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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표정들이 내 머릿속을 스친다.
오늘은 병원에 갔었지. 아기들을 너무 좋아해서 아기 띠에 안긴 아기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기 엄마가 아기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렸지. 어떤 아이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버렸지. 아,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아이 손을 잡은 엄마가 아이 눈을 막아버렸잖아. 어떤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저 사람 봐, 큭큭큭.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겼어?” 그 아이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지. “엄마 말 안 들어서 저렇게 됐어. 그러니까 ○○이는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겠지?”
버스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지. “저기요.” “네?” “혹시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약을 잘못 드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럼 불난 적은요?” “그런 적도 없어요.”
“내가 너였으면 자살했을 거야.”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적 없었니?”
길거리에서 스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 나와 나의 가족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의학계에서도 아직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내 병의 원인을 ‘엄마 말 안 들어서’ ‘임신 중 약물 복용’ ‘임신 중 화재’ 등으로 단정 짓고, ‘자살’ 등의 단어로 만들어내는 말들이나 동정심 가득한 눈빛들은 가진 건 없어도 작은 것에 소중함을 느끼며 주님께서 주신 하루하루에 감사를 느끼며 살아가는 나의 삶이 저들에게는 그렇게까지 가치 없어 보이나,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나는 ‘스터지웨버증후군’이라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의학적으로는 이 병을 ‘뇌의 신경학적 구조에 영향을 주는 미세 혈관증후군’ ‘뇌의 미세혈관 구조에 영향을 주는 신경 피부증후군’ 등으로 정의하고 있고, 1000명 당 3명꼴로 발생하는 ‘화염상모반’ 중에서도, 5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까지는 밝혀진 게 없다. 이 병으로 오른쪽 얼굴 전체와 오른쪽 팔과 손의 반 정도에 포도주색 반점이 퍼져 있고, 합병증으로 녹내장을 가지고 태어나 오른쪽 눈으로는 빛을 본 적이 없다. 눈부심과 눈이 붓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 결국 안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의안을 착용하고 있다. 또한 태어나자마자부터 경기를 하며 쓰러지는 날의 연속이어서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나의 외모는 언제나 튀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향했다. “꺅!”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지나가는 사람, 더럽다는 듯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지나가는 사람, 큭큭큭 웃으며 친구 몇 명이서 무언의 사인을 주고받는 중고등학생들, 일부러 내 앞에서 퉤 침을 뱉고 가는 아저씨, 쯧쯧쯧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중년의 여성들 등.
그리고 학교 다닐 때부터, 사람들은 ‘민혜’라는, 엄마가 골라서 지어줬다는 예쁜 이름보다는 ‘반쪽이’ ‘괴물’ ‘아수라 백작’ ‘조커’ 등으로 나를 불렀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집에 울며 들어오는 날이 일쑤였다.
나 자신 스스로도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였을 때가 있었다. 세수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면 앞에 보이는 모습이 내 얼굴이라는 게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 정도여서,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 세수를 하고 눈 꼭 감고 욕실에 있는 거울을 아예 보지 않고 나오는 것을 매일 스스로 ‘미션’으로 행할 정도였다.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보이는 팔과 손의 반점은 ‘잘 봐. 이게 네 모습이야’ 하고 각성시켰고, 다른 친구들은 교복을 줄이느니 염색을 하느니 한참 외적으로 꾸미는 것에 빠져있을 때도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그리고 그런 나의 ‘범생이’같은 이미지는 왠지 친구들 사이에 내가 끼지 못할 벽이 되어버렸다.
이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점점 더 비관적이 되어갔다. 이런 모습으로 과연 내가 평생 살 수 있을까? 결혼, 아니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 험한 세상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2년, 나라에서는 나같이 외모적으로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안면장애인’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면장애인’과 ‘안면인식장애’를 헷갈려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나를 ‘사회적 약자’가 아닌 단순 놀림감으로 대하거나 본인들의 순간의 감정을 내 앞에서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나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은 신앙이었다.
첫영성체 날, 나는 대표로 예물 봉헌을 했다. 첫영성체 교리 중에도 학교가 끝날 즈음 성당으로 나를 데려다줄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엄마가 나를 처음 성당으로 데리고 온 날, 성당 꼭대기의 십자가가 너무 무서워 엄마 뒤로 숨었던 것과 너무 달라진 상황이었다.
나는 첫영성체 교리를 담당했던 전교 수녀님의 추천으로 ‘안젤라’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세례명을 사랑했고, 성당에서는 엄마가 지어준 이름보다는 본명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유독 1~2년 사이 나의 일기장에는 주일학교 생활에서 있었던 일이나 ‘은총’ ‘회개’ 같은 단어들이 많았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내용의 일기를 썼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갈망한 일도 있다.
나는 제주도에서 유일한 가톨릭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안타깝게도 아프고 쓰러지는 날이 많아 친구들과의 추억은 없지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유독 중고등학교 때 집안 환경에 대한 걱정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친구들보다는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가고 마주앉아 이야기하며 위로를 얻었다.
학급 내 종교부장과 가톨릭학생회 동아리를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점심시간에 교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도 했고, 본당에서는 학생 레지오를 하며 조금씩 주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언젠가 선생님들께 고백처럼 한 이야기가 있다. 이제까지는 남의 시선을 받는다고만 생각했는데, 학교에 들어와 선생님들을 만나고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구나, 라는 걸 알았다고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마다 1회 이상은 학교를 방문해서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퇴임하신 선생님과는 따로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지 15년 정도가 되니, 이젠 학과목을 가르쳤던 선생님과 제자 관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예전과는 반대로 선생님들이 내게 자녀 고민,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서 받는 스트레스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시는데 그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인지 모른다.
학생 레지오는 중학교 입학식보다 먼저 시작했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꾸준하게 활동을 했다. 사춘기 시절 함께한 레지오라는 단체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법’과 ‘나의 삶에 감사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중학생 시절,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와 노환과 근육병으로 누워 계셔야만 하는 할머니 부부댁을 방문하는 날은 괜히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친할머니처럼 우리들을 환하게 반기는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의 단원들이 할머니와 할 수 있는 거라곤 말동무와 기도, 욕창 때문에 더러워진 패드를 갈아드리는 게 전부였지만 할머니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셨고, 우리도 할머니께서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아지시길 매일 기도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셔서 봉사를 갈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우리 단원들은 다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청년 레지오에 입단해서도 8년간 간부를 도맡아 했고, 그 14년의 경험은 아직도 언제나 성모님의 사랑과 은총을 가슴에 새기고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철야 성령기도회에 푹 빠져 살기도 했다. 그때는 엄마가 냉담 중이셨는데, 매주 금요일 밤에 나가 다음날 첫 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도회에 다녀오면 매번 나는 엄마에게 성당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엄마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한다. 나는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주시는데 엄마는 왜 하지 않느냐”며 성당을 다니는 문제로 매일같이 싸움을 반복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엄마가 레지오, 성령기도회, 로사리오 등의 활동을 하며 나보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신다.
지금은 12년째 성당 청년회 봉사를 하고 있다. 특히 전례 봉사를 할 때 가장 정성을 들인다.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독서대에 오르기 전에는 오늘 주님의 이야기가 나의 목소리로 신자들에게 퍼져나갈 텐데, 집에서 연습한 그대로 또박또박 낭독할 수 있게, 그래서 신자들이 분심 없이 같이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함께 기도해 달라고 복음선포의 사도로 불리는 사도 바오로께 기도한다.
어느 날, 같은 성당을 다니는 어른 한 분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내가 청년회 활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보셨다면서, 연락처를 몰라 성당 사무실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하시며 혹시 얼굴을 치료한 적이 있는지 물으셨다. 약간은 경계의 목소리로, 어릴 때 한두 번 말고는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탄생과 함께 닥친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상황에 나는 엄마한테서 자랐고 엄마 혼자 생계를 감당했기 때문에 치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한부모 가정’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학교를 졸업해서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다 보니 생활보장 대상자에 신청했다가 친부에게 재산 변동이 생기거나 직장을 구하게 되면 탈락하는 일을 반복했다. 치료는커녕, 내 또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친구들끼리 영화 한 편 보는 게 나에겐 그저 부러운 일이었고 내 처지는 남과 비교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성당 어른의 전화는 당분간 실감조차 나지 않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 전화 통화를 계기로 ‘생활성서’에 소개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서울 마포의 모 피부과에서 3개월에 한 번씩 레이저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 반점이 있는 쪽 피부가 비대칭으로 처져 있어서 여러 병원에 다니며 성형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과다출혈이 우려되어 성형수술은 하지 못하고 레이저치료만 하게 되었다.
“김민혜씨 들어오세요.”
또다시, 그 시간이 돌아왔다. 이제 저 방으로 들어가면 내 손을 잡아줄 사람 하나 없이 나 스스로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3년이 넘게 반복되는 싸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무서운 길을, ‘주님, 이번에도 잘 버티게 해줄 용기를 주십시오’ 짧은 기도와 함께 담담히 걸어간다.
“시작합니다.” 소리와 함께 고통의 시간이 찾아왔다. 틱, 틱, 틱틱틱틱틱, 틱틱틱틱틱틱틱틱틱.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소리가 멈추는 순간 큰 숨을 내쉰다. 굳이 표현하자면 온 살을 찢는 고통과 화끈화끈 온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 개미 수백만 마리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가려움. 무엇보다 힘들게 하는, 살타는 냄새. 마치 화장터에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냄새가 역해서, 레이저치료가 시작되면 숨을 최대한 참았다가 크게 내쉬었다가를 반복한다. 나는 치료부위가 커서 치료시간 또한 긴 편에 속하는데, 보통 내가 치료하는 동안 옆 치료실에 서너 명의 아기들이 치료를 하고 나간다. 고통에 아프고 냄새에 힘들어도 잘 참다가도, 옆 치료실에서 아앙~ 하고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매번 나를 무너지게 한다. ‘아가야, 우리 잘 참자. 주님 저와 저 아기에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리고 이 땅에 저와 같은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게 해주소서.’
한 시간이 좀 넘게 치료를 받고 나면 또 일주일이라는 회복 기간을 지내야 한다. 얼굴 전체가 퉁퉁 붓고 가렵고 열이 나서 제대로 외출하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날을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 전보다 훨씬 나은 모습의 내가 되어 있다.
때론, 왜 이렇게 힘든 일을 반복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30년 넘게 이 외모로 살면서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깊이가 무뎌지기도 했고, 이제까지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나보다 최악의 상황인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텐데 그 사람들보다는 내 삶이 낫겠지 하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치료 기회가 감사하고 마음을 다잡아야지 생각하는 이유는 감사한 나의 사람들에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모습으로 보답하기 위해서다.
나는 언제나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지만, 또한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귀하고 가장 큰 선물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나는 ‘인복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내 가족, 선생님들, 친구들, 성당 사람들 등 나를 생각하고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항상 옆에 있었고, 나 또한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법은,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이상의 삶을 살지는 못해도 실망하는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엄마가 내 치료 당일이 되면 손에서 한시도 묵주를 놓지 않고 감사한 사람들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나도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비행기 안에서, 수술대에 누워서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말없이 뒤에서 지켜봐 주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치료하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나는 지금 시각장애인이 운영하는 안마원에 사무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나 또한 2년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과정을 수료하고 올해 초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곳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한 분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누구나 자기 상처가 제일 커. 앞에 교통사고 나서 막 죽게 생긴 사람이 지나가도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픈 거야. 내가 아프면 남의 상처에 절대 공감을 못 하지.”
뭔가로 뒤통수를 한 대 쾅 맞은 기분이었다. 한때는, 왜 하필 주님께서는 이런 병을 주셨을까 원망했던 적이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본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지 못하고, 청각장애인들은 본인들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듣지 못하고, 지적발달장애인들은 본인들을 두고 이런저런 하는 이야기 알지 못하는데, 나는 나를 두고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고 인지하니 얼마나 짜증 나고 피곤한 인생인가. 신체 한 곳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이라면 사람들이 도와주기라도 하는데. 정말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마 내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도, 직접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지난날을 깨우쳐보라는 주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분의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내 안의 진정한 ‘상처’는 무엇인가. 나의 장애인가, 가정의 문제인가. 나는 나의 상처만 상처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상처는 모른척하고 있지 않나. 나는 나의 상처로 인해 매일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언젠가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직소 퍼즐을 맞춰서 액자에 담아 주는 건데, 그냥 취미생활로 시작했던 것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게 되면서 나름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퍼즐이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인생이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조각과 주님께서 보내신 나의 사람들이라는 조각들과 함께, 주님께서 주신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신 작품이 되도록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완성해 나가겠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과 인생을 함께 완성시켜 나가는 하나의 조각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눠주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빛나는 퍼즐 조각이 되어 그 빛을 다른 조각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나의 외모도 좋아지고 내면도 단단해질 것을 믿는다. 그 힘을 주실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
김민혜 안젤라(제주교구 광양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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