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8월 5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레위 25,1.8-17
복 음 :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손가락 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가리켜 보십시오.
손가락 하나는 그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손가락 세 개는 자기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는 세 배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관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못합니다.
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하기에 앞서, 최소한 3번은 자기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상대방을 향하고, 세 개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신독(삼길 신愼, 홀로 독獨)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절제하며 옳은 길을 걷는 사람은 함께 있을 때도 좋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모습에서 겸손하지 않고 함부로 막 한다면
남들 앞에서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따르면서 그저 남들만큼만 할 생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남들처럼만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유한 ‘나’의 삶을 살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비교, 판단, 단죄의 삶이 아닌, 인정, 지지, 칭찬이라는 나의 멋진 삶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 영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지요.
우선 그의 잘못은 헛된 맹세에서 시작했습니다.
자기 생일잔치에 헤로데의 고관들과 갈릴래아의 유명한 인사들이 초대된 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아 헛된 맹세를 한 것입니다.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지요.
군주가 손님들을 초청해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 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되었고, 전쟁 패배로 인해
로마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서 죽게 됩니다.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살피면서 그 뜻에 맞게 열심히 사는 고유한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는 순간의 만족만을 주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제게 밭은 당연히 신문의 지면입니다.
저는 지면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느라 일주일이 훌쩍 지나갑니다.
정창용 신부님의 ‘아이티’ 이야기는 가난 속에서 예쁘게 피는 꽃과 같습니다.
윤채영 선생님의 심리 여행은 은은함이 드러나는 연꽃 같습니다.
원영배 부제님의 평화칼럼에서는 인문학에서 피어나는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님의 ‘공소’ 이야기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납니다.
김광현 교수님의 ‘성당 건축 이야기’에서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용은 수녀님의 ‘오늘도 안녕하세요?’에서는
자아를 잃어버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영성의 샘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보물이 묻혀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보물을 찾으려는 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보물이 묻혀 있는 평화신문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문에서 발견한 보물은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입니다.
박형찬 교수님은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큰 족적을 남겼던 분들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소개된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지용(프란치스코), 장발(루도비코), 피천득(프란치스코), 윤석중(요한),
장우성(요셉), 김기창(베드로), 마해송(프란치스코), 윤용하(요셉), 김세중(프란치스코),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찬상병(시몬), 최인호(베드로), 정채봉(프란치스코), 윤정희(데레사)”
이분들은 한국 문화 예술계의 별이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로서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천에 있는 세 잎 클로버는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발견하는 네 잎 클로버를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행복을 행운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운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찾기도 어렵지만 찾았다고 해도 남들에게 빼앗기곤 합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행복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행복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입니다.
오늘 독서는 ‘희년’을 이야기합니다.
희년의 근본정신은
"남이 나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듯이
가난한 이, 굶주린 이, 헐벗은 이, 노예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이런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것입니다.
희년은 정해진 햇수나 날짜가 아닙니다.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매일이 희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은 희년이 왔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행운 속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도 희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눔, 자비, 희생, 사랑’을 보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재물, 권력,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희년을 선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희년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결코 희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쇠락과 소멸, 그리 나쁜 것이 아니랍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초스피드하게 쇠락하고 소멸되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요약해보니 이렇습니다.
‘주님은 점점 커지셔야만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만 한다.
나는 쓸쓸하게 저무는 석양이요, 그분은 황홀하게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 의식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잘 수행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의 위용은 엄청났습니다.
그의 날 선 설교와 거침없는 행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면, 추종자, 제자들이 줄을 이었고,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자마자,
평생 준비해왔던 마지막 사명을 시작합니다.
그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물려드립니다.
손톱만큼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잘 준비해놓은 무대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조용히 무대 밑으로 내려옵니다.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면 자화자찬이요, 별것도 없으면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지나치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습니다.
자꾸만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롤 모델이요 이정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쇠락과 소멸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그런 모습,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소명입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나이를 점점 더 먹어가면서,
더 이상 젊은 시절의 가슴설렘이나 파릇파릇함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활짝 떴던 세례자 요한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시는 주님을 위한 나의 쇠락과 소멸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화와 병고, 죽음조차도 견딜만한 것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로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헛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숨긴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있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해야 할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민동규 다니엘 신부
진흙으로 예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보신 적 있으실까요?
모양을 잡고 덜어내고, 또 모양을 잡고 또 덜어내고,
그렇게 예쁜 모양의 그릇을 만든 후 잘 구워내야 예쁜 그릇이 된답니다.
구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에 모양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덜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보신적 있으실까요?
나무를 깎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나무 안에
꼭 그 작품이 미리 들어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필요 없는 부분을 거둬내면 나무 안에 숨을 쉬고 있던 작품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알맞도록 우리를 덜어내고 또 깎아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걷는 것이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깎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나를 깎아내야 합니다.
나의 고정관념을 깎아내야 하고 나의 고집을 깎아내야 합니다.
나의 교만을 덜어내야 하고 나의 나태함을 덜어내야 합니다.
오른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길이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깎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혹시, 우리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요?
내 생각과 내 편향된 주관이 하느님의 길을 막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단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스프레 보다는….
코스프레라는 단어는 어느 날 우리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의 캐릭터를 따라 하는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이런 취미가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코스프레는 그저 코스프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와 같은 척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냥 ‘척’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코스프레를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착한 척
자비로운 척
인자한 척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
우리의 코스프레는 그저 우리가 만든 가면에 불과합니다.
코스프레가 아닌
우리 모습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이 테라 수녀
입회 전까지 좋아하는 취미이자 잘할 수 있는 일을 실컷 했다.
입회 후 가끔은 그럴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최근 어느 모임의 파견 미사를 참석했는데
싱그러운 청년들이 그 시절 내가 너무나 행복하게 했던 일들을
역시나 기쁨으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순간 너무나 부러웠고 예수님께 나도 하고 싶다고 아직 하고 싶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는데..
순간 그 길은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넉넉하다.. 하는
생각이 툭 올라왔다.
내가 조금은 답답하게도 또 때로는 건조하게도 느끼는 나의 일상이
많은 이들이 찾지 않지만.. 누군가 걷길 바라시는 좁은 길이구나..
내가 이 길을 걷길 원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짧은 순간에 확 느꼈다.
그러면서 울컥하는 감정도 올라왔다.
내가 때로 저 길을 얼마나 다시 걷고 싶은지..
저 길 위에서 얼마나 생동감 있고 행복했는지 주님은 아시는지..
아시는 만큼 이 길 위에서 매일 넘어지고 더러움도 묻고
울고 또 일어나고 나 자신과 매일 싸우며
때론 걷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나를 보시고..
성령의 은총을 가득 부어주시며 고맙다 잘하고 있다 사랑한다
다독여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주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허무하고도 끔찍한 죽임을 당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어디 계셨냐고, 저 열심한 사람이 왜 저런 죽음을 맞아야 했냐고
따지는 내 마음에도..
그와 함께 그 순간을 온전히 걸어가신 주님이 계셨음을..
조금이나마 또 순간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좋은 몫이 내 몫이길 바라는 마음이 언제쯤
"주님 주시는 몫이 제 몫이길 기꺼이 바랍니다." 하는 고백을 드릴 수 있을지..
오늘 세례자요한이 마지막 순간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살포시 미소 지은 모습이 그려지며,
주님 뜻을 향한 신뢰가 내 안에서 더 성장해야 함을 반성하고 기도하게 된다.
주님, 좁은 길이 이르는 목적지를 잊지 않게 하시고
함께 걷는 당신 발걸음을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출처] 마태 14,1-12 연중 제17주간 토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