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8월 8일 화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민수 12,1-13
복 음 : 마태 14,22-36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소리를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 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자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보아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공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존경받을 때보다는
실패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비난받을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을 새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고난의 순간에 함께 해 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운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1997년 IMF 때입니다. 저도 IMF의 파도를 맞았습니다. 은행 대출이자가 17%였을 때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머물 수 있는 전세금이 필요했고, 은행에서 대출 받았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었던 동창들이 제게 선뜻 비용을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1년 뒤에 동창들에게 빚을 갚았고, 식사를 함께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저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작년 8월 서품 31주년을 기념하며 타코마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창 한 명이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왔기에 별 거리낌 없이 신부님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저도 코로나 증상이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에 걸리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이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모시고 뉴욕으로 와서 함께 지냈습니다.
신부님은 코로나에서 회복되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신앙은 대상을 중심으로 하면 종교가 됩니다.
신앙은 행동을 중심으로 하면 이정표가 됩니다.
주변을 보면 1인 3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사랑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과 소중한 일을 식별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유지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눕니다.
3가지 일을 하면서 더 큰 성과를 얻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서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입니다.
신문사를 운영하고, 홍보하고, 좋은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부르클린 신자들께서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의 장례미사도 도와드렸습니다. 고인의 유족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장지에 함께 갔던 봉사자들이 기꺼이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퀸즈 성당의 미사도 도와드립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신문 홍보를 하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댐이 무너지는 것은 태풍으로 물이 넘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구멍으로도 커다란 댐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아주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강한 군대를 가졌던 조조가 작은 군대를 지닌 제갈공명에게 패배한 것은
부하를 믿지 못했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조조에게 의심이라는 아주 작은 씨앗을 주었습니다.
조조의 마음에 들어온 의심이라는 씨는 조조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훌륭한 장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미르얌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의심했던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흔들리는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 도미니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도미니코 사제의 성덕의 탁월성이 얼마나 출중했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불과 13년 만에 시성 되었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시성 된 성인성녀들 가운데 초스피드로 시성 된 큰 분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입니다.
2005년 선종하셨는데, 불과 9년 후인 2014년에 성인품이 올랐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을 꼽자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그분은 1997년 돌아가셨고, 2016년 시성 되셨으니, 19년만입니다.
성인이 되는 과정은 정말이지 길고도 지루합니다.
후보자가 지닌 성덕의 보편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시성시복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야 합니다.
지역이나 단체에서 시성 청원 작업을 시작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교황청 시복시성청으로 보냅니다.
주도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겨우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그 후, 가경자, 즉 보편적 존경이 가능한 인물로 올라갑니다.
이어서 복자, 성인의 단계를 밟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가경자 상태에서 몇십 년 몇백 년을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자까지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성인품이 계속 미뤄지기도 합니다.
몇십 년 몇백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10년, 2년 만에 초스피드로 성인품에 오르셨다는 것은,
이미 살아계실 때, 성인으로서의 확고한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상에 머물 때부터 그들은 이미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과정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도미니코 사제가 지상에 머물던 순간,
우리 가톨릭교회는 다양한 위기와 도전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교도권의 추락, 이단의 출현, 신심의 약화...
이런 어려운 시기 하느님께서는 도미니코 사제라는 선물을 교회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양 떼가 겪고 있는 고통과 환란을 결코 나 몰라라 하시지 않습니다.
눈여겨보시고, 예의주시하시고, 안타까워하시다가, 해결사랄까, 위로자를 보내주시는데,
바로 도미니코 사제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성녀들입니다.
우리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체적 사랑의 표현이 성인인 것입니다.
알비파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창궐하던 시대, 도미니코 사제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대, 하느님께 위로와 기쁨을 드릴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설교 전문 수도회 설립!
도미니코 사제를 중심으로 양질의 교육으로 잘 준비된 설교수도자들은
이단의 척결과 회개를 위한 주님의 군사로 빛나는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도미니코 사제와 수도자들 당대 교우들이 그릇된 신심이나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잘 준비된 명쾌한 설교를 통해 흔들리던 교회의 중심을 굳건히 서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23절)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것은,
조용한 곳에서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분은 외딴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때가 많다.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파도에 시달린다.
맞바람이 불어오자 제자들의 배는 폭풍 가운데에서 마구 뒤흔들린다.
배는 풍랑 속에 있어도 그대로 배이다.
이 배는 제자들을 태우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이 배로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은 크나큰 어려움에 부닥쳐 안절부절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는 “나다”(27절) 말씀하시며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버리신다.
배는 유혹의 맞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바다의 모든 파도,
즉 이 세상의 모든 권능 위를 걸으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26절).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라고 하였다.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갔다(29절).
베드로는 물 위를 가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자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바람이었다.
호수가 바람보다 더 위험한 데도 바람을 더 두려워했다.
물에 빠진 후에야 주님께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주님께서는 구해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하신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해주셨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물결이 그쳤다. 그들은 모두 경탄하며
“참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 하고 주님께 절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양 떼를 그에게 맡기시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배 안에 있으면서, 즉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란,
절대 넘어지지 않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
계속 새로이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쓰러질 수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며,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홍해 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바다의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또 욥기에서도 하느님을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로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현현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돛을 올리고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요,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너라!”(마태 14,29)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안전한 배에서 내려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떠받쳐주던 물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리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전한 배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달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은 들어 다시 주님이신 예수님께 향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1,26)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1,31)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풍랑이 이는 길을 떠나야 하고,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앙의 도약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 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 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 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느님 앞에서 나도 보고 너도 보는 겸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 때문에
모세의 친형제들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며 한 말이고,
이 때문에 아론과 미리암은 꾸지람을 듣고 미리암은 큰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 자체는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세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며 스쳐 가는 바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이 말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의 문제일 것입니다.
동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방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종종 동족결혼을 원하시는 것으로 구약이 얘기하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방 여인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 중에 이방 여인들이 있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선민의식이라는 것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오늘 아론과 미리암은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것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비방하기에 벌을 받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어지는 말씀이 모세의 겸손을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모세는 겸손했고 이들은 교만했기에 벌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잘못을 구실로 자기들이 모세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모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교만 때문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 채비가 되어있는데
모세의 결혼을 구실이나 빌미 삼은 것일 겁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번역이 영어 번역입니다.
“Miriam and Aaron spoke against Moses on the pretext
of the marriage he had contracted with a Cushite woman.”
우리도 교만하면 다른 사람 특히 지도자를 제칠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흠집을 찾아내어 지도자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은 지도자를 교만 때문에 비방하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반기를 든 정도가 아니라
모세를 뽑으신 하느님께 반기를 든 것입니다.
모세가 겸손했다는 것은 모세가 늘 하느님 앞에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들이 교만했다는 것은 그들은 늘 모세 앞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겨져도 하느님 앞에 있는 것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에 종종 교만합니다.
그리고 교만하기에 어떻게든지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잘못이 없으면 흠집을 내서라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도 보고 이웃도 보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인의 모델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베드로가 자신도 걷겠다며 나서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처럼 하려는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저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온전한 인간으로 하느님처럼 물 위를 걸은 최초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에 도전한다면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상을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만남이 없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엠빅뉴스’에
‘24년 동안 100만 평에 나무 2만 그루 홀로 심은 할아버지
‘미친X’이라 놀리던 마을주민이 이제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해가 뜨면 낫을 들고 산으로 사라지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마을주민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나무를 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자기 돈 주고 씨앗을 사와 온종일 나무를 심으러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려 24년을.
1960년 인도네시아 산불로 잿더미가 된 마을.
문제는 재앙 이후가 더 컸습니다. 건기에는 가뭄이 우기에는 홍수가 덮쳤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빈곤에 쪼들렸던 주민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1997년, 45세의 사디만은 향신료 열매 농사를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염소까지 모두 팔아
비싼 반야나무와 피쿠스타무 씨앗을 사 숲속에 심기 시작합니다.
주민들은 “배를 너무 굶어 정신이 나갔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심지어 주민들은 반얀나무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마을을 망칠 것이라 믿으며
묘목 근처에 가축을 풀어 사디만을 방해하였습니다.
열매가 없는 반얀나무론 팔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디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나무들이 물을 가져다줄 것이다.”
매년 수천 그루의 나무를 심은 사디만.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땅속에서 샘물이 솟았습니다.
반얀과 피쿠스는 땅속에 물을 저장해 수분을 나눠주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냇물이 흐르고 물을 쓸 수 있게 된 마을.
물이 부족해 1년에 한 번 농사를 짓던 마을은 이제 2~3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마을은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려 24년 동안 사디만은 100만 평의 땅에 2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혼자 심어 지옥의 땅을 축복의 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사디만의 생각대로 지난 10년간 마을엔 가뭄이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디만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저는 사디만입니다. 저는 예순아홉 살입니다. 저는 숲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반얀나무와 피쿠스나무로 좀 더 빽빽하게 숲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그게 분명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불가능한 일에, 이해받지 못하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말은
그것을 가능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기는 마치 진화하지 못한 동물처럼 기어 다닙니다.
그 아이가 두 발로 걸으려고 도전한다면
이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누군가를 만났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어쩌면 우리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 사디만 할아버지는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요?
그분은 자신을 “숲을 만드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누가 그렇게 정의해주었을까요? 혼자서 그런 정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분은 분명 자신을 그런 소명으로 태어나게 한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분을 분명 당신을 만나며 산 자녀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체를 영하면서도 이웃의 행복을 위해 그러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은 분명 사디만 할아버지보다 못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를 보고 걷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부모라 믿지 않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포크포크 채널 ‘나무 150억 그루 심은 아홉 살 꼬마’ 동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아홉 살 아이는
어느 날 북극곰이 온난화로 보금자리를 잃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북극곰을 사랑했던 펠릭스는 더 이상의 방관은 ‘범죄’라고 생각하고
“북극곰을 위해 나무 100만 그루를 심겠다”라고 선언합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어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펠릭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렇게 3년 뒤 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을 때
어른들은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 펠릭스는 UN에서 연설합니다. 어른들의 관심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1조 그루 나무를 심기 캠페인”을 선포합니다.
그의 연설이 어른들을 일어나게 했고 이 운동은 전 세례로 확산했습니다.
이 캠페인에 한국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고 시작했던 펠릭스의 꿈은
현재 전 세계에 150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세요. 모기 한 마리는 코뿔소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 마리의 모기는 코뿔소의 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화성을 인간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게 꿈입니다.
그리고 진짜 그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는 분명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하느님은 분명 인류를 구하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불가능이 없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펠릭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꿈을 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의심 – 우리 신앙의 현주소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 마르코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일제히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예수께서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즉시 풍랑이 가라앉은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14,22-33; 마르 6,45-52; 요한 6,15-21)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原典으로 통하는 마르코복음(6,45-52)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싸이다로 보내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동안 날이 저물어, 즉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역풍을 만나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신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쯤이었다.
이네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는 빵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부각 되고 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예수님 앞에 풍랑도 복종하는 이변(마르 4,35-41 참조)을 통해
명실공히 예수님은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저 놀라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6,16-21)은 원전의 내용을 대폭 줄였다.
빵의 기적이 있었던 그날 저녁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 북쪽 가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어둔 밤이 되었음에도 예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배는 힘들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가신다.
이에 제자들이 겁에 질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려 하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6장을 통해 ‘생명의 빵’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바,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그 가운데 삽입함으로써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구약의 하느님 현존(출애 3,14)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마태복음을 살펴보자.
이야기의 소재는 같지만, 마르코복음과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거의 같다.((22-25절)
그러나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26절) 하며 일제히 소리 지른다.
예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라고 하신 말씀은 마르코, 요한복음과 같다.
마태오복음의 독창적인 부분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28-31절)
이는 마태오가 원전에 덧붙인 것으로써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의 교회적 상황과
미래 교회의 교회론적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두들 유령을 보는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나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일단 안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 간에 펼쳐지는
기막힌 사건을 목격하면서 믿음을 가중시킨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친다.
이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하고 자신의 싱앙을 고백한다.
그 사이에 베드로는 깨달은 것이 있다.
자기도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갈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거센 바람에 시선을 두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즉각 손을 내밀어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를 구해주신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뼈에 새겨야 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마태오 복음 공동체는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공동체를 배 한 척에 비긴다면
그 배는 지금 거센 풍랑에 시달려 목적지를 잃고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서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그 앞에, 아니면 이미 배 위에 예수께서 계시지만,
그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환난과 박해의 풍랑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속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희미한 가운데 예수님의 현존을 바라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파에 밀려 신앙을 잃고 물속에 빠져든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베드로의 의심과 나약함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이다.
교회는 우주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그 구성원인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 때문에 그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을 보더라도 그분께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 교회는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할지라도
세속의 풍파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 복음은 신앙과 세속 사이에서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도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하고,
배를 불린 군중들도 집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혼자서 따로 기도하시기 위해서라고 복음에서는 얘기했지만,
이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들만의 시간을 갖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며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배로도, 혹은 다른 방법으로도 그들에게 갈 수 있으시지만,
제가 느끼기엔 제자들을 향한 사랑에
그들의 난처함과 두려움을 아시고 빨리 가시기 위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더 굳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유령이다'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냅니다.
예전에 이 복음을 읽었을 때,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보고 하신 말씀이
그를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사랑의 충고였습니다.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어려움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겁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것을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영화 「오두막」에서처럼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함께 신나게 호수 위를 걸어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으면 합니다.
[출처] 마태 14,22-36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