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진리는 역시 ‘그래도 불교’라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수행하라>
- 화엄경 「십지품」과 10바라밀 -
화엄경의 구체적인 경명은 ‘대방광불화엄경’으로 권수에 따라 40화엄, 60화엄, 80화엄으로 구별됩니다. 40화엄은 화엄경에서 「입법계품」만 떼어 반야삼장이 번역하였는데, 가장 후대에 만들어진 경입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53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마지막 보현보살에게 열가지 수행을 서원하고, 그 공덕과 실천을 설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도 여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는 40 화엄은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이기도 합니다.
60화엄은 동진 때 불타발타라(359-429)가 번역하였는데, 총 34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가지 화엄경본 중 가장 먼저 성립된 60화엄은 「십지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살 수행의 계위階位 중 마지막 10단계의 수행에 대해 대단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요. 1~2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십지품」은 단독으로 『십지경』이라고 부릅니다.
80화엄은 40화엄과 60화엄의 내용을 다 포함한 것으로 39품으로 이루어진 ‘완성된’ 방대한 통상의 화엄경을 일컫는데, 당나라 때 우전국 삼장 실차난타(652-710)가 번역했습니다.
<41. 건너간 이라야 건네줄 수 있으리>
- 6바라밀과 10바라밀
먼저 보살의 실천 덕목인 6바라밀六波羅蜜과 10바라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라밀은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세계입니다. 이런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님이 계시는 안락의 세계, 해탈의 세계로 이르게 하는 행行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6바라밀(보시,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에 방편方便·원願·력力·지智바라밀을 더하면 10바라밀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방편바라밀입니다. 즉,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이 방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여야 방편바라밀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전제 조건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면 방편바라밀이나 원願바라밀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 이루어지는 역力바라밀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방편바라밀을 쓰려고 해도 자기가 보시나 지계를 통해서 수행을 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8정도의 정견과 바라밀행의 보시처럼 첫 번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나머지가 다 뒤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는 8정도와 6바라밀만 면밀히 제대로 공부하면 된다고 봅니다. 제가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하는 이유도 실은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운 교리는 몰라도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확고하게 체득해서 해解와 행行이 온전히 일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떠올라서 가르침대로 대응하게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불교 정신으로 꽉 차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업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사찰에서 벌이는 이벤트와도 같은 어떤 행사에 참가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業은 물에 가라앉는 돌을 뜨게 할 수는 없듯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뜻입니다. 고통스럽고 원망스럽지만 참회를 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 가운데 몇 퍼센트나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을 하고 있겠습니까?
불자들은 기복적인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신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실지로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요즘 불공을 하면서 신도님들의 요청에 상당히 당혹스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술을 따라주는 술집을 하는 신도인데 장사가 너무 안 된다고 장사가 잘 되게 부처님께 축원을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또 장의사를 하는 신도가 장사가 안되서 죽겠다고 하면서 불공을 올려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요청을 받고 제가 “사람들이 계속 술과 여자를 찾아 술장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세상 사람들 많이 죽어서 장의사 신도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는 없잖습니까. 부처님께서 이런 기도나 들어 주시려고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소원 성취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과 과정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원 성취는 기도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별도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암묵적으로 ‘이 정도 보시를 하면 아마도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따끔하게 경책하는 스님이 거의 없다는 게 우리 불교계의 답답한 현실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모두 알아서 그에게 맞춤으로 법문을 해 주십니다. 경전에 의하면, 축생·인간·천상이고 할 것 없이 부처님이 말씀을 하시면 모두가 법문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원음圓音이라고도 하고 장광설長廣舌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에 계합이 될 수 있는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합니다.
불교를 올바르게 믿으면 신장님들이 기특하게 여겨서 돈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절에 열심히 다니도록 돕고, 또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돈이 없어서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여기면 돈 문제가 해결되고, 자식이 속 썩여서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자식이 잘 되게 되는 그런 과정이 바로 복을 비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목적이 선하고 명백할수록 기복의 과정도 현실화되기가 수월해지고 그래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가 이렇게 되어야 순리인데,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무턱대고 “당신 자식 대학 붙게 하려면 100일기도를 해야 해.”라고 강요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한테 빌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처님한테 빌테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수험생들이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과 하나님이 힘겨루기 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가 그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1500여년 동안을 한 시대의 종교적 스승이라고 추앙받던 선사禪師들은 하나같이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를 외쳤습니다. 사실 그 말은 오늘날 서울역에 자리 잡고 있는 노숙자들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길에서 사는 도인으로 철저히 그 말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수행자들은 어떻습니까? 뜨끈뜨끈한 선방에 앉아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생사를 걸고 있다고 생각들은 하겠지만 아닌건 아닌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불교의 미래를 생각해서 여태껏 우려먹었던 틀을 전부 바꿔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에 딱 떨어졌을 때, 다급한 상황에 맞닥뜨렸을때 그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가에서 진짜 수행이 판가름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를 믿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게 안되면 『화엄경』에 있는 구절이고 『법화경』에 있는 구절이고 간에 말해 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제가 늘 불자들에게 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불교 경전이 성전聖典으로서 신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늘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불교라는 배와 타고 가는 배의 주변 상황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불교를 믿으려면 지금 불교가 어떤 위치에 와 있고, 어떤 상황에 있고, 이런 것을 알아야 좌표가 설정이 되고 자신이 어디쯤 있다는 것을 알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말씀으로 비유를 하자면, 뱀을 잡을 때 모가지를 잡아야 물리질 않습니다. 만일 등이나 꼬리를 잡으면 오히려 그 뱀한테 물리게 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절이든 교회든 종교 활동을 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청렴하고 정신세계가 월등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종교를 통해서 성인이 몇 명이나 나왔습니까? 자신의 종교 교리를 따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 예수님 덕이나 보고 이름 팔아먹는 사람들이 수십억 수백억 더 많고 성자는 몇 안됩니다. 지금 종교의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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