 힘』이란 책이 스테디셀러로 판매되고 있다. 지리가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현재의 좌표에서 드넓은 세상의 좌표로 뻗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지리에 관련한 문맹국 수준이다. 수능 사회탐구영역의 선택과목에 포함되어 있어 학생들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젊은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축구 이야기를 하다가 아르헨티나가 유럽에 있는 나라라고 하자 다른 친구는 미국 바로 위에 있다면서 티격태격했다.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건만 괜스레 눈이 감겼다.
주어진 일이나 삶의 목표를 좌표에 비유하기도 한다. 수학의 평면좌표에서 X축과 Y축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다. 현실과 이상, 나이와 건강 등을 고려하여 나의 삶을 평면좌표 위에 찍는다면 양과 음의 영역 중 어디에 위치할까. 청춘일 때는 당연히 플러스 구간에 있었겠으나 중노인인 지금은 원점(0,0) 근처에 머무르면서 마이너스 구간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끝을 세우고 아등바등 사는 느낌이다.
마음속의 좌표를 향해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직선이나 곡선을 타고, 때로는 빙 돌아서 달려가야 하지만 가끔은 선로에서 이탈하여 주저앉을 때도 있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많다. 영국의 4인조 록 그룹 비틀스는 음반사의 첫 오디션에서 거절당했고, 일본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는 처음 만든 전기밥솥이 밥을 너무 많이 태워 실패했고,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만든 회사 애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들은 실패를 교훈 삼아 좌표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도전했다. 도전하는 자만이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
하나의 좌표만 갖고 인생을 마무리할 수 없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운은 우연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본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좌표를 변경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이다. 좌표를 수정하면 좌절과 체념, 고민과 갈등을 극복하고 더 강하게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런 과정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좌표를 몇 번 변경했다. 교직에서 정년퇴직하고 멋진 황혼을 보내고 싶었으나 조금 일찍 사표를 썼다. 자책과 원망의 시간도 있었지만 남은 인생을 과거에 얽매여 살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좌표를 향해 열심히 뛰었고 3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막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인생의 목표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 완성은 끝이 아니라 전진과 도약을 위해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원점이다. 원점에서 우상향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주탑과 교각에 의지하고 있는 광안대교가 커다란 공간좌표처럼 보인다. 상판과 하판의 차들은 X축을 따라 좌우로 이동한다. 작은 고깃배는 포구로 돌아오고 짐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선은 Y축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빗금을 그으며 창공을 날아오르는 갈매기가 Z축을 완성한다. 각자의 좌표를 향해 이동하는 풍경이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모두가 더 높은 좌표를 향해 달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