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미발표 논문에서는 각주1에 실명과 더불어 언급한 사항입니다만,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미리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게 된 데에는, 제가 사부(師父)님으로 모시고 있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문화권력 및 매문(賣文)과는 거리가 먼 '순수학자'이시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일본어에 능통하신 사부님은 제게 3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문장(紋章)이다. 2) 미당은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썼다. 3) "국화꽃=누님"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는 부합되지 않는,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이미지이다. 그러한 그 교수님의 견해를 참고 삼아 자료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2)의 경우엔 실증적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제 논문에 반영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사부님과 나눈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주는 두번째 문제점으로 국문학자나 평론가들의 비평적 관심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국화 옆에서>를 정답이 너무도 뻔한 쉬운 시, 대중적인 취향에 맞는, 격이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한 탓인지는 몰라도, 학자나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주1). 제 생각엔, <국화 옆에서>를 가장 세밀하게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한 평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창작자인 미당 자신인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49년 조지훈, 박목월과 공저한 <시창작법>이란 책에서 자신이 <국화 옆에서>를 어떻게 창작했는 지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당은 국화에 관한 여러 편의 수필과 <시의 암시>등과 같은 시론에서 <국화 옆에서>를 전문(全文) 소개하면서 창작 배경 및 시어의 상징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에 이토록 많은 애착을 지닌 것은 그가 이 시를 그만큼 공들여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심층에 다른 많은 암시와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당이 그의 시론에서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 내지 구성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 내지 "언외(言外)의 암시력(暗示力)의 효과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각주2).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야 하는 세번째 이유로, 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배합이 보이는 비상식성과 반전통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선, 시어들--소쩍새, 천둥, 먹구름, 거울, 누님, 국화꽃, 무서리--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들 사이에 부조화와 충돌이 느껴집니다. '누님'의 이미지는 친연성과 평범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의 이미지를 보조하고 보강하는 다른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강렬하고 비극적이고 음울합니다. 누님같은 꽃의 탄생을 노래하기 위해, 죽음과 여인의 한(恨)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소쩍새와 무서리를 언급하고, 천둥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과장이 심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고급한(?) 취향을 가진 문학 평론가들은 이 시를 심도있게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국문학자들의 시 해설 가운데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흥규교수와 이어령교수의 견해입니다. 물론 두 분의 해설도 심도있는 고찰은 아니었습니다.
그[미당]의 생각으로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그리고 가을 밤 무서리와 그 자신의 잠 못 이룸이 모두 한송이 국화꽃과 어떤 신비스러운 인연을 가진 것만 같다. 그러나 상식적 논리를 넘어 생각해 볼 때 이 우주와 생명의 신비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더욱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떤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불교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비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다 (각주3)
하지만 비상식적인 이미지 구성의 숨겨진 의미를 설득력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함이 없이, 불교의 인연설 내지 윤회설로 설명하거나 생명 탄생의 장엄한 신비를 노래한 것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불교적 관점을 도입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봄의 이미지 가운데 소쩍새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여름의 이미지들 가운데 천둥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가을의 이미지들 가운데 무서리인가? 과연 이 시를 어느 무명씨가 썼더라도, 김흥규교수가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였을 지 의구심이 듭니다.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지니는 반전통성에 대해선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한국 전통의 문학적 맥락과 연계시켜 해석했습니다만,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 두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국화꽃의 전통적인 한국적 이미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정보(李鼎輔)의 시조--"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매한 인품을 지닌 절개있는 선비라는 남성적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미당의 국화꽃은 여성적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한국문화상징으로서의 전통적 "국화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광용교수의 해석은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생략하겠습니다).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 <씨알의 소리, 2000년 5. 6월호>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또 이어령교수도 미당의 국화꽃의 독특성 내지 새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각주4).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어령교수가 말하는 "그 두가지 다른 느낌"의 첫 번째 특성은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로" 바뀌게 됨으로써, 기존의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혹은 '책 앞에 앉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이교수가 말하는 두 번째 특성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한국문학 속의 국화꽃이 고고하고 이념적인 존재를 상징하면서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당의 국화꽃은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당의 국화꽃이 한국고전문학 속의 국화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본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시 전반에 걸친 그들의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박교수는 나름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원인을 고찰하고 있습니다만,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만을 고집함으로써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해설은 미당의 시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왜 미당이 하필이면 국화꽃의 탄생을 묘사하기 위해 소쩍새, 천둥, 거울, 무서리와 같은 이질적인 시어들을 선택했을까?' '미당의 국화꽃이 그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 원인 및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미당이 국화꽃의 젠더를 바꾼 것은 그의 독창적 발상인가?' 등등--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모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 나갈 글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 주는 문제점으로 신화적 해석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고대 신화와 전설은 미당의 후기 시 뿐만 아니라, 시 창작 전반에 걸쳐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사>나 <귀촉도>등과 같은 초기 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듯이, 미당은 서양과 동양의 여러 신화와 전설에서 소재를 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당은 외국과 한국의 신화 내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신과 여걸--이브, 클레오파트라, 헬레네, 선덕여왕, 성모 마리아,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황진이, 웅녀, 세오녀 등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미당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天照大神)와 어머니 이자나미 (伊耶那美命)에 관한 창세신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각주5). 하지만 일본신화 내지 문화와 연계지어 미당을 해석하는 것은 기존의 학문적 논의에서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점 내지 한계성은, 이 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문학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홀히 취급해 온 상술한 문제점들은 미당의 미학과 세계관을 보다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화 옆에서>가 아직도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는 데다 문학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내일부터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할 이 글의 본문에서는「국화 옆에서」에 있어서의 국화꽃의 상징성과 일본신화와의 유사성을 역사사회학적인 측면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상세히 고찰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