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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민수 13,1-2.25―14,1.26-30.34-35
복 음 : 마태 15,21-28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천교구 성직자 사진첩을 보다가 한 선배 신부님의 사진에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섬세하시고 또 애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야 한다면서 좋은 찻잔에 정성을 다해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셨지요.
만약 차를 담을 찻잔이 없으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 잔이면 어떠냐고 할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음식 역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겨 있어야 맛이 나지
아무 그릇에 대충 담으면 그 음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늘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그 음식에 맞게 멋진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에 맞게 접시가 꾸며질 때,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지고 실제로 음식 맛도 훌륭해질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접시에 우리 마음을 대입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주님을 담는 각자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습에 따라
주님의 영광이 더 환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고 있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와 모양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어느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청을 곧바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면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한다는 것,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겸손의 마음이 가나안 여인이 얻고자 했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담는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멋진 마음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가 원하는 딸의 치유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그릇이 될 때, 가장 멋진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 모임에서
‘Mission Statement(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들으면서 ‘신앙 강좌 기획팀’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풋볼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신앙보다는 풋볼이 더 좋았던 형제님이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는 30분도 힘들었는데, 풋볼 이야기는 5시간을 해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완전히 바닥을 쳤고, 건강하던 몸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이 모두 신앙에 관련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형제님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가시못이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의 성구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음에 품은 성구는 필립비서의 내용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풋볼도, 재산도, 건강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가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9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쁘게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형제님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아도 이해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걱정하였습니다.
한 자매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으로 직장 생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한 수도회의 영성을 알게 되었고, 그 영성에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도회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인을 보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과 함께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있는 신앙인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꿈과 열정은 좋았지만, 평신도들만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도신부님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에 저를 알게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이 정한 성구는 고린토후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평화신문과 함께하면서 주변의 오해도 풀렸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회계 업무가 늘어났는데 하느님께서는 회계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군대에 비하면 절대로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을 아시고 40년을 더 광야에서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찬란한 생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에디트 슈타인 혹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로 불리는 수녀님의(1891~1942) 기념일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그녀의 생애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철학자, 여성운동가, 가르멜회 수녀, 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대륙의 수호 성녀.
그녀의 생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그녀가 연출한 장엄한 삶의 연극은 총 4막으로 구성됩니다.
제1막은 에디트 슈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 년에 걸친 세월입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큰 결실을 맺던 날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철학에 깊이 몰입했으며,
인간 됨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립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결과 그녀는 당대 뛰어난 여성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제2막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됩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성녀의 넘치는 매력과 영성에 흠뻑 빠진 에디트 슈타인은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랜 세월 찾아왔던 참 진리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음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가톨릭 신자이자 교사로서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제3막은 또 다른 10여 년간에 걸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로서의 삶입니다.
탁월한 지적 능력과 열정을 눈여겨본 주변 사람들은
에디트 슈타인이 학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 나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빛나는 업적을 홀연히 내려두고
쾰른의 한 가르멜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늦깎이 지원자로서 그녀의 초창기 수도 생활은 크나큰 자기 낮춤과 겸손의 덕을 요구했습니다.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동기 수녀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오랜 세월 축적蓄積해 온 학문적 성취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에디트 슈타인 인생의 절정인 제4막은 나치에 의해 체포된 이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신분을 감추고 은신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언니와 함께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져 소리소문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영성이 긴 세월을 건너와서도 찬란히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평생토록 지니고 살았던 진리를 향한 강렬한 역동성이요, 적극성과 개방성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한평생은 끊임없이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성숙시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보다 가치 있는 삶, 보다 해방되고 성숙한 삶,
보다 큰 진리와 자유를 찾아 떠난 부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유대교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 신자로,
그리스도 신자에서 가르멜 수도자로, 가르멜 수도자에서 사랑의 순교자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디트 슈타인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가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신다.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한다.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착잡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타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이 침묵할 때 바로 그 순간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는 순간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가 꿇어 엎드려 절하게 하소서!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당신의 침묵 안에서 제 겸손과 끈기와 믿음을 길러내소서!
침묵 속에서 오로지 당신 자비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그러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때 빵도 받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상외로 가나안 여인에게 불친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도 없나?’란 생각이 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대로 됩니다. 믿음도 없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나를 믿음이 하느님을 믿지 않음이고 하느님을 믿음이 나를 믿지 않음입니다.
‘포크포크’엔 ‘모두가 거부한 아이 입양한 여성. 20년 뒤 놀라운 운명 마주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잉게보르는 수년간 125명의 위탁 아동을 보살펴왔습니다.
조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의 생모는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아들이 잉게보르에게 입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흑인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게보르와 조던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친 모자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잉게보르는 어느 날부턴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의사는 너무 늦어서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신장을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잉게보르가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으려는 순간 조던이 어머니 몰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조던이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식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끝까지 주장하였고 의사들이 맞춰본 결과
놀랍게도 조던의 신장은 어머니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던의 마음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이제 제가 돌려드릴 때가 됐어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더 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생명을 무시하며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자수성가한 부자가 걸어 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10원이 있으면 주울까요, 줍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읽고 본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돈을 줍습니다.
돈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그 작은 것을 대하는 자세가 큰 것을 대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 같이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도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한 장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합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라 자기 새끼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회사 앞에 있는 거지에게 조금 큰돈을 주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잔돈을 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총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은총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큰 은총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받은 것에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혹시 작은 은총을 무시해버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도 더 많은 신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다 챙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 지역 요양원을 조사하여 신자들을 찾아내어
하루 따로 시간을 내서 봉성체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집에서 봉성체 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고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분들 먼저 챙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은총을 청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작은 것들은 무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부스러기부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를 잘 챙기는 우리를 보며 주님께서 큰 빵 덩어리 하나를 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도 받게 됩니다.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교회의 일원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생활을 몸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는
노예 생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리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로마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전역에서 판을 치며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해 갔을 때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자유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빨리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제국을 무찔러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고
메시아 친히 자기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재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 군인들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왕으로 군림하러 오지 않고,
오히려 봉사하러 온 종이다.라고 하신다.(마태 20,28; 마르 10,45)
모세의 율법에만 얽매여 형식만을 중요시하던 백성의 지도자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그분을 참된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마다 꼬투리를 잡고 올무를 걸어 씌우고 모함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고발하여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만다.
이 모든것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께서 오늘은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멀리 지중해 연안의 이방인들의 도시인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사는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다.
마귀가 들린 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인의 도시 구석에 사는
가엾고 불쌍한, 남편도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갖지 못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것으로 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부자다.
예수를 알아보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주인공이다.
예수께 대한 그녀의 태도는 選民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 여인의 전 생애를 건 마지막 희망이기에 이는 참된 믿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예수께서
분명히 구해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여인의 계속적인 애달픈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의 차가운 모습을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분은 좀 더 지체하시면서 그 여인의 마음과 믿음을 살피신다.
자꾸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는 여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께 언질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하며 맞장구를 치신다.
예수의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사뭇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도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시는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예수께 다가와 끓어 엎드려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차가운 말씀을 던지신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나누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부정적인 이 말씀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바로 이어지는 여인의 장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인의 믿음에 찬 항구한 간청이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강한 믿음인가.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장한 믿음에 탄복한 예수는
그녀의 소원대로 딸을 치유해 주신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세례를 받고 미사 때마다 그분의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바로 새 이스라엘 백성이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른다.
오늘부터 이 교회에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열렬히 사랑 –본 기도 중
김 메리 그레이스 수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가나안 부인의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예수님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씀에 가나안 부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대답을 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가나안 부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겸손되이 낮출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예수님 앞에 바짝 엎드릴 수 있게 되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거품을 다 빼고 온전히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로 인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믿을 수 있게 되기를 함께 청해본다.
[출처] 마태 15,21-28 연중 제18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