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성과 연군성까지의 거리는 700리
광개토태왕 때,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700리 땅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영주에서 동쪽으로 180리 떨어진 곳에 연군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신성과 연군성까지 거리가 700리입니다.
즉, 연군성까지 후연이 진격을 하였고, 병사를 보내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후연이 언제까지 그곳을 소유했을까요?
연군성과 관련된 더 이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이후 역사 진행을 통해 추론을 해야 합니다.
광개토태왕이 곧바로 요동성 지역을 확보하였고, 천안과 당산 방향으로 공격을 가합니다.
북위 역시 후연의 후방에 문제가 생겼으니 좋은 기회라 여기고 공세를 강화합니다.
결국 후연은 고구려와 북위의 협공에 의해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위성국가인 북연을 세워 여러 목적을 채우려고 합니다.
(목적 : 후연에 대한 소유적 명분 축적과 북연으로 하여금 북위를 방어토로 한다는 구상)
그런데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면서 고구려는 할 수 없이 북연을 흡수해 사실상 영토 관계를 확정짓게 됩니다.
고구려 당 3차 전쟁의 기록을 고려했을때 신성부터 연군성까지 고구려의 영토임이 확실하므로...
이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된 시기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고구려가 요동성을 차지했을 때
2. 후연이 멸망했을 때
3. 북연이 멸망했을 때
북연이 멸망한 이후 북위와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북위는 동위로 서위로 갈라지고, 동위가 북제로 바뀌었지만 고구려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다음이 수나라입니다.
즉, 해당 영역은 수나라 시대때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영주에 대한 위치 때문입니다.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조양 지역이 바로 영주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조양이 영주였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고구려 당 3차 전쟁의 기록을 보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이 진격한 곳이 바로 신성 -> 남소성 -> 목저성이기 때문입니다.
조양의 영주는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빼앗은 땅에 설치한 곳입니다.
조양에 당나라 기념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데요. 일종의 승전탑입니다.
조양지역의 영주가 고구려 멸망 후에 설치 된 것이라면 이전 영주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2) 압록강 방어선의 북쪽 전선
당나라는 연남생의 투항으로 목저성까지 진격합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은 왜 당나라가 부여성부터 공격했을까? 였습니다.
부여성을 장춘지역으로 놓고 보면
고구려 평양성을 놔두고 엉뚱한 방향으로 편도로 300km나 동진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하를 압록강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나라 군 앞에 압록강 방어선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군은 우회하여 부여성을 향합니다.
그러자 고구려도 5만의 지원군을 북쪽 부여성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림처럼 압록강이 방어선이었다면 이런 내용들은 간명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전투가 바로 설하수(薛賀水) 전투입니다.
설하수 전투는 통요 남쪽의 강에서 벌어진 전투 같은데...
강의 이름으로는 위치에 대한 단서를 찾기가 힘듭니다.
당나라가 신라를 설(薛)이라고 불렀으므로...
설하수 - 신라가 (당의 승리를) 칭송한 강
설하수 전투 이후 이적의 경로는 아래와 같이 추정이 가능합니다.
창무(대행성=국내성) -> 신민(압록책) -> 무순 (욕이성) -> 요양북쪽 (평양성)
(3) 압록강 방어선의 남부 전선
당 육군이 부여성으로 진격을 시작하자 당 수군은 압록강 하구를 공격하게 됩니다.
곽대봉, 풍사본이 진격했을 때 고구려군이 이곳을 수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북쪽 고구려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이곳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압록강 하구가 열리면서
요동에 있었던 계필하력이 평양성에 가장 먼저 도달할 수 있었으며...
신라 역시 평양으로 진격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연정토가 신라에게 투항을 한 상태이므로 남방해연의 바닷길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첫댓글 첩첩산중...
이젠 포기...
주필산전투 후에 고건무 고혜진이 당태종에게 안시성 대신 오골성으로 공격을 하라고 합니다. 그때 당 군신들이 장량의 수군이 오골성과 이틀 거리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비사성과 오골성의 거리가 이틀 이상 되는 것 같아서 새롭게 찾은 성은 바로 횡산성입니다.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을 빼앗고 횡산성까지 진출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 패강도 행군은 평양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평양을 공격한 것은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입니다. 학계에서는 패강도군과 평양도군이 함께 했다고 분석하지만 저는 공격한 지역이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동성은 그저 요동지역에 있던 성입니다. 광개토태왕때 획득하였고, 이후 당 태종에게 빼앗길때까지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요동지역을 관장하는 행정성으로는 생각한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동성은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군사적으로 요충지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철옹성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패강도행군은 공식적으로 패강인근의 군현들과 성들을 장악하는 임무를 띠고 있고 실질적으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의 평양공격을 보조 지원하는 것에 가깝지요 전략적으로 패강인근의 고구려 성들이나 군현들은 소정방 평양도행군의 배후를 위협할 고구려의 거점이기 때문에 패강도행군으로서는 이들지역을 점령하여 평양도행군의 배후안전을 도모하는게 목표이지요 고구려 원정의 큰 목표가 평양 장악에 달려 있어서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도 그런 성격에서 벗어날수 없지요
또한 패강도행군으서는 패강을 수비하여 평양 남쪽 황해도지역으로부터 오는 고구려 지원군을 차단하는게 목적이라 패강도행군은 평양점령에서 소정방 평양도행군 못지 않게 그 중요성이 작지 않은 부대입니다 평양도행군은 평양성을 공성하는데 주력하는 부대이고 패강도행군은 평양 주변의 고구려군 지원을 차단하는 임무를 띠는 부대이지요
신당서 지리지에서는 연군성은 당나라 덕종대에 와서 불려졌을뿐 그 이전에는 진안군으로 불리웠고 진안군은 연군 수착성으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로 연군성은 당대에 와서 생겨난 지명일 가능성이 높지요 구당서 지리지에 언급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요
저 이거 역사스페셜에서 재조명 하자고 하면서 현지에 취재하러 가면 안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