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24일 (토)
제목 : 성령의 임재
오늘의 말씀 : 누가복음 3:21-38 찬송가: 80장(구 101장)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
중심 단어: 세례, 예수, 성령,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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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21절: 세례를 받으신 분/ 하늘을 여시는 분
22절: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신 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
23-38절: 하나님의 계보를 이으신 분
도움말
도움말
1. 하늘이 열리며(21절):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 땅에 구현될 때 발생하는 일이다(겔 1:1; 행 7:56).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보자이며 하나님의 통치권을 이 땅에 구현하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2. 성령이...강림하시더니(22절): 창세기 1:2은“하나님의 영(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운행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비둘기가 제 둥지 주변을 선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창조 및 새 창조의 중보자이심을 증거한다.
3. 보아스(32절): 룻기의 주인공 룻과 결혼해 다윗의 조부인 오벳을 낳았다. 베들레헴 출신이다.
말씀묵상
성령의 임재
구약 성경에서 성령, 비둘기, 물의 이미지는 창조 및 새 창조 개념을 내포합니다.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기록에서 ‘운행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비둘기가 제 둥지 주변을 선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이 표현을 의역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는 물에 덮인 땅에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가 새 창조의 전령으로 묘사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임했다는 기록은 예수님께서 창조의 중보자이시며 새 창조의 주인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을 열고 이 땅에 하늘의 구원을 끌어오시는 분이며 그 구원의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이끄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역할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은 우리에게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새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라면,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그분으로 인한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천지창조시에 수면 밑에 감추어져 있던 땅이 그 위용을 드러내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듯이, 그리스도를 그의 가슴 속에 받아들이고 성령의 조명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인격적인 차원에서 신령하고 거룩한 새 인격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음란함에서 해방되었습니까?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졌습니까? 당신의 언행심사는 인간적인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도움질문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깊은 묵상
1.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조명에 힘입어 변화받지 못한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제공:프리셉트
<오늘의 묵상>
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의 계보를 마태와 다른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을까?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소리가 났다고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생물학적 아버지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므로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임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마태가 기록한 계보와 누가가 기록한 계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계보를 따라오신 예수님, 다윗의 계보를 따라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했다면 누가의 수신자는 이방인이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과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지만 누가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는...’이란 관점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그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마태는 왕족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했다면 누가는 인간적인 혈통으로 오신 예수님을 대조시키고 있다.
누가가가 다윗의 아들을 솔로몬이 아니라 밧세바가 낳은 아들 즉 솔로몬의 친형이었던 나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상3:5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그 이유를 마리아가 바로 나단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보다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더 정겹게 느껴지고 있을까?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요셉은 보이지 않고 마리아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는 대로’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심받게 된다.
고향도, 출신도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걸림돌이 되고 만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했고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오늘은 왜 ‘하나님의 아들’보다 ‘요셉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이라고 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셨다.(막6:6)
세 번째 치유집회를 마치고 내게 주시는 감동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아픔 저런 아픔을 가지고 살아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영혼이다.
주일 설교 때 한 번뿐인 인생 가장 잘 살고 복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사람이 아는 대로 ‘요셉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들’예수가 되셨을까? 십자가에서 외쳤던 백부장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사랑의 주님. 치유집회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볼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사탄의 공격도 만만치 않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기도할 때 치유와 회복에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30년 동안 요셉의 아들로 살아왔던 것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을 뛰어넘어 들꽃에 찾아와주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성령의 임재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깨닫게 하옵시고, 요셉의 아들로 살아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요, 작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임을 기억하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