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시대
개화기에 이르러서 우리의 복식은 중국과 서양, 그리고 우리 나라 고유의 복식이 융합된 복식의 변천을 보인다. 남자복식은 의복제도의 개혁에 의한 관복의 변천과 사복의 변천 그리고 양복의 착용에서 복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여자복식의 변천은 한복의 개량과 양자의 착용을 들 수 있다. 개화기를 거쳐 일제시대로 오면서 남자의 복식은 완전히 한복과 양복의 이중구조를 이루었다. 이렇듯 남자에게 있어서 양복이 여자보다 쉽게 일반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활동량이 많았던 만큼 한복에 비해 활동성이 좋은 양복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복은 도시인 중심으로 착용되었고 농촌에서는 대다수가 한복을 입었다. 곧 상의로는 저고리, 적삼, 등걸이, 조끼 등을 입었으며 하의로는 바지, 고이, 잠방이 등을 입었다. 또한 겉옷으로는 두루마기를 입었고, 양복인 오바코우트를 걸치기도 하였다. 이밖에 머리에는 갓대신 모자를 많이 쓰게 되었고 족의는 버선과 양말이 공존했으며, 짚신과 미투리는 고무신과 구두로 바뀌었다. 여자복식은 도시인과 일부 해외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양복이 착용되기는 했으나 남자들 만큼 크게 일반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대신 개화기에 등장한 개량한복 곧 통치마에 긴저고리가 간편하고 활동적이라는 이점이 있어 크게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부녀자들은 여전히 전통 복식인 저고리와 치마에 마고자, 배자, 두루마기 등을 입었다.
한편 1920년대로 오면서 대폭적인 속옷의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짚신이나 미투리 대신 고무신과 혁신화가 착용되었고, 버선도 양말로 대치되었다. 또한 1930년대로 오면서는 개화기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내외용 쓰개가 완전히 없어졌다. 남자는 겉옷을 두루마기가 착용되었는데, 주로 외출을 할 때 바지,저고리 위에 입었다. 계절별 두루마기의 종류라든가 모양은 개화기 때와 같았다. 다만 두루마기감으로 종래의 명주나 모시 외에 양복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때는 흰 동정 대신 비로드나 털을 달아 보온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1940년대를 전후해서는 겉옷으로 우리 고유의 포인 두루마기와 함께, 양복인 오바코우트나 만또를 입는 예가 도시를 중심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치마,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고, 신여성들은 양복인 오바코우트를 입었다. 두루마기는 대개 여름에는 입지 않았고, 봄.가을에는 겹두루마기를 입었으며, 겨울에는 솜두루마기를 입었다. 두루마기감은 전통적인 명주와 비단 외에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수입 방모제품이 쓰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일합방 이후 단발령이 단행되자 관모로 갓 대신 모자를 많이 쓰게 되었다. 특히 파나마모자와 맥고모자가 많이 착용되었는데, 이 모자들은 남미의 에콰도르와 남양의 인도차이나에서 만든 것이었다. 한편 이들 모자 외에 상술에 밝은 일본인들에 의해 중절모자가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유행을 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남자들은 양복에는 물론 한복에도 모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상의로 남자는 겨울에는 무명이나 비단에 솜을 두어 만든 솜저고리를 입었고 봄.가을에는 목면으로 겹저고리를 만들어 입었으며, 여름에는모시나 삼베로 적삼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저고리나 적삼 위에는 개화기에 입기 시작한 조끼나 마고자를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 일을 할 때는 소매가 짧은 적삼이나 등거리를 입었다. 다만 저고리의 경우 깃의 넓이가 약간 좁아졌고, 고름의 넓이와 길이가 조금 중가됨으로써 고름이 좀 커지는 변화를 보였다. 또한 적삼과 개화기에 들어온 조끼를 합쳐 만든듯한 모양 곧, 적삼의 앞길에 주머니를 달아 입는 새로운 풍속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어린이의 옷에서도 찾아볼 수 잇는 바, 저고리의 길을 조끼처럼 만들어 조끼를 따로 입히지 않고도 저고리에 조끼를 입힌듯한 새로운 멋을 창출하였다. 여자는 기본 상의인 저고리는 개화기 이후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여 일제시대로 오면서 거의 허리선까지 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진동, 배래, 수구도 모두 넓어졌으며, 특히 배래는 뚜렷한 곡선을 이루므로써 [붕어배래저고리]라는 새로운 명칭까지 붙게 되었다.
이밖에 겉섶이 안섶에 비해 커졌고, 동정도 약간 넓어졌다. 또한 고름도 5cm 정도로 넓어졌고, 길이도 9cm정도로 길어졌다. 길어진 겉고름과 반비례하여 안고름은 훨씬 작아진 상태였다. 속옷의 경우 남자는 개화기까지만 해도 남자의 속옷은 상의의 경우 속적삼과 등거리였고, 하의의 경우는 속고의와 잠방이였다. 그러나 일제시대로 오면 1934년경부터 메리야스로 만든 내의가 나오면서 이를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메리야스로 된 내의는 종래의 우리 속옷과 달리 몸에 착 달라붙어 쉽게 바람을 막아주었으므로 단시일 내에 농촌에까지 확대되었다. 여자는 적삼 대신 이것을 입었다. 또한 겹겹이 입던 하의 속옷도 다리속곳 대신 팬티를 입고, 이 위에 바지와 단속곳을 입는 정도로 대폭 간소화되었다. 한편 통치마를 입던 신여성들은 바지 대신 부루머를 입고 어개허리가 달린 속치마를 입었던 바, 이것이 오늘날입는 속치마의 시작이다.
남자는 버선에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던 족의 풍속은 1920년대로 오면서 버선 대신 양말이 착용되었고 짚신과 미투리 대신 고무신이나 구두를 신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남자들이 신었던 구두는 서양의 구두를 본따서 만든 혁신화로 직물과 가죽의 재료로 한 것이었다. 여자는 통치마를 입기 시작한 초기에는 버선을 그대로 신다가 1920년을 전후하여 양말이 나오면서 버선과 양말이 혼용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는 양말을 많이 신게 되었는데, 이때 통치마에 신었던 양말은 피부색과 비슷한 누런색인데다 길이가 길어 통치마 밑으로 보이는 종아리를 가릴 수가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긴양말은 193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일제가 물자절약을 강요함에 따라 발목까지 오는 짧은 양말로 바뀌어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전통 한복을 고수하는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버선이 착용되었다.
한편 신발은 1910년을 전후하여 값싸고 질긴 고무신이 만들어져 착용되었다. 고무신의 모양은 전래의 당혜나 운혜를 본따 만들었으므로, 모양이 낯설지 않아서인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순식간에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하의로 남자는 겨울에는 솜을 두어 만든 솜바지를 입었고 봄.가을에는 겹으로 지은 겹바지를 입거나 누벼서 만든 누비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홑으로 지은 홑바지를 입거나 짧은 잠방이를 만들어 입었다. 하의를 짓는 천은 명주,옥양목,삼베,모시 등과 함께 양복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때의 바지 형태는 사폭의 크기와 모양에 약간 변화를 가져왔을 뿐, 기본적으로는 앞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자는 전통적인 긴치마와 개화기 때에 개량된 통치마가 함께 착용되었다. 여기서 긴치마의 경우는 일반 여성들이 많이 입었는데 조선조에 비해 폭이 좀 좁아진 상태였고 길이도 좀 짧아진 상태였다. 또한 통치마는 사회활동을 하는 도시의 신여성들이 많이 입었는데, 어깨허리를 단 발목이 보일 정도의 길이로 만들어졌다. 통치마는 주름의 넓이, 치마의 길이, 치마의 길이를 줄인 층수 등으로 변화를 주어가며 입었던 바, 이때의 주름 넓이는 4-5cm였고, 층수는 두층이었다. 통치마는 192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 방모제품인 세루가 수입되어 이것으로 지어 입는 것이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