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I am ~”, “나는 ~이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번역에 “~이고 ~이다”로 “이다”가 두 번 번역되었는데, 원어에 “이다”가 한 번뿐이니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로 번역하기보다는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생명의 떡이다”, “세상의 빛이다”, “양들의 문이다”, “좋은 목자이다”, 오늘은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엘아자르”라는 히브리어(Eleazar)는 “신(神)”이라는 “엘”과 “돕다”라는 뜻의 “아자르”에서 나왔고 “신(神)께서 도우셨다”를 뜻합니다.
“라자로(Lazarus)”는 “엘아자르”의 축약입니다. “라자로”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는 “나사로”로 번역되었습니다. 알파벳 마지막 글자인 “z”을 “스” 발음으로 번역하였는데, 원래는 “즈” 발음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라”는 두음법칙으로써 “나”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라”입니다.
1. 라자로가 병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에 “지금 어떤 사람이 병드니 베다니부터 라자로며, 마리아와 그녀의 자매 마르따의 마을에서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44절은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라자로의 부활 장은 신약에서 가장 강력한 장 중의 하나입니다.
11장 1-3절은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병듦을 아셨다는 내용입니다. 마르따는 마리아의 언니였고 세 명 중에 가장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주를 향유에 붓고 그의 발을 머리털들에 깨끗이 닦은 그 마리아였으며 그 형제 라자로가 병에 걸렸습니다(요 11:2).
초대교회에서 “마리아”는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 “마리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매들이 예수님을 향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좋아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1:3).
그녀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제자들임을 뜻합니다.
“사랑하다”는 “좋아하다(love)”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는 “필레오”인데, 친구나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 쓰였습니다(마 10:37, 요 5:20, 11:3).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친밀한 관계들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재난들로 손상을 입기도 합니다. 라자로는 병들었는데 우리도 사는 동안 이런 난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갈 동안에 모두가 평안하게 살아가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병들거나 다치기도 하고 그러다가 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 세상일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다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생기는 슬픈 일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럽고 남편이나 아내를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인데 그러면 ‘그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그가 병들었느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 자매들은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라자로가 병든 것을 아룁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도 병들어 고통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좋아하시는데도 라자로는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도 병들게 됩니다. (찬송가 472장)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어떤 영적 지도자나 상담자가 있어야 하겠고 그런 분이 가장 절실한 때에 그가 우리의 곁을 이미 떠난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온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자도 결국 사람이니 병들게 됩니다.
‘사람’이라는 본질에는 그 몸에 병들게 될 요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삶의 일상적인 필요와 연약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도 여전히 병들고 죽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이 폐병 또는 류머티즘에서 면제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죽는 것은 사람에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일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질병을 방편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게 하시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시곤 합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내가 괴롭힘(afflict)을 받은 것이 나에게 좋으니, 당신의 법령들(statutes)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의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영어 3절 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찬송가 314장)
슬픔이 그것의 일을 하게 하라 비통과 고통(grief and pain)을 보내라
당신의 심부름꾼들은 달콤하며, 그들의 후렴(refrain)은 달콤합니다;
그들이 나와 함께 노래할 수 있을 때(When they can sing with me):
더 많이 사랑합니다, 크리스트 당신께(More love O Christ to Thee),
당신께 더 많이 사랑합니다(More love to Thee)! 더 많이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런 아픈 일을 겪을 때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2천여 년 동안 믿는 사람들은 라자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난처와 보호자(strength)가 되시며 고난 안에 매우 발견되시는 도움(very present help)이십니다(시 46:1).
우리가 고통당할 때는 이렇게 예수님께 문제를 가져가면 좋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의 문제를 아뢰는 큰 지혜를 보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난제에 관심을 두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지 않으셔도 예수님께서 아시면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좋아하시는 것에 기초해서 그녀들은 아뢰었는데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는 것을 가지고 호소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호소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들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니 하나님의 그 아들이 영화롭기 위해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미래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많은 사람은 앞으로 생길 일을 알 수 없어서 그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어느 누군들 우리의 인생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를 알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장래의 일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병이 죽음을 향하여서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응답받는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됩니다. 모든 자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에 따라 그 아들을 존경하기 위해서인데 그 아들을 존경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습니다(요 5:23).
예수님 자신이 영화롭기 위해 라자로가 병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가 병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미래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기 위해 미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격려를 위해 미래를 미리 보이십니다.
미래를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면 사실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점쟁이들이 미래를 예측하기는 하지만 미래를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전달된 때에 라자로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의 자매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늦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너무 늦어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인정입니다. 라자로가 살아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합니다. 그럼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믿음으로 살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품이 변화되고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크리스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289장)
예수님께서는 마르따와 그 자매와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요 11:5).
라자로의 자매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좋아하셨다고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냥 그저 좋아하신 것이 아니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가 들으신 때에 확실히 그가 계신 장소 안에 이틀을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사랑하셨음에도 바로 출발하지 아니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계신 바 장소 안에 두 날을 머무르셨습니다(요 11:6).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음에도 이틀을 머무르시며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있게 그냥 두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불평하면 안 됩니다. 비록 응답이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병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왜 늦으시는가’에 답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늦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다른 일에 열중하시다가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께서는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우리의 생각보다 늦게 오십니다. 응답이 늦어도 하나님을 믿고 계속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후에 그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그 유대로 다시 인도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7).
그에게 제자들이 말하기를 “그 유대인들이 당신을 돌로 쳤기에 찾았고 다시 당신은 거기에 떠나가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요 11:8).
이것들을 예수님께서 대답하셨고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잤으나 내가 가니 그를 깨웠기 위해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11).
그 제자들이 대답하였기를 “잠자면 구원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에 관하여 “잠잤노라”라고 말씀하셨으나, 저 사람들은 잠의 쉬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라자로가 죽었고.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내가 기뻐하나니 너희가 믿었기 위해서나 우리가 그를 향하여 떠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14-15).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믿음이 자라게 되기 원하신 것입니다. 시련을 겪지 아니한 믿음은 언제나 그 크기가 작습니다. 고난의 풍파 속에서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더 크게 자라고 우리의 영혼은 더 강하게 됩니다.
만일 라자로가 병든 것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즉시 오셔서 고치셨다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상황 속에 함께 있지 않으신 것을 기뻐하셨는데, 우리가 믿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약함에 놓으십니다(요 11:1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우리를 고난 안에 놓으십니다. 그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 응답이 늦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Andreas J.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BECNT 성경주석, 신지철·전광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42.
2) Gerhard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시리즈, 송다니엘 옮김 (서울: 토브북스, 2021), 478.
3)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79.
4)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81.
5)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82.
6)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서문강 옮김 (파주: 쉴만한 물가, 2017), 242.
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3.
8) C. H.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서문강 옮김 (서울: 도서출판 로고스, 1999), 27-28.
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3.
1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4.
11)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4.
12)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4.
13)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4.
1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4.
1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5.
1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6.
1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7.
1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48.
1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4.
2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4.
21)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83.
22)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4.
23)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405.
2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5.
2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6.
2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7.
2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7.
2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7.
2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58.
3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64-265.
3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36-37.
32)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266- 267.
3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4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