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이백마흔아홉 번째
늙음에 열광하자
‘늙어 보여.’ 이런 말을 들으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대개는 숨이 통하지 않아서 기운이 막히듯 질색할 것이고, 여자들은 더욱 싫어할 겁니다. 늙어 보인다는 말은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말이고, 힘없고 능력 없고 패자가 되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실수로부터 배워라, 부정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신체와 정신건강에 신경 써라, 영원한 것은 없다.’ 등등의 말로 충고하며 ‘젊을 때 여행하라’라고 합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역시 자기의 늙었음을 한탄하는 속내를 내비치는 말로 들립니다. 이런 늙음에 대해 유인경 작가는 오십 너머에도 천 개의 태양이 빛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십이 늙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머’라고 하니 늙은이에게도 하는 말로 들립니다. “인생의 전성기와 행복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릴 수 있다. 폭우도 언젠가는 그친다는 걸 알기에 창가에 앉아 무지개가 뜨기를 기다릴 수 있다. 나이 들어서 선택은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내게 불필요한 것을 골라 버리는 것이다.” 그리 말은 하지만, 불필요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는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시인이 “현재의 행복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이고, 그런 삶이 오래되어 편안해지는 것이 늙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늙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걸로 족한가요? 누군가가 그럽니다. 젊음의 찬가가 있듯이, 젊음에 열광하는 것처럼 ‘늙음의 찬가’는 왜 없는가, ‘늙음에 열광하자’고 합니다. 그의 말이 아프리카 말리의 작가 아마두 앙파데바가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지혜 있는 노인이 되는 일에 미치자는 것, 열광하자는 말로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