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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을 나서기는 하였지만 이제 제주시까지 들어갈 일이 걱정이다. 여기에 빈 택시가 있을 리는 없고, 버스는 자주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버스 정류장을 향하여 걷고 있는데, 뒤에서 택시가 ‘빵!빵!’ 댄다. 뒤를 돌아보니 빈 택시다! 이렇게 기쁠 수가! 택시 운전사 역시 이렇게 기쁠 수가! 나 아니었으면 제주시까지 빈 택시로 갈 뻔 했는데...
삼사석지(三射石址)로 가자고 하니, 택시 운전사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미리 인터넷 지도 검색한 대로 일러준다. 내가 삼사석지는 삼성혈에서 나온 고,부,양씨가 서로 살 터를 정하기 위해 살쏜디왓(射矢長兀岳)에서 쏜 화살이 꽂힌 돌이 있는 곳으로, 내가 양을나의 후손으로서 가보려 한다고 알려주니, 운전사는 자기도 양씨이지만 제주도에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단다. 제주 관광지를 꿰차고 있을 운전사가 모를 정도이니 알 만하다.
사전에 지도 검색시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기에 택시가 근처까지 오자, 나는 운전사에게 천천히 차를 몰라고 한다. 유심히 바깥을 쳐다보는 내 눈에 드디어 사진으로 보던 삼사석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종씨 운전사는 기다려주겠다고 한다. 종씨 덕을 보는 것일까? 삼사석지로 다가가니 화살이 꽂혔었다는 현무암의 돌은 1813년 양종창이 세운 아담한 석실 안에 보호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영조 11년(1735) 제주목사 김정이 세운 삼사석비가 세워져 있다.
글쎄~~~ 삼성이 활을 쏜 것은 고대의 일인데 어찌 그 돌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을까? 그리고 석실 안에는 2개의 돌밖에 없는데, 나머지 한 화살이 맞은 돌은 끝내 못 찾은 것인가?
그런데 그 옆에는 요즈음 세운 ‘삼사석지’ 돌 비석이 높다란 기단 위에 우뚝 서있다. 글쎄~~ 여기가 삼사석지임을 알리는 비석을 이렇게 요란스럽게 크게 세울 필요가 있을까? 자본주의의 물이 들어서인지 요즈음 뭐든지 큰 게 좋다는 대물 숭배사상이 팽배하고 있으니...
우리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절에서도 전각들을 웅장하게 짓고, 커다란 야외 불상을 세우는 등으로 선조들이 주위 자연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배치한 가람의 구조를 파괴시키고 있다. 서로 조화롭게 서있는 제주목사의 삼사석비와 양종창에 세운 석실의 소담스러운 대비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겠다.
관덕정은 제주 시내에 있었다. 나는 종씨 운전사에게 감사함으로 팁을 얹혀 택시비를 내니, 종씨 운전사는 너무 많다며 1,000원은 돌려주며 잘 보고 서울 올라가라 한다. 관덕정 앞은 제주시의 중심지라 차들이 많이 다닌다. 이곳 관덕정 앞거리가 바로 4.3 사태를 촉발시킨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던 곳이란 말이지. 그 날 이 거리 어디에선가 순경이 탄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치고, 경찰이 쏜 총탄에 6명이 거리에 쓰러졌단 말이지. 내 앞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그 날의 피의 함성을 기억하려나?
관덕정(觀德亭)은 세종 때인 1448년 안무사 신숙정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운 건물로, 관덕정이란 이름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내용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관덕정’ 편액 뒤로는 큰 글씨로 ‘탐라형승(耽羅形勝)’이란 편액이, 그 편액 위에는 그보다 작은 글씨로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탐라의 경치가 무엇보다도 뛰어나니 ‘탐라형승’이란 편액을 걸었겠지. 그런데 ‘호남제일정’은 무언가? 지금이야 제주가 독립된 지방행정구역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호남에 속해 있었기에 제주의 정자에 ‘호남제일정’이란 편액이 걸릴 수 있었던 것.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한 건물인데, 이 건물만이 이렇게 남아 있어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나보다.
관덕정 앞은 복원한 제주목 관아(官衙). 입장료를 내고 관아로 들어가니, 앞에는 장방형의 연못 가운데에 작은 소나무를 실은 돌섬이 떠있고, 연못 옆은 우련당(友蓮堂)이다. 연못은 단순히 제주 목사가 관상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제주목사가 적이 성을 포위하거나 불이 났을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인데, 우련당에 앉아 경치까지 보고, 여기서 연회도 열 수 있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인 셈. 그런데 이렇게 연못을 만들어 놓으니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 그 뒤 양대수 목사는 시끄럽다고 연못을 메워버렸단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양대수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라는군. 그러나 자기가 시끄럽다고 연못의 본래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기에 1694년(숙종 20)에 이익태 목사가 다시 만들었단다.
우련당을 지나니 보이는 건물은 망경루(望京樓).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이겠는데, 실제로 이곳에 부임한 목사들은 이곳에서 서울을 바라보았다. 어느 고을에서나 지방 수령은 한 달에 2번씩은 임금님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제주 목사는 이곳 망경루에서 그러한 망궐례(望闕禮)를 한 모양이다. 귤림당(橘林堂)이란 건물도 있다. 건물 주위에 귤나무가 숲을 이루었나? 당호(堂號)에 귤이 들어간 건물은 제주도밖에 없지 않았을까?
돌다보니 어느 마당 한 구석에는 비석들이 도열해있다. 이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제주 이곳저곳에 세워둔 비석들을 이곳에 모아둔 모양이다. 비석을 살펴보는데 내 눈에 띄는 비는 양헌수 목사 제폐비(除弊碑). 양헌수라면 병인양요 때 강화도 정족산성의 수성장(守成將)이 되어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장군 아닌가? 학교 다닐 때 자기 조상중 존경할만한 분을 써오라는 숙제가 있어 양헌수 장군에 대해 써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양헌수 장군이 강화도로 발령되기 전에 이곳 제주에도 근무를 하셨구나.
그런데 비의 제목이 송덕비나 영세불망비가 아니라 제폐비라는 것은 양목사님이 이곳에 근무하실 때 무언가 폐해를 제거하는 공적을 세우셨다는 얘기 아닌가? 양목사님은 이곳에 근무할 때인 1865년 제주도가 가을에 태풍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자 조정에 호소하여 내탕금 2천냥을 하사받아 피해 복구에 힘을 쏟았단다. 영세불망비나 송덕비 하면 무언가 뻥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받는데, 제폐비라고 하니까 훨씬 더 믿음직해 보인다.
제주목 관아를 보았으니 제주 성지(城地)도 보러가자. 원래 제주성에는 둘레가 1.66km인 성이 있었으나, 1925년 제주항을 건설하면서 제주성을 헐어 매립골재로 써버려 지금은 오현단 부근에 겨우 162m 길이의 성지가 남아있을 뿐이다. 일본놈들. 자기네 성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매립골재로 사용했을까?
관아를 나와 성지를 향하여 걸어가는데, 길거리에 ‘성주청지(星主廳址)라는 표석이 보인다. 성주청? 제주는 원래 탐라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있던 곳이 아닌가?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이 탐라국에까지 간섭의 손길을 뻗쳐, 신라는 탐라의 왕후에게 성주, 왕자의 봉작을 주어 신라에 복속토록 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조선에 들어와 1403년(태종 3) 성주 제도는 폐지되고 성주청은 진무청으로 존속하다가, 지금은 현대식 건물의 우체국이 자리하고 있다.
이 표석을 보니 아까 4.3 기념관에서 고려가 탐라에 수령을 파견하기 시작한 지 15년 만인 1166년 탐관오리의 수탈과 과중한 세금에 양수가 봉기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본 것이 생각이 난다. 사실 역사적으로 반도의 위정자들은 제주에 대해 이것저것 요구만 하였지, 제주가 왜구들에 침탈당하는 것도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못하였다. 제주인들이 육지 사람들을 가리켜 ’육지 것들‘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런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닐까?
겨우 남은 제주성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제주를 거쳐 간 이들이 남긴 글을 비석에 새겨놓았다. 규암 송인수가 김안로의 탄핵으로 제주목사로 좌천되어 왔을 때 쓴 고충(孤忠)이란 시.
외로운 충신이라 목숨도 가벼워 (孤忠輕性命)
짧은 노에 맡겼으니 잠겼다 떴다 하였으리 (短棹任沈浮)
해는 저물고 제주섬은 먼데 (日落芳洲遠)
혼 부른 이 마음 더더욱 아득하구나 (招魂意轉悠)
송인수는 강직한 성격에 불의를 보면 못 참고 강력한 탄핵의 상소를 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다시 조정에 올라간 후에도 사천으로 유배되기도 하고, 끝내는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49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곳에 유배되어 온 우암 송시열이 쓴 해중유감(海中有感)이란 시도 있다.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만리 푸른 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말 한마디가 어찌 큰 죄랴마는
세 번이나 내쫓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북녘 대궐을 향해
머리를 돌려보지만
남쪽 바다에는 계절풍만 부네
귀한 옷을 내리셨던
옛 은혜를 생각하면
외로운 충성심에
눈물만 흐르는구나.
송시열은 83세 때인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이곳에서 이런 시를 썼구나. 83세이면 당시로서는 꽤나 장수한 것인데, 그 나이에 제주까지 유배 왔다 다시 제주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건강은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유배가 풀려 제주를 떠난 것이 아니고 서울로 다시 압송되어 가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정읍에서 마주쳐, 그곳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제주 성지 밑은 제주와 인연을 맺은 5분의 현인을 기리는 오현단(五賢壇)이다. 5현은 시비(詩碑)가 있는 송시열과 송인수 외에 1520년(중종 15)에 유배 온 충암 김정, 1601년(선조 34)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이다. 원래 이곳은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가 되어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이 배향됨으로써 5현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서원은 없어지고 그 대신 1892년(고종 29) 제주 유림 김희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5현단을 세운 것이다. 가만있자... 제주의 명문고등학교인 오현고등학교의 이름이 여기서 나온 것이구나. 그런데 숙종도 웃기는 임금이다. 자기가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 죽여놓고는 송시열이 서원에 배향되도록 하다니... 결과적으로 왕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지.
오현단의 시초가 된 충암 김정은 기묘사화 때인 1520년 금산과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귀양 온다. 조광조를 도와 훈구파의 척결을 외친 김정을 그렇게 그냥 제주에 두기에는 분이 안 풀렸는지 1521. 10. 사약이 내려졌다. 김정의 부인 송씨는 남편이 36살로 죽자 자기도 따라 죽으려했으나 시부모님 때문에 참다가, 결국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8일 동안 음식을 모두 끊고 세상을 떠났단다. 당연히 이런 부인을 위해서 김정의 묘소 앞에는 송씨 부인의 정려문도 있고...
청음 김상헌은 학교 다닐 때 ‘가로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먼저 알게 된 인물이다. 끝까지 청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던가?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싸울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로 우왕좌왕 할 때 김상헌은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으며 통곡했다지. 최명길도 찢는 사람이 있으면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며 울면서 이를 다시 주워서 풀로 붙였다고 하고... 두 사람 다 방법만 달랐을 뿐 나라를 사랑하는 일념만은 같았다고 할 것이다. 나중에 최명길도 청나라로 끌려가 감옥에서 김상헌과 만나 나라를 위하는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화해를 했다고 하지. 그 김상헌이 안무사로 제주에 왔었구나.
동계 정온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제주도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온의 상소에 얽힌 일화 - 입직 승지가 식사를 하려고 수라상을 받은 광해군 앞에서 상소문을 읽는데, 그런 짓을 하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 역대 선왕들을 만나려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광해군은 노기충천하여 수라상을 발로 걷어찼단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던지 입직 승지는 날아온 그릇에 머리가 터지고... 쯧! 쯧! 입직 승지도 고지식한 놈이었군. 밥 먹는데 그런 상소문을 읽어주면 누가 좋다고 하겠노.
이런 대쪽 같은 정온이니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을 때에도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마음대로 죽지 못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5년 동안 백이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다 죽었단다. 그래서 마지막 은거지를 채미헌(採薇軒)이라고 하고, 그 후손들은 정온의 제사상에는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놓는다는군.
그런데 제주 5현은 어떻게 뽑은 것일까? 제주에는 9년이나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도 있고,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낸 이세번,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이익 등도 있는데...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지만 좌천되어 갔던 곳이라 제주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병이 났다며 제멋대로 임지를 떠나고, 김상헌도 안무사로 잠깐 다녀간 것이고, 송시열도 100일 정도 머물다 송환되어 갔으니, 이들보다 더 오래 제주에 머물면서 제자를 기르며 제주에 영향을 미친 이들이 더 제주 5현에 합당할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그러한 영향보다는 척화파로 청나라에 끌려가고, 할복자살을 시도하고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고, 제주에서 올라가다 사약 먹고 죽은 그들의 절개와 삶의 마감 방식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 제주 5현이 되었겠지.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용연(龍淵)으로 간다. 택시에서 내리니 바로 앞은 용연을 건너가는 다리이다. 양옆으로 현무암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가 용이 살았다는 연못. 한천이 한라산 중산간 지대부터 흘러내려와 이곳 바다와 만나는 곳에 연못을 이루었다. 물빛이 짙푸르러 취병담(翠屛潭)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찾아갔던 서귀포의 쇠소깍과 분위기가 같은 곳이다. 제주목 관아와 가까운 곳이니 제주의 양반, 관리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많이 했겠다.
이곳의 밤의 뱃놀이를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고 하여 영주 12경의 하나로 친다고 하지. 설명에는 유배인들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하니, 귀양 온 것이 아니라 휴양 온 것 아냐? 그런데 이곳에도 중국의 풍습이 내려왔다. 다리 앞에 연인들의 사랑의 정표인 자물쇠가 여기 저기 달려있다. 아예 자물쇠 잠그도록 시설을 해놓았다.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용연이 만나는 바다 위로 비행기가 낮게 내려가고 있다. 제주공항이 멀지 않구나.
용연까지 왔으니 근처의 용두암까지 가봐야겠지. 용두암을 향해 걷는데 길가에 지진해일시 행동요령이 적혀있고 대피소가 표시되어 있다. 전에 제주 왔을 때에도 이런 안내판을 본 적이 있는데, 최근 일본이 지진해일(쯔나미)로 된통 당한 것을 보노라니 새삼 이런 안내판에 눈이 한참 간다.
용두암에 왔다. 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제주에 와서 용두암을 바라보며 정말 용머리처럼 생겼네 하며 유심히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즈음 신혼부부들은 해외로 다 나가기에 제주를 찾는 신혼부부들이 대폭 줄었다는군. 제주도 해외는 해외인데...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용머리 밑으로 물속에 잠긴 몸통이 30m 정도 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또는 아득한 옛날 용이 승천하면서 산신령의 옥구를 훔쳐 물고 달아나다가 산신령의 화살에 맞아서 몸뚱이는 물에 잠기고 머리만 나와서 울부짖는 것이라나? 여기서 보니 제주공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한층 더 가까이에서 보인다.
이제 진짜 마지막 목적지인 복신 미륵으로 간다. 용연을 살피던 중 근처에 복신미륵이 있다고 하여 내가 또 언제 이곳 복신미륵을 보러오겠냐는 생각에 발길은 그리로 간 것이다. 가다보니 길가에 원추형 돌무더기의 탑을 세워놓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방사탑(防邪塔)이다. 방사탑이란 마을의 어느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있거나 지형상 기가 허한 곳에 쌓아놓는 돌탑으로 돌탑 위에 올려놓은 돌은 까마귀나 매를 상징하는 것으로 재앙을 쫓는 것이란다. 이 마을은 예부터 강력한 서북풍과 해일이 일던 곳으로 서북향 바닷쪽의 허기를 막기 위하여 마을 북쪽에 좌우로 돌탑을 쌓아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단다. 그래서인지 동네 이름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삼도2동이지만 전통적인 이름은 탑동(塔洞)이다.
그런데 정작 찾고자 하는 복신미륵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물으니 자기는 기독교인이라 그런 거 잘 모르지만 요 근처 절 안에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다고 하신다. “할머니! 복신미륵에 절하고 소원 빌려고 가는 것이 아니예요.”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골목길로 들어가니 용화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고, 안을 기웃거리니 과연 마당 한편에 미륵상이 있다.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인 복신미륵 옆에는 복신미륵의 무릎 정도에나 오는 작고 하얀 색의 동자석이 서 있다. 생긴 것이 좀 거시기 하다 했더니 남근을 상징하는 것이라네. 후후! 그렇다면 이곳에 아들 점지해달라고 빌러오는 아낙네들이 많겠구먼.
후유~ 이제 다 보았나? 골목을 빠져나와 큰 길로 나가 걸어가며 뒤를 힐끔힐끔 하니 빈 택시 한 대가 다가오고 있다. “공항으로 갑시다!” 금방 공항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공항 어딘가에는 아직도 지하에서 신음하는 희생자들이 있겠구나. 제주를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이시여! 당신이 만든 이 아름다운 섬, 제주가 한때는 붉은 섬으로 몰려 피의 바람이 불었나이다. 이제 제주를 만들던 그 손길로 이 아름다운 섬을 어루만져주소서! 그리하여 4.3 평화공원의 위령제단 앞의 글귀처럼 그야말로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넘실대는 화해 · 상생 · 평화의 바람이 이 제주의 땅에 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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