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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66
* * *
소란스러운 정적이라는 게 있을까?
말장난 이라면 말장난 이지만 말장난 같은 현실도 있는 법이다.
그를 알아본 삼호외에 일행을 일별하고 잠시동안 멈칫거렸던 장추삼은
곧바로 방교명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이 노인네 이대로 숨넘어갔다간 끝장이야. 노처녀 볼 낯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놈이 앵앵거리는 건 죽어도 못 봐."
단사민을 말하나보다. 그의 눈앞에 어떤 상황이 휙 하니 스쳐 지나갔다.
"그러게 왜 제 말을 무시하셨어요? 저런 삼류 나부랭이가 뭐 할게
있다고!"
실회조의 대기전이다. 조원 모두가 모여 있고 분위기는 침중을 멀리멀리
넘어선 암울, 한구석에 당소소가 외아들 잃고 넋 나간 아낙네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 그녀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지 오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철저히 방임되어 있다. 좌중은 어린 단사민의 말 한마디에 대꾸조차 하지
못한다. 간간히 하운과 북궁단야가 토해내는 한숨과 지청완과 고담의
민망한 얼굴,
그리고... 반대편 구석에 자신이 보이다.
당소소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려는 듯 대각선의 구석에서 거의 찌그러져
있는 자신!
"이제 어떻할 거예요, 어떻할거냐고요? 암말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잘도 말씀하시더니 모두 벙어리라도 됐어요?"
단사민의 말은 마지막엔 거의 절규화 한다. 그렇게 울분을 토하던 그가
느닷없이 고개를 휙 돌려 장추삼을 노려본다. 마음을 일으켜 상대를 상하게
한다는 게 어기상인이라면 노려보는 것 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건
어관상인일 것이고 그런게 예전에 없었다면 지금 단사민이 초연하는
순간이다.
"하필 그 자리에 왜 당신이 있었냐구? 왜? 하공자도 북궁공자도 당누님도
아닌 당신이 왜!"
'죽고만 싶다!'
"하다못해 나라도 거기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거야, 하다못해
나라도 말야!"
'죽고만 싶다!'
"죽을 수 없어!"
발작적으로 장추삼이 외쳤다. 그의 눈에서 광기와도 같은 빛이 일렁이며
방교명을 채근하는 일방 그이 품을 부지런히 뒤지는 손길.
"이봐요, 눈 떠요, 눈! 영감이 이렇게 가면 난 어떻하라구. 안돼, 절대로
안돼. 속명단 같은 거 어디 없나. 당문 노인네라면 그딴 거 하나는 갖고
있을 거야. 어딨지?"
... 청의인들은 그냥 바보처럼 서있었다.
도데체가 눈앞에 녀석의 행동은 그들의 상식선을 깡그리 짓 뭉게는
것이었고, 막말로 미친놈 같은데 뭐 어쩌라는 건가.
한참을 뭐라고 씨부렁거리던 장추삼이 '끙차'하며 방교명을 들쳐 업었다.
"노고수라면서 영약하나 갖고 있는 게 없냐? 하여간 옛 말 중에 믿을 거
없다더니."
"지금 뭐하는 건가?"
그가 한 발을 딛는 순간 삼호의 낮은 음성이 있었다.
"아, 아직도 그러고 있었소? 뭐 볼게 있다고 그러고들 있소? 형장들은
다리도 안 아프오?"
세상 살다보면 별의별 일도 다 일어나는 법이고 별놈도 다 만나겠지만...
이런 놈은 없을 거다. 삼호가 기가 막혀 말문을 못 열자 사호가 나섰다.
"지금 상황이 농담 따먹기나 할 때는 아닐 것 같은데."
장추삼이 발끈했다.
"뭐요? 당신들이 지금 내가 농지꺼리나 할 때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
노인네가 어떻게라도 되는 날이면 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의 눈이 개구리처럼 쭉 뻗어있는 육호에게 옮겨졌다.
"저 양반에겐 미안했다고 대신 좀 전해주시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동료가 널부러져 있는데 신경도 안쓰나, 어쩌구 하며 다시 그가 한걸음
띠는데 음유한 기운이 장추삼의 등 뒤에서 감지되었다.
“헛!”
한 발을 축으로 빙글 돌아 그야말로 한치차이에서 날아온 장력을 피했지만
장추삼은 이들이 그저 분위기만 살벌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배후에서 엄습했다고는 하나 방금 전의 일장은 은밀하고 부드러운
성질이었기에 전신감각이 남다른 그러서도 도달 직전에나 알아챘고,
위력은?
펑!
목표를 잃은 장력은 엄한 바위 하나에게 화풀이를 했는데 꽤나 컸던 바위는
매우 잘게 부서졌다. 장력으로 바위를 부수는 건 웬만큼 장공을 익힌, 즉
일류의 무인이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단 일장만으로 저렇게 잔 조각을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류의 무인일지라도!
“나 바쁘다니까! 내가 당신들 동료에게 몸으로 한번 부딛힌 게 기분 나빠
그러나본데 말이야, 말이야 바른말이지 당신들도 이 노인을 못살게 굴었지
않소. 그러니까 피장파장 비긴걸로 하고 이쯤에서 그만 둡시다.”
“가고 싶다면 우리를 넘고 가게.”
어쩌면 이리도 판에박힌 대사일까. 이들은 스스로 어휘력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상념을 하며 장추삼이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을 찾아 눈을 돌렸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요?”
“문답무용!”
‘내참!’
역시 이들은 어휘력에 문제가 있다고 또 한번 절감했지만 지금 그런 걸
논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등에 업힌 노인의 얼굴을 힐끗 본 장추삼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은 사뭇 처절한 데가 있어서 발밑의 땅이 패일 정도였다.
“좋소, 걸어오는 싸움 피할 나도 아니고, 뭐... 해봅시다. 근데 조건이
있소.”
그의 시선이 삼호에게 가서 딱 멈춰 섰다. 수많은 막싸움을 거쳐 자연스레
터득한 것 중 하나가 상대방의 우두머리를 알아보는 능력이다.
“당신이 이들 중 대가리인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약 하나만 주쇼.
영약이면 좋겠지만 댁들도 그리 풍족한 살림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임시처방 정도로 속명단이면 만족하오.”
“뭐야, 이자식!”
발작하려는 사호를 장추삼은 도리질로 제지했다.
“아, 아. 대가리끼리 얘기하는데 별 볼일 없는 당신까지 나설 건 없소.
보아하니 내가 지면 몸 성히 갈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이 노인네도 약하나
먹는다고 금새 기운이 펄펄 나서 날아다닐 것 같지도 않으니 어차피 똑같지
않소?”
삼호도 자신을 응시하는 장추삼을 마주 보았다. 눈싸움으로 보이겠지만
둘은 그런 게 아니었다.
“비염극 각주의 말 중에서 제대로 된 건 거의 없군.”
삼호가 품속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 장추삼에게 던졌다.
“받게, 교활한 친구!”
“아니, 삼호!”
놀라는 사호를 무시하고 삼호가 말을 이었다. 그의 표정은 아까까지의
돌처럼 굳은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필요 없으리만치의 부산스러운 반응. 상대방의 무시... 이 모든 게
저 노인을 살리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는가?”
장추삼이 업었던 방교명을 바위에 등이 기대지게끔 내려놓고 약을 하나
먹였다.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삼호의 표정... 그건 유쾌함이었다.
“그런거라면 애당초에 주지도 않았겠지.”
기도를 눌러 알약을 먹인 후 일어난 장추삼이 세삼스레 눈앞의 삼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타의 깡패 나부랭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개개인이 모추와 호각을 이룰지도 모를 고수라는 사실을
이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삼호라 불리는 인물은 모추보다 강할지도.
‘이거 장난이 아니구만!’
손바닥을 촉촉이 적셔오는 무엇.
그것은 땀, 그것은 땀이란 유형물을 가장한 긴장.
“이제 합시다.”
모추보다 강하건 뭐건 싸울 때라면 싸워야 하는 게 사나이다. 솔직히 피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합격할 것이네.”
삼호의 친정이 의아스러운 사호와 오호였다. 저자가 대체 뭐 길래
과묵하기만 한 삼호가 여지껏 본적 없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단 말인가?
“오시오!”
몸은 이미 반응을 끝낸 상태였다. 땀나게 달려오며 오른손을 치켜든
청의인을 보는 순간 전능지체로의 이완이 이루어지며 그대로 추뢰보를 밟아
그를 어께로 받았기에.
팟!
사오와 오호가 동시에 움직여 장추삼의 양 옆에 섰다. 삼각형 가운데에
서있는 장추삼은 이것이 모든 진식 중에 기본이 된다는 삼재진의
원형이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스르륵.
장력이 밀려들었다. 아까 바위를 부수던 음유로운 장력이!
방향은 좌측, 한보 앞으로 나서며 피하려는데 또 하나의 장력이 날아왔다.
다시 한보를 내딛는 다면 또 하나의 장력이 날아들 것이다.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장추삼이 거세게 장력을 발로 찼다.
‘장력을 발로 차?’
사호의 놀람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발로 받아낸 장력을 반동삼아 장추삼이
오호에게 쇄도했다.
팟!
오호가 세 걸음 옆으로 비껴 섰다. 아니, 오호뿐 아니라 삼재를 이루는 둘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거리를 이동했다.
단 세보를 움직였음인데 장추삼으론 목표물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점을 노리고 날아드는 추뢰보의 특성상
점 자체의 소멸은 목표의 소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고 장추삼에겐 제대로
된 싸움이라야 이번까지가 단 두 번이라 운용면에서 머리로 느끼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슉!
여타의 기세와는 전혀 다른 빠른 장풍이 오호의 손에서 발출되었다. 공중에
몸을 띄웠기에 여타의 신법은 사용조차 하지 못할 터.
‘다시 한번 발바닥을 믿는 수밖에.’
믿을 수 없게 장추삼의 몸이 허공에서 세찬 회전을 했다.
타당-.
선풍각!
공중에 몸을 띄워 회전하는 기세를 발로 담아 공격하는 상승의 각법.
그러나 애당초에 선풍각을 하려한 것이 아니었기에 임기응변식의 선풍각은
회전이나 위력면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다. 기세조차 둔화된 선풍각이 힘을
잃고 장추삼의 신형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지면에 착지할 무렵 연달아
두 대의 장력이 양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삼재의 원형을 충실히 따르는 전형적인 합격법.
막싸움 이외에 이런 식의, 톱니바퀴와도 같은 다대일의 연환공세를 접해본
적 없었던 그 였기에 지금의 허둥거림은 당연했다.
‘이런 젠장!’
시큰거리는 발바닥을 달랠 사이도 없이 그의 몸이 왼발을 축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모추와의 싸움 때 보였던 회륜각일 진데 이번엔 철저히 수비를
위한 전개였다.
땅!
두개의 장력을 연이어 받아냈건만 소리가 하나라는 건 삼호와 오호가 날린
장력이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장추삼에게 날아왔다는 것 일 테고, 비록
어찌어찌 받아내긴 했어도 그가 받은 타격은 무겁게 몸으로 밀려왔다.
‘큭!’
울혈이 치미는 걸 가까스로 누르는 그에게 어느 순간 또 하나의 장력이
날아와 있었다.
절대절명!
발을 들기엔 너무 늦은 상태, 신형을 빼려 해도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삼류무사-67
... 이것은 특정한 형태의 무공도 아닐뿐더러 어떤 영감같은 것을 얻어야
실현가능한 초식에서 그려지는 무공은 더더욱 아니다.
먼 옛날부터 인간이라면, 인간의 형태를 갖추었을 때 싸움이 일어나면
본능적으로 처들었던 주먹 쥔 손의 움직임, 인간의 전투적 성향을 가장
순수하게 반영한 주먹질이 바탕이 되어 권법 하나를 만들어본다. 명심하거라!
이것은 초식도 영감도 필요없지만 '땀' 이란 노력의 부산물은 반드시
요구된다는 걸. 반복 또 반복을 통해 이것이 너의 손에서 완전히 펼쳐진다면
너의 주먹은 그 어떤 기문병기보다 강력한 위력으로 상대를 위협하리라...
회한의 눈물은 하늘을 가득메운 유생의 비처럼 대지를 적시는구나!
회한루여유성우(悔恨淚如流星雨)!
땅!
찌이익-.
장추삼이 장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싶은 순간 희뿌연 어떤 것이 스쳐갔고
장력을 날린 오호가 도리어 다섯걸음이나 물러나며 피를 토했다.
그리고 아련히 들려오는 파공성...
' ! '
연환공세를 펼쳐야 함에도 삼호와 사호는 눈앞에 펼쳐진 일련의 상황에놀라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그들은 거짓말같은 권법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찰라지간에 무려 열 여덟 번의 주먹이 한점 - 오호가 날린 장력의 가운데
권역 - 을 난타하는 광경을!
주먹질을 빨리하는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권법의 달인들은 일수에 마흔
여덟 번의 변환을 주는 권법을 구사한다고 하고 순식간에 서른 여덟 개의
권력을 날린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날아오는 쾌속한 장력에, 그것도 그 장력의 한
지점에 열 여덟 번이 권력을 꼿아넣어 상대방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물론
도리어 내상까지 입힐정도의 무거움을 준다는게 과연 가능할까?
주먹질을 할 때 흔히 팔꿈치를 뒤로 접었다가 쭉 펴서 함을 싣는게 기본이다.
그래야만 상대방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얻게된다. 견제를 할 때는
다르다. 그때는 상대방과의 최단선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배제하고 손을
뻗는다. 이것은 빠르다는 장점을 얻지만 그 대가로 위력을 반납해야한다.
'저자는 일체의 불필요한 동작을 배제한 상태로 최고의 위력을 끄집어내는
권법을 구사했다. 강호상에 저와같은 권력을 가진이가 몇이나 있을까!'
소리마저 제압하는 초쾌권, 그것도 매우 무거운 권력!
장추삼과 북궁단야가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권법의 연환공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틀거리는 오호를 무시하듯 신형을 반쯤 틀어 장추삼이 삼호와 사호를 마주
대했다. 이때 그는 울혈을 한번 토했기에 기혈이 많이 안정되어 있었고 싸움의
몰입을 통해 정신적으로도 평정심이 되돌아온 상태였다.
"아, 이거 싸울수록 열받네, 진짜!"
장추삼이 시비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하는 표정으로 삼호와 사호가 귀를 쫑긋
세우는 동안 오호는 비틀거리다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받은 타격은
상상외로 큰것이었다. 힘의 특성상 달려오는 하나의 힘과 마주오는 하나의
힘이 접점에서 부딛쳤을 때 그 합이 둘이 아닌 셋 또는 그 이상이 되는걸 알
것이다. 오호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 힘을 맞이했기에 앉아있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내 정말 이런소리 안할려구 했는데 도저히 열받아서 한마디 해야겠소. 척
보니까 당신들은 그렇게 못된 것 같지도 않고 신체 또한 건강해서 뭘하든 간에
밥술 거를일은 없어 보이는데 뭐하러 사람은 상하게 한거요? 대충 짐작해봐도
표물이 욕심나서 한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래 우리도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살귀같은 건 아냐!
우리에겐 위대한 사명이 있어!
너도 우리 입장이 돼봐!
누가 시켜서했어!
말짱 공염불이다. 장추삼이 뭐라하든, 당금 천자가 뭐라하든 그들은 운조의
지시를 따를것이고 운조의 이상을 쫓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이상이니까.
"사람들은 같은 하늘아래 살고있지만 같은 곳을 보는 것은 아니라네."
"같은데를 보건 딴데를 보건 사람의 목숨보다 중한 가치를 보는 건 아니지않소.
당신들이 보는 곳이 얼마나 대단하고 근사한 건지 몰라도 사람 목숨을 파리의
그것보다 가벼이 여긴다면 안봐도 뻔하오. 젠장!"
이상, 교리, 사상... 처음부터 있었던 단어는 아니다. 그 옛날 하루 사냥해서
하루먹고 살던 인간들에게 산다는 것 보다 중요한건 없었다. 시대가 흘러
인간들은 더 이상 먹고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남는 시간을 빈둥거리기 싫었는지 그전까지 않하던 여러 가지 상념의
결정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더 편하고, 기댈수 있고, 쉴
여유를 얻기 위한 가상공간이었고 처음에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처음에는...
조금더 시간이 지나 기술의 발전과 풍요는 비례적으로 시간의 잉여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상념의 결정들의 부피와도 연계되어 인간은 일생의 대부분을
상념의 결정들에 내맡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도권은 더 이상 인간들의 몫이
아니었다. 어느새 인간들은 부수적인 상념들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편해지려고 만든 것에 도리어 구속받는 현실이
말이다.
삼호는 뭐든 말하고 싶었다. 그건 사호도 마찬가지일테고 관념하에 지배
당하는 모든이들 역시 같은 물음에 어떤식으로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변명해야 할까, 누구를 위해?
둘은 이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잠시 터울이 있었군. 쓸데없는 소릴랑 친구들과 하게."
삼호의 음성이 처음처럼 죽어버렸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인 것'일 테지만.
아직도 새벽이 오려면 먼것같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산짐승들의 울부짖음은
여명을 거부하는 그들이 인간에게 빼앗기고 쫓겨 한없이 축소된 그들만의
영토에 대한 항변과도 같았다.
"후-, 관둡시다. 뭐라고 한 대서 곧바로 알아먹을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일도
벌이지 않았겠지. 그쪽은 준비가 됐소? 충분히 쉰것같은데."
뒤통수에 눈달린 사람마냥 오호를 돌아보지 않고 장추삼이 물었다.
'저놈 참...'
다시한번 쓴 웃음이 나오는 삼호였지만 그는 곧 신색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그의 인생항로는 수정 불가능한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왕이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한 순간의 호감으로 대사를 그르칠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틀비틀 오호가 일어나자 장추삼이 품속에서 홍예갑을 꺼내 끼었다.
"아까까진 놀라서 제실력이 아니었소 어쩌구, 하면 변명같으니까 다르게
얘기하겠소. 이번엔 아까와는 좀 다를거요."
'요' 자가 끝나기전에 희끗해진 그의 신형이 삼호의 전면에 불쑥 튀어나왔다.
천하의 추뢰보가 제대로 펼쳐진 것이다.
'헉!'
삼호가 재빨리 옆으로 삼보를 물러났으나 장추삼이 내지른 세 번의 발길질중
하나는 손으로 감내해야 했다.
팡!
'크윽!'
오른손으로 받아냈는데 손목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그 순간 사호가 앞으로
나서며 장추삼의 배후를 노렸다.
스르릉.
여전히 온유하면서도 위력적인 장풍, 이번 것은 양손을 사용한 두 대였다.
"차앗!"
삼호와 격돌한 오른발은 지면에 착지되지 않은 상태, 그 순간 지면에 놓여있던
왼발에 힘을 실어 허공에서 반바퀴를 돈 장추삼이 오른발을 세차게 세 번
질러댔다.
파바방.
두 대의 장풍은 두 번의 발길질로 받아내고 세 번째의 발길질이 사호를 노렸으나
먼저의 타격으로 위력이 반감된 상태, 역시 세걸음 비켜서며 사호가 피해내자
장추삼도 지면에 내려섰다.
그순간 빠른 장력 하나가 다가섰다.
'이럴줄 알았어.'
추뢰보는 더할 나위 없이 빠른 보법이다. 거기다 미리 마음먹은 상태에서, 즉
한점을 가정해 놓은 상태에서 펼진다면?
팟!
오호는 가슴에 무언가 와닿고 자신이 지면에 쳐박힐 때 까지도 어떻게 됐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추뢰보만 보았었고 산무영은 몰랐으니까.
그의 장력을 산무영으로 흘리며 동시에 또 하나의 신형은 추뢰보를 밟아
오호의 전면에 다가서서 발길질 한번으로 그를 제압한 것인데 인간의 신체가
둘로 갈라질리는 없으니 산무영 뒤의 추뢰보라는 연환보법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털썩.
비명조차 없이 오호가 혼절했다. 유성우에 의한 내상이 완전히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번 더 가해진 강력한 일격이었기에 오호로는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였다.
삼호와 사호가 놀랄 사이도 없이 축이 되었던 왼발을 반동삼아 허공으로 몸을
띄워 장추삼이 그들에게 다가섰다.
"차아압!"
쓰러진 두 동료에의 울분일까? 사호가 좀체로 지르지 않던 기합성과 함께
나섰다.
삼재진은 아까의 유성우에 의해 깨진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동일한 힘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대에게 위협을 줄 정도의 위력으로 번갈아가며 상대를
몰아치는게 기본일진데 유성우에 의해 타격을 받은 오호는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다고 하나 장추삼에게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사호!"
삼호의 음성이 다급하게 그의 뒷덜미를 챘으나 이미 사호는 장추삼과 어우려져
있었다. 그의 양손은 장력의 기운을 담아 파르라니 빛을 바라며 장추삼을
몰아부치고 있었는데 연방 밀리는 장추삼의 눈은 점점 더 냉정을 찾아갔다.
'이런, 사호는 저자를 이기지 못해!'
삼호가 재빨리 장추삼의 배후를 점하려 신형을 이동시켰다. 배후를 점한다면
승률의 오 할은 거져먹는 효과가 있다. 아무리 감각이 뛰어난 자 라 할지라도
보인다는 것과 안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줄테니까.
'어?'
삼호가 장추삼의 뒤에 섰다고 생각할 때 그의 두발은 미묘하게 교차하며
장추삼은 사호와 나란히 선 형국이 되었다.
'이녀석은 마치...'
삼호의 눈이 똥그래졌다.
'뱀 같다!'
삼호가 다시 장추삼에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는 또한번 다리를 교차시켜
사호의 배후로 빙글 돌아섰다. 마치 사호를 가운데 두고 탑돌이 아는 것 같은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당사자인 사호가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일련의 보보는
찰나지간에 이루어졌다.
"이익!"
놀림감이 된것같아 사호가 몸을 홱 틀어 장추삼을 볼려고 한 순간 그는 찢어진
눈의 밉살스런 얼굴 대신 별을 보아야 했다.
퍼버버벅!
정확히 열 여덟 방. 유성우에 의해 난타당한 사호가 고목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삼류무사-68
쓰러진 동료를 물끄러미 보던 삼호가 불쑥 물었다.
"자넨 정말로 무서운 인물이군. 이싸움 자체가 자네가 의도한데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맞나?"
한차례 박투를 벌인 후에 전신이 뻐근해지면 장추삼은 목을 소리나게
꺽는다.
우두둑.
"의돈지 뭔지는 몰라도 당신과 얘기를 좀 하고 싶었던건 사실이오. 근데
옆에 이 자들이 있으면 당신이 불편해 할 것 같긴 했소."
"불편해 할 것 같았다... 라."
삼호가 툴툴 웃었다.
"뭐가 불편하다는거지? 자네는 설마 내가 알고있는 모든 일들을 우리
동료들이 없다고 미주알 고주알 자네에게 고해바칠거라 기대했나? 내가
그런 존재로 보였나?"
"그런 사람으로 안 보였기에 얘기하고 싶었던거요. 내가 뭐 바본줄 아쇼?"
삼호의 눈에 아까와는 또다른 빛깔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럼 뭔가, 내가 입싼 멍청이로 보이지 안다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건가?"
그건 호기심이었다.
"나는 말이오, 요즘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오년만에 고향이랍시고 돌아와 봤더니 거리는 사령전대인가 뭐시긴가
하는 깡패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 죽마고우란 놈은 이제 봤더니 무림인
이었지. 그 왜 있잖소. 배금성이 말이오, 배금성. 당신들도 잘 알고있을테니
그건 그렇고... 취직한 곳은 무슨 전쟁대행업수준의 인물들이지... 하여간
정상적인 건 친구 둘과 우리 부친밖에 없는거요. 이게 말이되오?"
"......"
아직도 새벽은 오지 않을 성 싶다. 그나마 산짐승들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
에서 시간이 약간이나마 흘렀다고 짐작할 뿐, 주위의 경물은 서 있는 사람
수의 변화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칠흙 같은 어둠 마저도...
“기가 막히더군. 오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긴건지 알수는 없지만 어떻게 이
럴가 싶은 것이... 문득 내가 양양이 아닌 딴세계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
각이 종종 드오."
“......”
삼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넋두리 성에 가까운 장추삼의 말을 제지하려고
도, 그렇다고 호응의 어떠한 반응도 삼간체 허수아비처럼 서있었다.
“나도 영 바보는 아니요. 자랑은 아니지만 소싯적에 ‘장눈치’하면 ‘삼
천리’라고도 불리웠던 나 였거늘 지금 양양에서 무슨일이 꼼지락 거린다는
걸 모르겠소? 근데 그게 문제요. 뭐가 있기는 있는데 그게 뭔지... 파천이
선가 뭔가 중에 비천혈서 때문이거 같기도 하고...”
“지금 뭐라고 했나? 비천혈서?”
삼호가 거의 튕기듯 반응했다. 여지껏 지켰던 침묵은 다 거짓이었다는 듯.
“아, 왜들 그말만 나오면 난리야? 짜증나 죽겠네. 난 몰라요. 나는 그책
생긴것도 모른다고! 그냥 남들이 떠드니까 얘기한 거지.”
툴툴거리던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댁들도 그것이 목적이었군, 그랬어... 그럼 뭐야? 양양에 비천혈서
가 있다는 거야? 뭐, 존재자체도 불분명 하다면서 그렇게 신비한 책이 벌써
소재지가 알려진거야? 아니, 좋아. 그럴수도 있겠지. 열나게 찾다보니까 우
연히 실마리를 잡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양양이었다? 좋아, 그럴수도 있겠지
.”
삼호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장추삼의 말은 단 한점이라도 놓치지 않겠
다는 듯 똑바로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당사자인 장추삼은 광기어린
삼호의 눈을 비교적 여유있게 받아 내었다.
“근데 왜 하필 청빈로야? 양양이 좀 넓어?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
청빈로냐구. 오년전만 해도 청빈로에서 무공 좀 익혔다고 하는 사람들은 죄
다 표국 아니면 도장에있는 사람이었다구. 아... 한 무리빼고. 어쨌든 예전
청빈로는 특별히 대단한 것 없는 그저 그런곳 이었지만 지금처럼 이상하지
는 않았단 말이오.”
삼호가 눈의 경직을 풀었다. 장추삼에게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다고 판단
했으리라. 그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는 눈치로 넘겨짚은 것 빼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으니까.
“내게 뭘 말하고 싶은건가, 자네의 분풀이를 들어줄 사람은 나 말고도 많
은 듯 싶은데...”
“내 말은!”
갑자기 장추삼이 소리를 높였다.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당신들이 노린게 뭐냐하는 거요. 이것 역시 비천
혈서랑 관련이 있는거요? 그렇담 비천혈서란 거 아주 마물일세. 엄한 사람
불귀의 객 만들어, 또 엄한 사람 살인자 만들어.”
‘이 친구는 정말 교활하군.’
삼호는 치미는 헛웃음을 겨우 눌러 참았다. 여태까진 암 말도 안했지만 이자
와 계속 얘기 했다간 정말로 미주알 고주알 고해 바칠 것 같아 그는 안색을
굳혔다.
“미안하군. 내 입장에서 자네에게 답해줄 말은 없다네. 그리고... 알아봤
자 좋을 것도 없을 것이네.”
우두둑.
삼호가 주먹을 거머 쥐었다. 이제 그만 하고 싸우자는 의미. 아쉽지만 장추
삼은 상대가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고, 절대로 입을 열지도 않을 것 이
란걸 알았다.
‘장력이 주 무공 아니었나?’
장풍을 쓰는이가 주먹을 말아 쥘 리는 없다. 그러나 삼호는 양주먹을 말아쥐
며 공력을 운기했다.
쿠오오-.
‘역시, 이 사람은 매우 강하구나!’
기세로도 알 수 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닥에서 쉬고있는 셋
을 합친것보다도 강하고 강호 십장중 하나라는 모추보다도 강할 것이다. 그
만큼 삼호가 흘리는 기운은 패도적이면서 웅혼했다. 마치...
스윽!
장추삼의 상념을 깨려는 듯 어떤 기세가 날아왔다.
팟!
산무영으로 기세를 피한 장추삼이 경악의 시선으로 삼호를 바라보았다. 이
런 권력은 처음이다, 이정도의 권력은!
‘모추랑 비교 자체도 안돼!’
또 한대의 권력이 날아왔다. 특이한 것은 권법을 사용하면서 삼호는 별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거다. 다시말해 권풍을 사용한다는 건데 강호상에 상
대와 십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이만큼의 힘과 기세로 공세를 가할 권법은
많지 않다. 다시한번 산무영, 기다렸다는 듯 또 한번의 권력이 날아왔는데
이번 것은 조금 더 속도가 빨랐다.
‘헛!’
파박!
전력을 다해 산무영을 전개해보긴 처음이다. 애초부터 두명의 장추삼이 있
었던 것처럼 삼호의 눈앞에 잠추삼의 잔영이 스쳐갔다.
“대단하다!”
삼호도 크게 호기가 발동했는지 기운차게 소리를 지르며 허공에 연거푸 두
번의 주먹질을 가했다.
퍼버버벙!
폭죽처럼 비산되는 권력의 기운! 주위에 있던 풀뿌리까지 뽑혀 올라가 보기
에는 화려하나 당하는 사람한테는 지옥이었다.
‘살살해, 이 아저씨야!’
생각은 생각에 맡겨두고 그의 발은 부지런히 산무영을 밟아 어찌어찌 네 개
의 권력을 흘렸으나 스쳐 지나간 기세만으로도 속이 다 뒤집힐 지경이었다.
“잠깐!”
급히 장추삼이 손을 들었다. 궁금한건 못참는 그였으니 싸움중이던 뭐든간
에 알건 알아야겠다. 말아쥔 주먹을 쳐든 상태로 삼호가 딱 멈췄다.
“아깐 왜 그거 사용하지 않은거요? 무림인들에게 뭐 삼푼의 능력은 숨기라
는 말이 있던데 그런거요? 그런거라면 너무하잖소. 동료들이 저렇게 픽픽
나자빠질 때 까지 당신의 능력을 숨겨야만 했소?”
삼호가 새삼스레 쓰러져있는 세명의 뢰성인을 바라보았다. 장추삼의 말은
타당할지도 모른다. 만약 처음부터 이 권법을 사용했다면 어떤 의미 로든
허둥거리던 장추삼을 손쉽게 잘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그의 동료들은 -
물론 기습을 당한 육호는 제외한 - 저 처럼 보기싫은 몰골으로 쓰러져 있지
않아도 됐을지도 몰랐다.
“후우.”
삼호의 입에서 듣기에도 민망한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나 한 두개 쯤은 사연이 있는 법이라네. 어쨌든 자네같은 사람이
있다는걸 오늘 처음 알았어.”
휘르릉.
다시 삼호의 기세가 타올랐다. 이번엔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라도 담은 듯
그가 일으킨 기운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장난끼어린 장추삼의 표정도 삽시
간에 굳었다.
‘에라!’
삼호가 미처 손을 뻗기 전에 장추삼이 먼저 치고 나갔다. 단거리 이동에는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추뢰보에 의한 돌격 이었으니 그 쾌속함은 두말하면
불문가지, 생각보다도 행동이 먼저 였던 것처럼 그의 신형은 매서운 기세
를 타고 쏜살같이 뻗어나갔다. 그리고...
팡!
“크윽!”
가슴을 부여쥐며 장추삼이 튕겨나왔다. 동굴에서 나온 이래 정타를 맞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 당황할 사이도 없이 두개의 권력이 또다시 날아왔다.
“타앗!”
가슴이 박살나는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그의 발은 절묘하게 움직여 최적의
산무영으로 두 대의 권력을 피해냈지만 위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
호의 미간이 내천자를 그리며 불끈 쥔 양손을 거퍼 세 번이나 휘두르자 여
섯 개의 권력이 공간을 가득메웠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장추삼도 여섯명의
그를 만들어 여섯 개의 권력을 비틀어보려 시도했으나 권력의 파고는 너무
웅장했다.
팡!
다시 한 번 그의 배에 일권이 꽂히고 주춤 뒤로 물러서는 장추삼에게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한 두 개의 권력이 스쳐 지나갔다.
핏핏.
단지 옆으로 지나간 것 뿐인데도 양 어께가 불로 지진 듯 뜨거웠다.
“이제 끝내야겠네.”
삼호의 웅휘로운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나며 비틀거리는 장추삼을 향해 네
번의 주먹질을 했다. 삼호의 능력으로는 이것이 한계였지만 양손으로 만들어낸
여덟 개의 권력만으로도 경동천하의 위력을 주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으드득!’
마치 다 이겨논 싸움처럼 말하지 않는가, 장추삼은 이런 경우를 제일 싫어
한다. 이빨만 간다고 해서 어떤 묘수가 떠오르는건 아니지만 저절로 움직이
는 턱이야 무슨죄가 있을까.
‘해보자!’
파바박.
그의 신형이 여덟 개로 불어났다, 산무영일까? 그러기엔 너무 빨랐다. 추뢰
보일까? 그럼 그 숫자는?
... 우뢰를 쫒다쫒다 끝내 흩어지고 마는 안개의 그림자!
슬픈 엣사랑에 보내는 마지막 송시(送詩)런가.
추뢰무영(追雷霧影)!
모추와의 결전당시 비교해보면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한 그의 움직임에
권력을 날린 삼호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이제 끝내야 겠소.”
여덟 개의 권력을 처리하느라 퉁퉁 부어오른 손바닥이지만 주먹 한번은 말
아쥘 오기는 있다. 삼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여덟의 그가 하나로
합쳐저 삼호의 면전에서 유성우를 전개했다.
파방!
삼호가 미처 주먹을 들 새도 없이 열여덟개의 주먹에 몸을 내맡기며 미끄러
지듯 지면으로 쓰러졌다.
삼류무사-69
그리고 장추삼도 주저앉았다.
“에고, 에고... 헥헥. 이거 못할짓이다. 어떻게 된게 이거 한 번 하면 온몸
에 힘이 쏘옥 빠진다냐.”
추뢰무영, 장추삼이 이름붙인 - 사실 짜깁기지만 - 장추삼 만의 전투보법.
기존의 산무영과 추뢰보가 수비와 공격에 제각기 치우쳐 있다면 추뢰무영은
수비와 함께 공격을 겸비하는 그야말로 천고의 전투보법 이리라. 모추와의
대전시에 어설프게 한 번 사용하고 정혜란과 공터에서 한 번 더 가다듬은 후
재미를 느껴 그야말로 없는 머리까지 써가며 연구하고, 실습에 실습을 거듭하
여 그런데로 형태를 갗추는데는 성공했으나 문제가 생겼으니 산무영 하나만
해도 변환의 극치를 몸으로 보이는 보법이기에 어느 정도의 힘이 소모된다.
추뢰보역시 폭발적인 돌진력으로 상대를 파고드는 보법... 이둘을 완벽하게
혼합하여 펼친다는 건 기(氣)와 신(身) 모두에게 엄청난 피로감을 주게된다.
피로감은 곧바로 몸으로 전달되고 완전치 않은 몸은 순간적으로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만약 그 순간 여타의 공격을 받는다면...
꿈틀.
쓰러져있던 삼호의 어께가 움직였다. 놀랄법도 한데 장추삼의 표정은 지극
히 태연했다.
“일어나시오. 별로 쎄게 맞지도 않았으면서 뭔 엄살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약올리는 말투.
“끄응!”
용을 쓰며 겨우겨우 삼호가 상체를 곧추세웠다. 추뢰무영으로 가진 힘의 대
부분을 소진한 장추삼에게 유성우는 어쩌면 무리 였을지도 몰랐으나 어쨌든
그가 아는 최고의 주먹질이 그것이니 평소의 위력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더라
도 사용할 수 밖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앉은 삼호를 멀거니 쳐다보던 장추삼이 한 마디 툭 던
졌다.
“이제 어쩔거요?”
삼호도 멀거니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뭘 말인가?”
눈을 돌려 장추삼이 하늘을 쫓았다. 빌어먹을 여명은 아직도 트려면 멀었나
보다.
“내가 저 노인 구하자고 여기온 게 아니란 건 잘 알지않소. 애써 모른척 하기
는.”
“그래 그랬지.”
삼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추삼 이라고 했지?”
느닷없는 질문. 삼호의 갑작스런 물음에 장추삼이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호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비염극 각주는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서.
“내가 자네에게 해 줄 말은 별로 없네.”
그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제 동료들에게 갔다.
“자네가 말한데로 우리는 살귀같은 건 아니야. 살인하는 걸 좋아한다면 그건
미치광이지. 무슨말인지 알겠나?”
장추삼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삼호가 말을 이었다. 그는 육호를 한번 살
펴보고 오호에게, 그리고 사호를 살펴보았다.
“내가 속한곳도 그런 미치광이 집단은 아니란 말일세. 그래서 자네에게 해
줄 말이 별로 없어. 배신자는 되기 싫거든.”
마지막으로 사호에게서 몸을 띤 삼호가 비틀비틀 장추삼에게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까보다 더 위태로웠다.
“이봐, 당신!”
장추삼이 벌떡 일어나 삼호에게 달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삼호가 풀썩 쓰러
졌다.
장추삼의 품으로...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동료들의 사혈을 짚은후... 스스로의 심맥을 끊은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약속했던거야... 쿨럭... 실패할 경우... 이렇게
하기로...”
“그런 바보같은!”
“후후... 그런눈으로... 쿨럭, 보지 말게... 내가... 너무... 초라해지잖나
.”
삼호의 두 눈망울에 장추삼이 담아졌다. 한 시진 간의 만남 이었지만 웬지 모
르게 정이갔던 녀석.
“한마디... 한마디만... 명심하게...”
“관두시오!”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삼호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이
것이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도 되는 양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산, 물, 돌... 쿨럭쿨럭, 구름 문양의 ... 쿨럭, 옷을 입은 ... 쿨럭...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피. 하.....”
“이보시오, 정신차려요!”
아무리 흔들어봐도 이승을 떠난이가 대답할 리 없는 법. 서늘한 새벽바람이
그의 두 볼을 어루만졌다.
“이,이게 뭐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빌어먹을 여명은 이제서야 움트나보다.
* * *
청뢰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을 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여중제일인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래봐야 여자지, 하고 생각했던 당소소였는데.
“차아압!”
그녀는 여태껏 한 알의 암기도 사용하지 않고 세명의 뇌성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수절' 은 암기만을 의미하는게 아니었다고 항변하듯 그녀의 장법은 현란한 변
화를 보여주며 일 대 삼의 수 불리를 자연스레 넘기는 형편이었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장발의 미청년 북궁단야, 그래봐
야 강호상에서 행세께나 한다는 후기지수 수준 이겠거니 했는데.
부우웅.
말한마디 없이 번뜩이는 그의 거검 앞에 역시 세명의 청뢰인이 쩔쩔메고 있
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청뢰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건 눈앞의 하운이다.
선한 얼굴에 언제나 예의바른 천상 군자형의 미청년은 별반 위력적인 초식
을 펼치지 않고 있음에도 청뢰 자신과 두명의 뇌성인의 공세를 별 무리 없이
받아내고 때로 날카로운 역습으로 그들을 곤궁속에 몰아넣었다.
그의 검세는 한없이 부드러운 가운데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일라치면 약오른
독사마냥 매섭게 다가오는 무엇이 있어서 청뢰들은 도무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삼호는 도데체 뭐하는 거야? 그깟 노인네 하나 잡지못해서 여직까지 헤매
는건 아닐텐데.’
십이뢰성인은 청뢰가 맡고 있다. 그렇다고 청뢰가 이들보다 강한 건 아니다
. 특히 삼호는 ‘그 권법’까지 익히고 있으니 도저히 청뢰가 감당해낼 무
위가 아니었다.
‘다른 녀석을 보내는거였는데.’
너무 신중했던 탓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장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
는 삼호를 보냈거늘, 손쉽게 처리하고 금새 대열에 합류하리라 믿었거늘.
그런 고민을 하기엔 현실이 너무도 야속하다. 누가 보아도 잔잔한 호수같은
하운의 눈빛이 미친듯이 밀려오는 해일보다 무섭고 그의 특징없는 검로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생각들 만큼 빈틈없이 청뢰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어느순간 당소소와 북궁단야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차앗!”
낭랑한 교갈과 함께 당소소의 보법이 눈으로 쫓기 어려울만큼 빨라지며 북
궁단야의 배후로 물러섰다.
‘ ! ’
느닷없이 목표물을 잃은 세명의 청의인들이 당황해서 주춤하는 사이 북궁단
야도 크게 검기를 일으켜 그와 엉켜있던 세명을 밀쳐내며 당소소의 앞을 떡
하니 막아섰다.
일순간의 정적.
장추삼이 보았다면 ‘얼음덩이가 당소저 몸빵하네!’ 하고 킬킬댔겠지만 말
옮기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한평생 우려먹을 만한 광경을 놓치는 순간이었다.
양손을 요염하게 허리께로 가져가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망울과 함께 더할나
위없는 아름다움과 오연함을 뿌리는 당소소. 그 앞을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신장(神將)인양 군더더기 없는 몸과 거대한 칼로 막아섰으나, 드러난 한쪽
얼굴만으로도 무림의 여걸들을 주화입마로 밀어 넣을 치명적인 마력의
북궁단야가 막아선 광경은 일세에 한번 보기 어려운 미의 극치를 연출 했다.
오죽하면 여섯명의 청의인들까지도 이 아름다운 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떠한 행동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휘르르릉!
갑자기 북궁단야가 패도적인 기세를 온몸에 불러모았다. 그의 장포는 팽팽
하게 부풀어 오르고 긴머리가 허공으로 비산되어 마치 성난사자가 갈기를
세운것처럼 강인한 기세를 보였건만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그야말로 조각이
었다.
이때를 노렸는가, 그의 뒤에서 매섭게 전방을 쏘아보던 당소소가 날렵하게
허공으로 몸을 띄었다.
“가랏!”
공중을 빙판이라도 삼은 듯 그녀의 신형이 쾌속한 회전을 하며 어느순간 암
기의 비가 흩뿌려졌다. 동시에 열 여섯 개의 암기의 비가...
겹팔황점수!
당문의 암기술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초식은 물론 만천화우다. 그런데 사
람들은 만천화우가 무슨 투로가 정해진 무공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
천화우는 초식도, 사용되는 암기의 개수도 정해진 것이 없는 무공이란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당문에서 만천화우가 자취를 감춘지 무려 이백
년이 지났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굳이 말로 한다면 ‘던지는 무공의 심득’이라고 할까?
그리고 당문에 위력적인 무공가운데 팔황점수라는 암기술을 빼서는 안된다.
일수에 여덟 개의 방위를 완전히 제압하는 암기술... 말이좋아 일수에 '팔
방점유' 지 그게 어디 생각처럼 되겠는가. 팔황점수에 나가떨어진 무림고수의
수가 그 위력을 입증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당소소는 일수에 팔방을 두
번 점할 생각을 했다. 그녀의 무공은 실로 놀라운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는
것이라 변의 경지에서 환을 지나 어느새 공의 경지에 다가서는 형편이었다.
타는듯한 홍의의 그녀가 허공에 비상하여 열 여섯 개의 암기를 날리는 광경
은 핏빛 봉황새가 제흥에 겨워 춤을 추다 몇 개의 깃털을 빠트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히익!”
아, 당하는 이들에겐 별로 보기좋은 광경이 아니었나 보다.
삽시간에 날아온 암기의 홍수는 여섯명의 청의인들을 거의 공황상태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다. 워낙에 위력적이면서도 절묘한 방위를 노린 공세라 이들은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몸을 피해야만 했다.
쭈아아악.
이 무슨 소린가? 대기를 산산히 찢어 발기는 파공성과 함께 어떤 거대한 기
세가 허둥거리는 여섯을 시의적절하게 덮쳐왔다.
‘맙소사...’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라고 생각하는게 고작이었다. 모든 것을 부술듯한 막
강한 일검에 청의인들은 가랑잎처럼 나가떨어졌다.
“쿠에엑!”
“커흑!”
워낙 패도적이었기에 장내는 검기의 부산물로 발생한 부유뮬 - 뿌리뽑힌 잡초
, 날아다니는 작은 돌멩이 - 들과 청의인들의 신음성으로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이럴수가!’
청뢰는 혼이 다 달아날것만 같았다. 저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녀는 단 한 번
의 연수합격만으로 여섯명의 뢰성인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저들의 심기였다. 아무리 그녀의 암기술이 빼어나다고해도, 아무리 그의
패검이 위력적이라고 해도 결코 이렇게 무너질 뇌성인들이 아니였다. 그런
데 이들은 철저히 계산된 합격으로 개개인이 능히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 여
섯을 날려버린 것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의 결합이 백 또는 그 이상이 되는
순간이라고나할까.
"역시 저들의 합격은 보기좋군."
이건 또 뭔가, 하운이라는 작자는 자신을 포함한 셋을 상대하면서도 볼 건
다보고 있었다는건가, 게다가 전투중에 여유롭게 혼잣말까지?
‘도데체 비각주와 숙주(宿主)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인거야?’
하운의 눈이 차디찬 겨울바람처럼 스산해졌다.
“나도 밥벌이는 해야겠지?”
갑자기 변해버린 검초. 온유한 가운데 날카로움을 보이던 그의 검세가 날카
로움 만으로 일변했다.
‘이런, 이럴수가.’
세명의 손은 자연히 어지러워졌다. 그들의 앞에는 사람이 변한 듯 매섭게
몰아치는 하운의 검이 있었고 등 뒤로는 암기의 여제와 전신이 버티고 서서
말없이 냉기를 흘리고 있으니 정신집중이 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팟!
어느순간 한면의 청의인이 하운의 검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듯 주저앉았
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중수법이나 혈도를 짚힌 것 중
하나일텐데 그의 눈에 어린 경악으로 볼때 이 경우는 후자다. 중수법에 당
한이가 놀라있을 겨를이 어디있겠는가.
‘검극으로 혈도를 짚다니!’
놀랄 사이도 잠시, 또 한명의 청의인도 같은 신세로 주저 앉아 장내에 남은
건 청뢰 하나였다.
[11134] [연재] 삼류무사-70 첨부파일 :
"이제 얘기할 때가 된 거 같군.”
위압감 어린, 그러나 맑고 차가운 음성. 북궁단야가 거검을 어께에 걸치고
천천히 걸어왔다.
“방장로님은 어떻게 했죠?”
당소소가 뾰족하게 물었다. 평소의 나른하면서도 그윽한 음성에서 이만큼
감정을 담아냈다는 건 그녀의 심정이 얼마나 급한것인가를 나타낸다고 하겠
다.
청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내렸다. 완패였다. 그로서는 이들
중 하나와 자웅을 결하기도 어려울텐데 상대는 전혀 이상없는 세명이다.
어쩌면, 이자만 없었더라도 마지막 공세를 취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청뢰는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난 절대로 이자의 상대가 안돼.’
다시한번 당소소가 말했다.
“해를 입으신건가요?”
스산한 살기, 어느정도 포기한 당소소였다. 이들의 수는 열셋이라고 했다.
그들이 상대한 인원은 아홉, 네명의 행방은 묻지않아도 뻔하고 이들의 무위
와 그녀가 아는 방교명을 비교해 본다면 몇 합 버텨보기도 어려운 얘기다.
청뢰가 고개를 돌려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오, 허나 당신이 찾는 사람이 객잔주인 영감이라면 무사하지 못
할거요. 그를 쫓은 이 가 우리중 가장 강한 인물 이었으니까.”
당소소가 절망감에 지그시 눈을 감는 동안 쓰러져있는 청의인들은 경악했다.
누가있어 십이뢰성인 중 청뢰보다 강한 무위를 가졌다는 건가?
“그럼...”
그녀는 차마 뒷발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그 단어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청뢰의 눈도 쓰러져 신음하는 청의인들을 우울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아마... 그럴거요.“
그녀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렇지만 감정에 치우쳐 있을때가 아니다. 그
녀는 실회조원의 자격으로 여기에 왔고, 조장이란 책임까지 떠안고 있다.
“표물은 어디있죠?”
청뢰가 턱짓으로 풀숲을 가리키자 북궁단야가 표물을 가져와서 확인을 했다
.
“이상없소이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녀가 눈을 내리깔아 그녀의 발등을 쳐다
보았다. 언제나 그녀에겐 이말이 어려웠었다. 그리고 실회로에서 거의 그녀
가 이말을 했다.
“표물 탈취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목숨값은... 받아내야 하는데... 순
순히 포승줄을 받겠어요, 아님...”
이 경우 대부분이 발악을 하며 달려든다. 아니 백이면 백 모두가 그랬다.
끌려가 봐야 욕이란 욕은 다먹고 결국 죽을게 뻔한데 어떤 바보가 포승줄을
받겠는가. 그녀의 시선이 청뢰에게 옮겨지고 곧 기묘하게 바뀌었다.
‘이자... 웃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청뢰의 입에서 한줄기 핏물이 베어 나오
며 자리에 털썩 나뒹굴었다.
“이봐!”
세명이 동시에 청뢰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으로... 쿨럭... 목숨값이... 되었소?”
흠칫!
재발리 그녀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인들은 모
조리 심맥을 끊은 듯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도가 짚인 두 명 까
지도.
‘실수다. 고수급의 인물들이라면 한줌의 진기만으로도 스스로의 심맥을 끊
는다는 걸 잊다니!’
그녀가 스스로를 자책할 때 청뢰가 말을 이었다.
“... 중원의 평화는... 너무... 길었지.”
하운의 눈에서 신광이 어렸다.
“... 가장된 평... 화...”
그말을 끝으로 그는 숨을 놓았다.
‘가장된 평화...’
셋의 마음에 서늘한 무언가가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가장된 평화...
절정은 아니지만 일류를 훨씬 상회하는 아홉명이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건 그들에게 배후가 있다는 거다. 그냥 ‘배후’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집단. 무림사 천년 간 세상을 좀 어떻게 해 보려고 꿍
심을 품었던 집단이 어디 한 둘일까. 별처럼 많은 수의 비밀집단은 그 몰락
또한 유성과도 같이 덧없었다.
그렇게 치부하면 되는데,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으려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걸까?’
하운이 청뢰에게서 몸을 떼어 벌떡 일어섰다. 마냥 이러고 있어봐야 나오느
니 한숨이요, 드느니 근심이다.
“당소저, 상황은 종료된 듯 하오만.”
“아니죠, 쥐새끼 네 마리가 남아있어요.”
방교명을 쫓아갔다는 네명을 말함이리라. 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번 회수행은 최악이다.’
이때 모두에게 잊혀졌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네 마리 안와!”
평소의 그라고 생각되지 않는 다소 우울한 음성.
“아, 장공자!”
무심했다.
아무리 신경쓸 일이 많았다고는 하나 동료의 부재조차 잊었다는 건.
브스럭 부스럭.
풀과 나무를 헤치며 누군가를 들처업은 장추삼이 모습을 보였다.
“장공... 어머, 장로님!”
말과 함께 당소소가 번개처럼 장추삼에게 다가가 업힌 이를 받아들었다. 그
리고 의혹과 안전과... 그 외 여러 가지 질문들을 담은 눈빛.
“안심해요. 이 노인, 보기보다 근력이 좋더군. 아님 그가 준 속명단이 탁
월했든지.”
“어떻게 된건가?”
“이분을 어디서 만났소?”
쏟아지는 질문들, 그러나 장추삼은 도리어 물었다.
“또 모두 자결했소?”
' ! '
' ! '
' ! '
방교명의 안위를 살피던 당소소의 손길이 딱 멎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하
운과 북궁단야의 움직임까지도...
“'또' 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장추삼이 말하기 귀찮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알면서 뭐하러 묻는거요. 나랑 치고받던 네 명처럼 이들도 죽어 나자빠진
것 같은데.”
경황이 없었고, 그의 등장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장추
삼은 거의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넝마 처럼 헤진 윗옷, 퉁퉁 부어오른 손,
신발은 아예 안신는 게 나을 정도로 찢어지고, 묘하게도 그을려 있었다.
“아니 그럼 방장로님을 위해하려던 네 명의 청의인과 싸웠단 말이오?”
그래서 이겼다는 거요, 라는 말은 생략하고 하운이 다급하게 물었다. 느낌
상 그저 삼류건달은 아닐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본 장추삼이 네 명의 청의
인들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준의 무공까지 지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북궁단야는 무얼 생각하는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가끔 기묘한 눈길로
장추삼을 쳐다보는 것 빼고는.
“아까 말했잖소."
퉁명스럽게 장추삼이 내뱉었다. 이번에는 하운과 당소소의 눈길이 마주쳤다
. 아까 북궁단야와 당소소가 눈길을 마주했던 것 처럼.
“끄응...”
신음성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며 방교명이 정신을 차렸다.
“장로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이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릴까, 소소의 목소리랑 닮았는데...
“저예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저 소소라구요 장로님!”
‘뭐, 소소!’
힘겹게 눈꺼풀을 치껴뜨고 흐릿한 가운데 자신을 내려 보는 얼굴 하나를 잡
아내었다. 성에 낀 유리창이 차차 맑아지듯 찬찬히 들어오는 얼굴. 아무런
미련없는 인생에 마지막 의미가 되어버린 마음속의 손녀.
“소, 소소냐?”
“예, 저예요 소소! 이제 정신이 드세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눈물을 죽 떨구었다. 하운도 북궁단야도 이순간 만
큼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빙그레 미소지었다.
“울면서 웃으면 어디에 털난다는데...”
누차 얘기하지만 어디든 꼭 이런 놈이 있다. 잔뜩 골이 난 어린아이 마냥 툴툴
거리는 장추삼인데 당소소에겐 그 어떤 존재보다 귀엽고 고마웠다.
“장공자, 고마워요! 고마워요!”
포권으로 부족했는지 그녀가 연방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심드렁하던 장추
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인생의 선배였고 직장의 최고참인데
다 장추삼에겐 한 번 도 가져본적 없는 누이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이러지 마요, 진짜 이러지 말라니까!”
엉거주춤 일어서서 연신 손짓으로 만류하던 장추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큰
절이라도 했을지 몰랐다. 그녀에게도 방교명은 마음속의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니까.
어느정도 정신이 드는 듯 방교명이 상체를 세워 그를 둘러싼 두명의 사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참 잘들도 생겼구나.’
그의 첫 인상이었고,
‘참 선한 삶을 살아왔구나.’
하운을 보며 미소지었고,
‘오오! 이만한 미남이 또 어디있을꼬, 훤칠한 키에 가만있어도 저절로 남
을 누르는듯한 기세까지!’
북궁단야에겐 감탄을 했다.
그리고...
‘저 거지녀석은 뭐야?’
두 눈 쫙 찢어지고 의복이 걸레가 된 상거지꼴의 - 머리마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상태도 좋을 리가 없다 - 사내에게 당소소가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아닌가?
“얘, 소소야.”
방교명이 힘겹게 당소소를 불렀다.
“예, 장로님.”
어느정도 만족할만큼 감사의 표시를 하고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에 술을
실컷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은, 한달치 급료는 다 써도 좋다고 마음먹은 당소
소가 방교명에게 갔다.
“저 거... 아니, 청년은 누구냐? 동료냐?”
물론 ‘아니지’ 는 뺐다.
“예, 장추삼공자라고 저희 실회조원이예요. 장로님을 구해드린...”
“뭐, 날 구해?”
“ ? ”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반응인가? 분명 장추삼은 척 보기에도 부상당한 방교
명을 업고왔고 네명과 싸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근데 방교명이 하는 말은
또 뭔가?
당소소도 그제서야 의아한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장공자의 무위(?)로는 네명의 청의인을, 그것도 가장 강하다는 한명이 포
함된 인물들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만 곁에서 생활하며 느낀 건 절대로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할 인물은
아니었다.
“아! 혹시...”
그거구나, 하는 얼굴로 방교명이 싸움의 전모 - 그가 기억할 수 있는 - 를
얘기해 주었다.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흑!”
또 울먹이는 당소소에게 하운이 물었다.
“저... 제왕분이 뭡니까? 처음 들어보는 거랴...”
대답은 방교명이 해주었다.
“제왕분은 이 필부의 육십 평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아들 같은 놈이지..."
제왕분.
방교명이 마지막으로 날렸던 초록색의 분말.
이것은 독에 관한 한 당문을 대표한다는 방교명이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역작
이었다. 단 한호흡만 흡입해도 일체의 공력을 운기할 수 없고, 또한 독성분
마저 지독해서 즉시로 피독주 따위의 해독작용을 하는 무언가의 도움을 받
지 못하면 천고의 고수라도 독기를 체외로 몰아내지 못하고 일 다경만에 죽
음에 이르른다.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