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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대회는 2000년 시드니(Sydney) 올림픽이 끝나고 40미리 탁구공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는 지름 38미리 셀룰로이드(celluloid) 탁구 공이 사용되었지만, 이후에는 지름이 2미리 더 커진 40미리 탁구공이 공식 사용되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녀 개인단식 우승자인 중국 공링후이(Kong Linghui)와 왕난(Wang Nan)은 38미리 시대의 마지막 올림픽 챔피언이었습니다. 40미리 볼은 기존 볼에 비해 스피드, 회전이 줄어 랠리가 늘었습니다. 늘어난 랠리는 기술 위주의 기교파 선수들보다는 힘을 앞세운 정통파 선수들에게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40미리 볼이 처음 사용된 국제 대회는 2000년 양저우(Yangzhou) 남자 탁구 월드컵이었습니다. 세계 정상권 선수들은 시드니 올림픽(9/16~9/25)까지 38미리 볼을 사용하고, 충분한 적응 시간 없이 곧바로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40미리 볼이 처음 사용된 2000년 양저우 월드컵은 이변(異變)의 연속이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공링후이는 예선에서 탈락했고, 유럽 강자 스웨덴 얀-오베 발트너(Jan-Ove Waldner)와 벨라루스 블라디미르 삼소노프(Vladimir Samsonov) 역시 예선전 패배로 8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삼소노프는 1년 전 1999년 샤오란(Xiaolan) 남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이었지만, 예선 탈락의 부진을 겪었습니다.
장-미셸 세이브 - "아직 라지볼에 대해 불평하는 상위랭커들이 많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전 세계 탁구 대중화에 기여하게 될 것"(출처 : 국민일보. 2000년 10월 16일 자)
결승에 오른 선수는 중국의 마린(Ma Lin.马琳)과 한국의 김택수(Kim Taek Soo)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양 국의 펜홀더를 대표하는 선수가 나란히 결승에 올랐습니다. 마린은 중국 류궈량(Liu Guoliang)에 이어 펜홀더의 뒷 면을 사용하는 중국식 펜홀더 선수였고, 김택수는 포핸드 파워를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정통 펜홀더 선수였습니다. 김택수는 불과 한 달 전에 출전한 시드니 올림픽에서 노메달에 그쳤지만, 양저우 남자 월드컵에서 금메달에 도전했습니다. 김택수는 8강에서 스웨덴 페테르 카를손(Peter Karlsson)을 3-1(21-16, 21-17, 14-21, 21-15), 4강에서 벨기에 장-미셸 세이브(Jean-Michel Saive)를 3-0(21-13, 21-13, 21-15)으로 완파하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마린은 4강에서 자국 라이벌 왕리친(Wang Liqin)을 3-0으로 완파하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마린 사상 첫 월드컵 우승
(출처 : 시나닷컴)
(2000년 양저우 남자 탁구 월드컵 결승전 마린 VS 김택수)
(출처 : 유튜브)
마린, 김택수의 결승전은 마린의 3-0(21-10, 21-13, 21-9)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마린은 1게임을 21-19로 승리한 후, 2, 3게임을 연이어 따내며 최종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마린은 2000년 양저우 남자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남자 월드컵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린은 2003년 장인(Jiangyin) 대회, 2004년 항저우(Hangzhou) 대회, 2006년 파리(Paris) 대회에서 우승하며 월드컵에서 총 4회 우승했습니다. 2003년 장인 대회, 2004년 항저우 대회는 결승에서 2년 연속 그리스 칼리니코스 크레앙가(Kalinikos Kreanga)를 꺾었고, 2006년 대회 결승은 중국의 왕하오(Wang Hao)를 이겼습니다.
▶ 김택수에 완승을 거둘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나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5게임까지 갈 거라 생각하고 준비했다. 앞서 맞대결에서 나는 김택수에게 3회 연속 패했다. 과거, 우리 경기가 5게임까지 가면 김택수는 나의 서비스와 공격에 적응을 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김택수를 상대로 마지막 5게임까지 가고 싶지 않았고, 3게임에서 끝내려 애썼다. 나는 오늘 내가 바란 대로 되었다.
▶ 왕리친과 경기한 4강 스코어 역시 약간 놀라웠다.
- 어떤 사람들은 왕리친이 나에게 경기를 넘겼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나와 마찬가지로, 왕리친 역시 월드 타이틀을 한 번도 따지 못했다. 이 번 대회는 그에게도 역시 대단한 기회였다. 경기 이전에 나는 매우 힘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왕리친은 전체적으로 플레이가 좋지 못했고, 나는 나의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서비스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고, 왕리친은 잘 처리하지 못했다.
▶ 40미리 볼로 다른 선수들 이상으로 훈련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 현실적으로, 대략 60~70퍼센트 수준이다. 대회 참가 전에 승리에 대한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게 높은 수준의 경기는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요르겐 페르손을 상대로 단 한 게임만을 내주었다. 40미리 볼에 관해, 나는 누구라도 처음에 스피드, 스핀에 적응해야 하고, 다르게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토대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기술을 강화해야 한다. 40미리 볼을 사용하면, 나의 게임에서 주요 변화는 백핸드에서 나타난다. 볼 스피드가 더 늦기 때문에, 백핸드 루프를 사용할 때 더욱 신중해졌다. 볼이 작을 때는, 나는 백핸드 루프를 사용할 때 약간 불안했고, 만약 범실을 몇 번 하면, 백핸드 루프를 사용하기 두려웠다. 이제, 사용 빈도는 더욱 높아졌고, 한 게임에서 2, 3회 사용한다. 더욱 자신감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압박감 역시 커졌다. 뛰어난 선수들과 경기할 때 2, 3점은 차이가 크다.
▶ 마지막 이틀 동안 기침감기를 앓았다. 몸은 나아졌나? 경기에 영향은 없었나?
- 베이징을 떠나기 전에 감기에 걸렸고,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양저우에 온 이후 계속 기침을 했다. 40미리 볼은 더 느리고, 공격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한, 랠리가 많이 늘어나 육체적으로 약간 걱정이 있었다. 나는 경기에서 많은 땀을 흘렸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피로감이 컸다.
▶ 결승전 후에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의 진짜 감정을 알려달라.
- 정말 복잡한 감정이어서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올림픽 준비 기간 내내 매우 힘들었고, 올림픽 대표에 들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특히, 대표 팀이 시드니로 떠났을 때, 나는 그들이 행복해하고, 흥분하는 것을 보았고, 나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과 계속 훈련해야 했다. 그 감정은 설명하기 매우 힘들다. 오늘 내가 우승했을 때, 나는 인생이 정말 공평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쉬운 그랜드슬램
(출처 : ITTF 홈페이지)
마린은 2000년 양저우 월드컵에서 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후, 2014년 5월 은퇴할 때까지 중국 주전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탁구 월드컵 4회(2000 양저우, 2003 장인, 2004 항저우, 2006 파리) 우승, 그랜드 파이널스 2회(2001 하이난, 2007 베이징) 우승했고, 2008년 베이징(Beijing) 올림픽에서 남자 개인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마린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없이 준우승만 3회(1999 에인트호번, 2005 상하이, 2007 자그레브) 차지하며 탁구 그랜드슬램 및 4대 메이저 대회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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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린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 했군요 세탁에서 준우승만 3번이라니...ㅠㅠ
중국식 펜홀더의 계승자라 불리는 마린. 기교파 탁구를 통해 상대방을 압박하며 감각이 아주 좋은 선수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40mm볼 대회의 첫번째 타이틀은 마린이 가져갔었군요. 변화는 적응을 요구하고 빠른 적응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었군요. 공링후이에겐 시련으로 다가왔지만 다음세대 왕리친,마린,왕하오에겐 새로운 변화 앞에서 기회를 맞이 하였고 그 결과 해당 3인방은 중국의 극강의 시대로 올려 놓은 견인차 역활을 확실히 한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달성하지 못한 안타까운 선수도 역시 해당 3명이 골고루 동시대 타이틀을 나눠가지며 그랜드슬램 직전까지 기록을 가지고 있었군요.
왕리친은 세계선수권 타이틀을 마린은 월드컵 타이틀을 다량 보유하고 있고 왕하오는 올림픽 단식 출전권을 3번이나 차지하였으나 모두 은메달에 그치는 그랜드슬램에 각각 미치지 못했고 특정 대회에서 타이틀을 보유하게 되었고 중국팀으로는 철벽방어에 큰 역활이였지만 각각 선수들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것 같군요. 마린으로써는 07년 세계선수권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을것 같고 40mm볼에서 꾸준한 성적으로 08년 올림픽타이틀을 가져왔고 그 후 내리막길에 팀내 후배들과 스피드글루금지의 거센 대항에 직면해야하는 비운의 상황을 맞이 했군요.새로운 40mm볼은 선수들의 명암을 달리하며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했던것 같아요
그 독해 보이는 마린이 울기도 했었군요.ㅋㅋ
시드니올림픽에 못나간 한이 많았나봐요
마린의 플레이스타일 ...
젤 멋지다고 느끼는 1인입니다
마린이나 왕하오나 아쉬울듯. 왕리친은 좀 나아요
빠빠빠님께서 올려 주신 좋은 기사 넘 감사드리며 잘 보고 갑니다.
탁구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매번 새로운 관점이나 토픽으로 접할 수 있어 매번 감사합니다.
40미리 시대 최초우승 체크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