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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6일 주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 다니 7,9-10.13-14
제2독서 : 2베드 1,16-19
복 음 : 마태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57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재능을 알아준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겨우 25%였지요.
회사가 나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는 직원의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까요?
재능을 알고 여기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업무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전에 직원 채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중에 이를 이야기하니, 한 사람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쉬고 대신 평일에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제가 맞춰야죠. 뽑아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채용되었을까요?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춰야 채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내게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할까요?
주님께서 내 재능을 몰라준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계속 머물러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제자들이 원할 뿐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진 주님 모습에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든 전교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행을 다녀오면서 피부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강한 햇볕에 노출된 어깨와 등이 빨갛게 익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의 허물이 벗겨졌습니다.
피부가 햇빛에 약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학생 때 바닷가를 다녀와서 허물이 벗겨진 이후에 처음으로 허물이 벗겨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물이 벗겨지면서 미관상 안 좋기도 했고,
무리하게 허물을 벗겨내면서 민감한 피부가 아프기도 했습니다.
허물을 벗겨내면서 허물의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입니다.
저처럼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허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곤충에게는 ‘허물’이 있습니다.
곤충에게 허물을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탈피의 과정입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허물은 남고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같은 몸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부활의 상징과 같습니다.
파충류 중에는 ‘탈피’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물을 벗으면서 더 성장하고, 더 깨끗하고 건강한 피부가 됩니다.
허물의 두 번째 의미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허물과 관련된 속담이 있습니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 칼날이 날카로워도 제 자루 못 깎는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남의 말이라면 쌍지팡이 짚고 나선다. 누구나 허물없는 사람은 없다.
독사는 허물을 벗어도 독사다. 똥 싼 놈은 도망가고 방귀 뀐 놈만 잡혔다.
자랑 쟁이에게 허물이 더 많다. 자기 얼굴은 자기가 못 본다.
겨울바람이 봄바람 보고 춥다고 한다. 재를 털어야 숯불이 빛난다.
가랑잎이 솔잎 더러 바스락 거린다고 한다.”
허물에 대한 속담 대부분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남들도 그러는데 머!’라고 하면서 저의 잘못을 합리화한 적도 많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허물은 ‘원죄’와 같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었듯이,
원죄의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것이 ‘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늘에 계셨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시고 편하게 계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몸소 사람이 되시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허물은 지나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텐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겸손‘이라는 ’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염색을 하는 것도,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성형을 하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변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극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던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매일 마음속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묵직한 고민거리들이 열 가지 정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느 날 세수를 하던 중,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좀비 한 마리가 거울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나 정신이 빠져나가 버린, 그저 몸만 흐느적 흐느적 거리며 돌아다니는 영락없는 좀비였습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도 생활 연륜도 30년, 40년인데, 계획대로라면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하고 당당한 얼굴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뾰쪽하고 모난 곳은 깎이고, 움푹 패인 곳은 잘 메꾸어져,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로 변모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니, 그때 느낀 참담함이 엄청났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한번 변화되어 보고자 그토록 발버둥을 쳐왔습니다만,
그 변화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님 변모 축일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봐야겠습니다.
보다 긍정적인 태도에로의 변화, 보다 인간적이면서도 보다 영적인 삶에로의 변화,
보다 거룩한 삶, 천상적 삶에로의 변화...
오늘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단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되십니다.
얼굴과 몸 전체가 눈부실 정도로 광채로 빛났습니다.
주님 얼굴의 거룩한 변모는 조만간 맞이하게 될 메시아의 운명을
넌지시 제자들에게 보여 주는 대사건입니다.
성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이자 희생양이 되셔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으로 내려가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정복하십니다.
그리고 참혹했던 주님의 얼굴은 당신의 부활로 인해 더없이 찬란하고 빛나는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과 영광의 삶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다양한 죄 속에서 살아가고 이런저런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지만,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삶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교회는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시며
당신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분처럼”(1요한 3,2) 되어야 한다고 초대하는 축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변화는 십자가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전례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40일 후 9월 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변모는 바로 영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임을
오늘의 전례는 말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절)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 빛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보이는 빛이며 마음의 눈에 보이는 해이며 지혜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옷은 그분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 옷자락은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이 나은 여인처럼, 구원을 받는 바로 그분의 교회를 말한다.
그 옷은 그렇게 빛처럼 빛나야 한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3절)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복음서에서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언자와 율법을 대표하는 분들이지만
구약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 때문에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분들이다.
이분들은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다.
그 길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바로 이것이 제자들이 목격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고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절)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 초막은 당신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에 마련되어야 할 초막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기쁨에 차서 이 말을 하게 된 것이지만,
영광에 앞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모든 유혹을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베드로가 말한 초막보다 더 좋은 초막, 빛나는 구름으로 그들을 덮어주셨다.
그 빛나는 구름은 의인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고 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을 비추는 구름이다.
그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으니,
그 구름은 아버지의 권능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 말씀은 아드님을 대신하여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답이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라는 것이며, 즉 귀로만 듣는 것보다 그 말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모범대로 사는 것,
곧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6절)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곳은 사방에 아무도 없는 높은 산이었고 고요했으며,
변모가 일어났고,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일이었으며 그리하여 두려움과 경배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강하게 해주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모습이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절)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거나,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기 때문이거나,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나약성으로 그런 엄청난 영광을 보았을 때,
아마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몸과 마음이 떨려 땅에 엎드려지고 말 것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도록 먼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셨다.
당신은 병자를 치유해 주실 때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8절)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의 말씀도 들었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땅에 엎드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만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서가 예수님 안에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셋이었지만, 셋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얻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으므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것과
이제 하느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의 참된 거처를 가지시는 것을 확신시키는 사건이다.
그러면서 또한 이 변모 사건은 신앙인들의 길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시련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영광스러운 변모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십자가의 도전을 이겨 나가야 할 것이다.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되풀이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의 마지막 장소는 산이었습니다.(4,8 참조)
에수님께서 참 행복의 말씀을 들려주신 곳도 산이었고,(5,1 참조)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15,29 참조)
복음서 끝에는 예수님을 산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28,16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약의 두 인물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계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산을 내려와 예언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갑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내면 깊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변모’를 희망하며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의미에서 더 잘되기를 바라는 데에만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참된 주님의 모습과 그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산에서 그분을 뵈었으니 이제 다시 산을 내려 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물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을 내려 오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성당에서 또 고요한 기도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산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스승께서 당신의 생명을 쏟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산에서 들은 말씀과 산에서 본
그분의 참모습을 마음에 품고 형제들을 섬기고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 특히 사도 베드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초막 셋을 만들어 그곳에 머무르기를 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변모는 그 자체로 신비로운 체험이고
그 빛은 따듯함과 평화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빛이 아니라 천상의 빛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그 천상의 빛 안에 머무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과 기도 안에서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그분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비로움에 머무르고 싶겠지만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주님에 대한 체험은 그 자체로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잡거나 우리 마음대로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선물로서 잠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바로 우리 삶이 터전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신비로운 주님의 응답은 가슴속에 간직한 채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하루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신비로움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와 늘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일상의 주님과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수박 주스
오전 미사를 봉헌하고
더위에 헐떡이며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직원들이 내 손에 들려준
수박 주스.
수박 주스….
수박 주스….
한참을 책상 위에 두고 바라만 봤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그냥 바라만 봤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그것이 크든 작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박 주스 안에
마음이 가득 들어있으니까요.
고기나 한턱내야겠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언제나 함께...
최 코르디아 수녀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과 동거동락한 제자들.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뵌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이곳에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주님과 만난 시간
모든 것이 충족되어 머물고만 싶어지는 시간
북적한 휴양지가 아니라 한적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땐,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습니다.
[출처] 마태 17,1-9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