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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믿음과 헌신: 붓다와 보살 숭배5. 붓다들
5.3 아미타불
무량수경계 경전들
붓다들에게 행하는 의식(儀式)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대한 것이다. 현대 일본불교에서 이것은 어떤 다른 불교 교리보다도 신자들에게 훨씬 자주 설해진다. 수세기 동안 아미타불에 대한 경전들과 이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주석서는 수백만 동아시아 불교도들의 희망과 비전이었으며, 그에 상응하여 동아시아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인도에서 아미타불에 기초한 정토학파의 출현에 있어서 타나카(Kenneth K. Tanaka 1990: 3-13)는 5단계의 연대기를 탐구하였다. 첫째,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곧바로 과거불들이 있다는 사상이 생겨났다. 이로부터 미래에도 붓다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추론되었고, 기원전 2세기말 무렵에 이 희망은 미륵불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둘째, 또한 기원전 2세기에 시방세계 각각에 무수한 영토가 있다는 생각 이 어떤 환경에서 발달하였다. 초기불교는 한 명 이상의 붓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살과 완전한 성불로 가는 그의 활동에 대한 생각과 최고의 보살도를 추구하는 이들이 다양 할 수 있다는 암시와 함께 이 보살들은 어디서 붓다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가정이 생겨났다. 그것은 적어도 붓다가 다른 세계의 일부에 거주할 수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이것이 다른 불국토에 있을지라도 붓다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을 가진 불국토의 관념을 일으켰다. 따라서 보살이 다른 곳에서 심지어 지금 붓다가 된다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유방식은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에게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대중부와 출세간부에서는 받아들여졌다. 다나카는 이것이 결국 지금 이 세상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붓다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는 현재 자비로운 붓다들과 실제로 그들을 따르는 보살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고, 기꺼이 돕고자 하고, 그들의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 전환할 수 있는 엄청난 공덕들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다나카는 이 생각의 진전은 불교 안에서, 쉬바신과 비슈누신에 대한 브라만교의 숭배의식의 발생이라는 어떤 경쟁 환경 안에서 발생했음에 틀림이 없다고 추정한다. 인도 정토학파 발전의 세번째 단계는 1세기 후반부 무렵에 자신의 정토인 극락에 머물고 있는 이 동시대의 붓다들 중 하나인 아미타불의 출현이다. 이 아미타불에 중점을 두는 관련된 경전들은 100년경에 편찬되었다. 넷째, 4세기 초반 혹은 3세기 무렵 이 아미타불에 열렬한 추종자들은 염불과 칭명염불의 수행을 채택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염불 수행은 그 당시에 이미 잘 발달되어 있었고, 특히 인도의 북서부 지역 불교와 중앙아시아 불교에서 전체 ‘염불 경전들’을 생산하도록 이끌었다. 이 경전들은 5세기 초에 종종 중앙아시아 출신의 번역가들이 열정적으로 번역하였다. 정토 부파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비판적인 주석서의 발달임에 틀림이 없다. 다나카의 모델은 매우 설득력 있게 보이지만 정확한 연대는 여전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산스크리트어 경전들이 아미타불 혹은 극락국을 말하고 있지만 인도불교에서 발견된 정토에 대한 주석서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많은 언급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정토에 대한 주석작업을 한 부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Tanaka 1990: 13). 이것은 중요한 문제처럼 보인다.
종종 단순히 ‘정토종’이라고도 알려진, 인도의 경전들에 기반한 일본의 무량수불 숭배의식은 세 가지 경전에 기반한다. 즉 『무량수경(無量 壽經)』과 『아미타경(阿彌陀經)』, 그리고 특히 『아미타유르디야나 수트라 (Amit?yurdhy?na S?tra)』라는 산스크리트어 제목이 붙여진 기원이 모호한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이 있다(『무량수경』*을 대경(大經) 이라 부르고 『아미타경』을 소경(小經)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관무량수불경』은 산스크리트어 제목이 맞다면 『아미타염불경(阿彌陀念佛經, Amit?yurbuddh?nusm?ti S?tra)』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그러나 이 세 경전이 인도 자체에서의 결합과 상응한 훨씬 나중에 결합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후자의 경전, 즉 『관무량수불경』은 인도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고 다른 두 경전과의 정확한 연결은 매우 불분명하다. 인도에서 그들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위에서 보았듯이 무량광불에게 역할을 주는 (『반주삼매경』과 같은) 다른 대승경전들이 있고 극락국에 보다 많은 역할을 준 경전들이 있다. 이 세 경전의 결합은 특히 정토종의 어떤 종류를 위한 인도의 문헌적인 기초로서 일본에 뒤늦게 결정적인 형식으로 도달했고, 일본에서 세가지 경전들은 담란(曇鸞, Tanluan 아래를 보라)과 같은 초기 중국 스승들에 의한 사용에 근거하여 법연(1133-1212)이 세경전을 함께 분류하 였다. 사실상 정토종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예를 들면 중국 순례승들의 설명으로부터) 인도불교와 아미타불의 숭배의식에 어떤 종류가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다. 만약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고고학과 비문의 증거는 초기 시대 대부분의 경우에 거의 없다. 인도불교에서 혹은 인도 대승불교의 발달에서 이 경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어떤 확신도 서지 않는다.
비록 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인도불교학에서 그들이 중요함을 암시하는 주석서들이 거의 현존하지 않고 있다. 어느 쪽이든 보다 후대의 동아시아 모델과 불교에 대한 이해를 인도의 상황으로 돌리는 것에 조심해야 한다.
『무량수경』은 2세기에 처음 한역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정토종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 판본은 승개(僧鎧, Sa?ghavarman)가 252년에 한 역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연대가 2세기말 이전으로 소급되는 『무량수경』이 더 오래된 경전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 학자들은 이 경전이 출세간부(出世間部)의 영향을 받은 쿠샨왕조 시대 간다라 지방의 화지부(化地部, Mah???saka) 승려들로부터 기원했거나, 본래 아촉불경과 같이 문체상 간다라어나 그와 매우 유사한 언어로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미타경』은 약 402년에 구마라집이 처음 한역했으며 동아시아 불교도들은 이 판본을 공식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서양 학자들은 『아미타경』이 훨씬 오래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량수경』을 더 오래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아미타경』이 더 오래된 경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경전의 원본이 기원 전 1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정토사상의 몇몇 형태와 대승불교에 나타난 최초 경향들 중의 하나를 동일시한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것 같다. 이미 염불이 중시되고 있었고, 초기 대승불교는 경쟁적이고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다수의 수행법과 학파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특정한 붓다에게 집중되었음을 분명하게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붓다에 대한 교리, 즉 아미타불에 대한 교리처럼 불국토에 대한 교리는 처음부터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두 가지 무량수경계 경전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 남아있다. 그러나 『무량수경』의 이본(異本)들은 서원의 수에서 차이가 나는 등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이 경전에 일부 구절들을 삽입했을 수도 있다.
무량수경계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을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bha)이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yus)로 번역한다. 티베트에서는 이 두 가지 이름을 별개로 다루지만 일반적으로 정토사상에서 이 명칭들은 같은 붓다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다룬다. 『무량수경』에서 그는 모든 방향의 무수한 불국토들을 헤아릴 수 없는 빛으로 비추기 때문에 무량광불이라고 한다. 후대의 정토종 주석서들에서는 무량광불의 이 무한한 빛이 사실상 그의 무한한 지혜와 전지전능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겁 동안 수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불 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중생들을 도우면서 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남아 있다. 따라서 정토사상의 학자들은 무한한 빛을 지혜에 대응시키듯이 무량수불의 무한한수명을 끝없는 자비심의 표현이라고 한다(Eracle 1973: 33-4).
『무량수경』에는 과거불 앞에서 수많은 다른 불국토들의 모든 공덕을 구현하면서 그 모두를 능가하는 가장 놀라운 불국토를 건설하려는 계획 아래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법장보살(法藏, Dharm?kara) 이야기가 있다. 법장보살도 다른 보살들처럼 몇 가지 서원을 세웠다. 그가 세운 서원의 수는 판본마다 달라 산스크리트어본에서는 47가지이고, ‘승개’의 한역본에서는 48가지이다. 정토종 학파들은 이것을 수행과 교리의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모든 서원들의 공통된 부분은 “만일 이 서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조건이다. 법장보살은 서방 극락정토에 있는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이 조건들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법장보살은 자신의 정토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결코 육도윤회의 낮은 단계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서원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생을 완전히 기억할 것이며 신통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서원 5 이하). 그들은 확고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아미타불의 정토에 사는 사람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한한 수명을 얻을 것이다(서원 15). 수많은 붓다들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찬양하고 찬미할 것이다(서원 17). 아미타불을 믿고 진심으로 그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기만 하면 된다. 부모를 살해하거나 아라한을 살해하거나 붓다를 해치거나, 승가의 분열을 조장하거나, 법을 비방하는 등의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 정토에 태어날 게 될 것이다. 죽는 순간에 보리심을 깨닫고 공덕을 실천하고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아미타불은 천상의 신들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서원 19).113)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진심으로 정토에 태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쌓은 공덕을 모두 정토에 태어나는데 회향하고자 하면 그대로 이루어져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서원 20). 게다가 보살들이 아미타불의 극락에 태어나길 원한다면 그들은 일생보처(一生補處)에 들게 된다. 이것은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전에 아미타불의 극락에서 딱 한번 태어나야 함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보살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항상 말하고 있다. 만일 보살들이 자비심으로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계속 태어날 수 있다. 물론 극락에서 중생들은 다른 불국토를 쉽고 빠르게 방문할 수 있고 무수한 붓다들에게 쉽고 빠르게 공양을 바칠 수 있다(서원 23-4).
법장보살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되었다. 실제로 가장 훌륭한 정토가 존재하며 두 가지 무량수경계 경전들은 정토에 살고 있는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을 기초로 한 극락의 모습을 매우 광범위하고 상세 하게 설명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며, 아미타불의 이름을 들어야 하며, 그에 대해 명상하고, 그를 생각해야 하며, 극락에 태어나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렇게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공덕을 닦아야 한다. 심지어 아미타불을 열렬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죽는 순간에 극락으로 인도될 것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이 몸소 하는 것이 아니라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붓다가 인도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극락에 태어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오염된 세계의 전도(顚倒)된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중생이 죽으면 보통 아미타불이 그를 자신의 정토로 인도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아미타불이 세속으로 내려오는 것을 주제로 한 일본 회화들이 많이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아미타불은 천상의 신들, 북 그리고 음악과 함께 산 정상에서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가 다가올 때 나무에서는 꽃이 활짝 핀다. 아미타불은 수행처에서 평화롭게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이름을 외우면서 기다리고 있는 승려를 향해 화폭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온다. 정토에서 중생은 남녀 구별 없이 태어난 다. 축복받은 자는 연꽃 위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무량광불 앞에 나타난다. 8세기 중앙아시아 코코(Qoco)의 벽화에서는 정토에 태어난 존재들을 연꽃 위에 앉아있거나 아름다운 극락의 정원에서 놀고 있는 벌거벗은 아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 송이의 연꽃은 아직 그 안에 벌거벗은 존재를 품고 꽃봉오리를 닫고 있다(Gaulier et al. 1976: 도판 49). 『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불과 그의 정토에 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닫힌 연꽃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500년 동안 연꽃 속을 정원이 있는 궁전으로 여기면서 안락하게 지낸다. 그렇지만 이것은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하고 행복한 생은 아니다. 결국 이 의심들을 극복한 존재들은 극락과 동떨어진 이 닫힌 연꽃의 청정한 연옥(煉獄)에서 나오는 것을 고맙게 여긴다.
『아미타경』은 주로 극락정토를 묘사하고(여기서의 정토는 『무량수경』의 정토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방법들을 설명한다. 정토의 모든 것은 정신적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보통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신들이 사는 다양한 천상세계의 무한한 감각적 쾌락의 낙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미타불이 지닌 위대한 힘에 의해 극락의 새들은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나무들이 천천히 흔들리는 것처럼 정법을 연설한다.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에 태어나려면 마음을 집중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하루나 7일 동안 염불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죽는 순간 아미타불이 나타나고 수행자는 극락을 얻게 될 것이다. 비록 『아미타경』의 염불 내용이 덜 정교하지만 현생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토록 한다는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설하는 『반주삼매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도 또는 중앙 아시아의 고전 시대에 현생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했다는 측과 죽는 순간에 친견한다는 측 사이에 또 다른 논쟁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관무량수경』은 (그 산스크리트어 제목이 옳다면) 약간 다른 유형의 경전이다. 이것은 5세기 초반에 강량야사(畺良耶舍, K?laya?as)가 한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무량수경』은 아마 그 이전 세기에 편찬되었고 대략 같은 시기에 한역된 것으로 여겨지는 불·보살의 염불에 관한 일련의 경전들 가운데 하나이다(Pas 1977: 200 이하). 현재 학자들은 『관무량수경』을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편찬된 경전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한편 파스는 이 염불과 관련된 경전들의 한역가 대부분이 카슈미르 주변 지역과 어떤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경전들 자체가 그 지역, 혹은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지역에서 편찬되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관무량수경』에는 매우 길고 의심할 여지없는 중국어인 일련의 삽입구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삽입된 구절들은 동아시아의 정토 사상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관무량수경』은 정토에 태어나는 것보다 현생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기 위한 염불 수행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석가모니불이 사악한 아들 아사세(阿?世, Aj?ta?atru)에 의해 감금된 위제희(韋提希, Vaideh?) 부인을 가르친다. 고통을 겪는 위제희 부인에게 극적인 상황이 일어난다(Inagaki 1995: 95).
저는 이 오염된 세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장소를 가르쳐 주십시오. … 이 더럽고 악한 세상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 충만하고 못된 무리 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저는 다음 세상에서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않고, 사나운 무리들을 만나 고 싶지 않사옵니다.
자비심에 가득 찬 붓다는 아미타불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설명해 주고, 열 세 가지 관법(觀法)을 가르쳐 주었다. 1) 서쪽으로 지는 태양에 대한 명상 2) 깨끗하고 고요하며 맑은 물에 대한 명상, 그리고 그 물을 얼음으로 관하며, 수정으로 관하며, 그런 후에 점차적으로 정토 자체로 관하는 명상 3) 이 정토에 대한 관법을 흔들리지 않게 마음속에 새길 것 그런 후에 4) 나무들 5) 호수들 6) 궁전들 7) 아미타불의 연화대 8) 좌대위에 아미타불이 있고 왼편에 관세음보살, 오른편에 대세지(大勢至, Mah?sth?mapr?pta)보살이 있음을 관할 것 9)그 후에 아미타불의 모습에 집중할 것 10) 그 후에 관세음보살의 모습 11) 그리고 대세지보살의 모습을 명상할 것 12) 다음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도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정토의 연꽃 위에 자신이 태어난다고 완전하게 관할 것 13) 마지막으로 자신 앞에 아미타불과 두 보살이 있다고 관할 것
이 13가지 관법에는 분명히 약간의 시간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 경전에서는 그들도 역시 확고한 계율의 기초 위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세 단계의 관법이 더 열거된다. 그 각각에는 우열에 따라 차별된 정토에 태어나는 세 가지 형태의 중생이 언급된다. 따라서 극락에 태어나는 것에는 아홉 가지 등급이 있다. 심지어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람조차도 아미타불의 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또한 오역죄를 범한 사람조차 죽기 직전에 붓다에 대해 가르쳐 줄 ‘좋은 친구[善友]’를 만날 수 있다. 사악하여 아미타불을 믿지 않았던 사람일지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 번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염불로 무수한 악행이 제거되며, 그는 극락의 연꽃 안에 태어나서 12겁 동안 지내게 될 것이다. 연꽃이 열리고, 붓다를 믿지 않다가 이제는 믿게된 이는 법을 설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게 된다. 그 결과 그는 보리심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염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단지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악행들을 근절할 수 있다 (Inagaki 1995: 116-7).
이 경전에는 특히 복잡한 관상법 수행을 할 수 없는 가장 사악한 죄인들, 심지어 스스로 수행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던 이들을 돕기 위 한 정토종의 희망이 담겨 있다. 중국에서 삽입된 구절이 스스로 모 두가 포기한 죄인이라고 느끼거나 복잡한 가르침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희망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이 구절은 누구도 무시하지 않았고, 사악한 사람, 신분이 비천한 사람, 또는 어리석은 사람을 버리지 않았던 붓다의 자비심에 근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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