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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0일 목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제1독서 : 2코린 9,6ㄴ-10
복 음 : 요한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교에 입학하고 군대 포함해서 거의 10년의 시간을 보내면 사제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의 대학원 시절인 1~2년만 잘 보내면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나갈 거면 조금 일찍 결정하면 좋았을 것을,
그 오랜 시간을 그냥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한두 해도 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두 해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 이상 되시는 분에게 여쭤보십시오.
자기와 한두 살 차이 나는 것을 크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라는 표현도 쓰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기에
세상 속의 한두 살은 대단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못되었다고 해서 시간 낭비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도 쓸모없는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을 때가 가장 빠른 선택이 될 수 있지요.
‘가장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의 빠름에 한 것 없다면서 아쉬워할 것도 없고, 또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쉽고 후회할 일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늘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강조하셨지요.
어떤 결정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결정입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 뜻을 따를 것을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아직은 할 수 없다면서 이유를 나열합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남들도 안 하니까, 나만 하면 손해니까,
남들로부터 잘난척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결국 끝까지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 노력은 언제 해야 할까요? 언젠가 할 것이라면서 뒤로 미루는 노력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하며, 지금 당장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세속적인 물질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만족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직도 멀었다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매주 평화신문을 읽습니다. 1면부터 20면까지 꼼꼼히 읽습니다.
이유는 제가 신문사를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읽어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으로 신문을 읽을 때는 귀찮기도 했고, 시간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으면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신문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그 지면들에는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글들이 교회의 보물이라 생각하니 신문을 읽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며칠 여행을 갈 때면 꼭 신문을 챙겨서 갔습니다.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으니 시간도 금세 지나갔습니다.
공부도 그랬습니다.
성격상 미리 준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늘 먼저 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과제가 있으면 동창 중에서 가장 먼저 하곤 했습니다.
해야 하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과제는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제게 동기부여가 한 번 있었습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했었고, 원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공부는 의무가 아니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선생님들이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수업 시간이 졸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20문제 중에 아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나뭇잎의 운명이듯이 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유혹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했던 추억과 기억은 제게는 문신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논문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논문주제를 ‘설교’로 정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면 꼭 필요한 논문이라 생각하니 준비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말처럼
즐겁게 하니 논문도 동창 중에 가장 먼저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 못해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주변에서 신앙의 기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대부, 대모를 서는 것이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자, 대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대자, 대녀의 축일을 챙겨주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런 대부, 대모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대자와 대녀들은 신앙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지난번 ‘신앙 강좌 기획팀’의 모임도 그랬습니다.
그분들은 비행기가 연착되었어도, 길이 막혀 12시간 넘게 운전을 하였어도 전혀 짜증 내지 않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미사가 없는 날은 미사가 있는 미국 성당으로 가서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미사는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러니 멀어도, 언어가 달라도 기쁘게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들만 중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나눔도, 봉사도, 희생도 기쁘게 하면 중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죽어야만 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여름 캠프 성수기를 맞아 저희 피정 센터도 대목입니다.
한 본당 초중고 학생들이 신나게 젊음을 발산하고 떠나자 마다,
또 다른 사회복지시설 청소년들이 들어와 행복하게 지내는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다 흐뭇해집니다.
아이들을 위해 불볕더위에 장작불을 피우고, 엄청난 양의 삼겹살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소나무 장작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에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지만,
맛있다. 하면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더위가 더위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연세가 만만치 않은데도 아직도 매일 같이 이런저런 일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가 누군데, 하고, 어깨에 딱 힘주고 살아간다면, 청소며 빨래며, 불피우는 일이며,
고기 굽는 일이 엄청난 고통이요,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낮추고, 나를 죽이고, 그 자리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되살아나시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작은 힘듦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지침을 한 가지 과제로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복음 12장 24~26절)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죽으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덧없이 짧은 이 세상은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정녕 중요하고 큰 것을 얻으려면, 스쳐 나가는 작은 것은 아쉽지만 떠나보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밀알을 죽게 하는 힘은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이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요,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이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기보다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거나,
수도자가 집과 가족을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따름에도 진정한 섬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 속에서 죽는 장엄한 순교의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존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독서와 복음은 모두 씨앗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밀알 하나와 같은 존재였고,
씨앗을 많이 뿌린 사람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씨앗에 비유하여 얘기하는데
복음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바로 밀알 그러니까 씨앗이었다는 얘기인 데 비해
독서는 씨를 많이 뿌린 곧 선행 실천을 많이 한 분이 라우렌시오 성인이라고
얘기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씨앗이든 자기 선행이 씨앗이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공통의 목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씨앗은
씨앗이 아니거나 불량 씨앗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을 묵상하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순교하였으니 진정 밀알 하나였고,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니
씨앗을 많이 뿌린 분이었고 그래서 많은 열매를 거둔,
다시 말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하고 확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도 되는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저를 보고 수도원 들어온 사람 하나도 없고,
제 조카들 가운데도 수도자나 재속 프란치스칸이 된 놈이 없으며,
저를 보고 세례받았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위하는 차원일지 모르지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저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성인과 비교하여 왜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사랑 차이겠지요.
죽도록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적당히 사랑하는 차이,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과 일부를 내어주는 사랑의 차이,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과 바라는 사랑의 차이,
섬기는 사랑과 시혜적인 사랑의 차이, 뭐 이런 거지요.
알면 됐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데
다 욕심부리지 않고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가져오라는 황제의 말에 불순종하여
빨갛게 달궈진 석쇠에 순교하였습니다. 황제를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자유로운 시대에는 정말 아무도 섬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섬길 것, 당신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섬기는 대상이 사는 곳에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처럼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내 목숨을 내어주지 않는데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위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여자를 위해 에너지를 씁니다.
에너지를 쓴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는 대상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끔 맹금류들이 폭포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빙하에 얼어붙은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다가
그만 그 얼음에 붙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런 맹금류는 자신의 에너지를 먹는 것을 위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인간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어쩌면 대부분이 그런 우상을 섬깁니다.
누구든 자신이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생명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섬기는 것에 내가 먹히고 만다는 것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시골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기린과 코뿔소를 포함하여
20여 종의 이국적인 동물을 키우는 농부인 마리우스 엘스(Marius Els)는
친구와 가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완용 하마 험프리를 마치 말처럼 타고 다니곤 했습니다.
험프리가 가끔 마리우스가 자신의 등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표현을 했음에도
그는 그냥 장난을 치는 것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짐승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를 먹이고 이빨을 닦아주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마음속으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신을 하마의 입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마는 매년 약 500명의 인간을 죽이는 맹수입니다.
이 수치는 사자, 코끼리, 표범, 코뿔소, 버팔로가 인간을 죽이는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험프리는 아들 같은 존재다. 내가 부르면 달려온다. 또한 나는 그와 함께 수영할 수 있다.
험프리는 내가 등에 올라타도록 허락했고 나는 그를 말처럼 탄다.
나는 험프리와 함께 수영하는 게 좋다.
위협적인 건 알지만, 난 마음속으로 험프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괜찮다.”
이 인터뷰를 마친 얼마 뒤 마리우스는 험프리에게 공격당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얼마의 사체만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이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이 우리를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의 뱃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것들의 운명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라면 나도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것에게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위하여’ 사는 대상, 섬기는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 나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면 그 대상은 나에게 먹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먹히는 그 대상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자기를 봉헌하고 그 대상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하나의 선택입니다.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의 바탕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투자입니다. 투자는 불확실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투자해야만 한다면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이언은 딸 미스티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란 딸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딸은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이런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를 내밉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남자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라이언은 약간 실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라고 먼저 불러주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타워즈 공주처럼 머리를 묶어주셨고 지금까지 평생 저를 키워주셨죠.
그리고 5학년 때는 사인을 위조하다 걸려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처음으로 함께 록 콘서트에도 가고요.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함께 해왔고 그게 바로 아빠인 셈이죠.
아빠 없는 제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 아빠를 아빠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음, 그리고 이 편지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그리고 울어도 괜찮아요, 아빠…. 저를 정식 딸로 받아주세요.”
라이언은 울면서 미스티를 안아줍니다.
“내가 이날만 기다렸단다.”
[출처: ‘수십 년만에 의붓딸에게 '입양신청서' 받은 새아빠의 반응’, 유튜브 ‘포크포크’]
나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나요. 그 대상이 내가 먹히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도 나에게 상을 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생명을 쏟는 그 대상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 그 대상도 나에게 자녀로 받아달라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서로 먹히는 관계가 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둘은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먹힙시다.
그러면 그 대상도 영원한 생명으로 나에게 양식이 되어 먹혀주실 것입니다.
결국 섬김은 먹힘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과 생명의 逆說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258년 8월 10일 순교한
로마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성인의 천국 입성을 경축하는 날이다.
라우렌시오 성인만큼 복잡한 名銜을 가진 성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스페인을 비롯하여
로마, 뉘른베르크, 부퍼탈 등 수많은 도시들과
가난한 사람, 과부, 청소부, 세탁인, 요리사, 유리세공업자, 양조주, 소방수, 도서사서,
문헌 수집가, 학생, 대학생, 화상환 자, 눈병 환자, 좌골 신경통 환자, 피부병 환자,
페스트, 열병환자, 연옥 불로 고통받는 영혼 등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330년경 로마에 라우렌시오 성당이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성당이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시오는 성 식스토 2세 교황(257-258) 시절에
로마교회의 재정과 사회복지를 담당하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일차적으로 교황이 감옥에 갇힌다.
그때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교황과 함께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3일 후에 그도 자기를 따라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제국에 헌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교회가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 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고,
너희의 神은 돈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십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부제는 곧바로 달려가
교황의 명대로 로마 교회의 모든 재산을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일 후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하고 간단히 말했다.
화가 치민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성인은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다.
형리들 중 하나가 성인의 믿음과 인내심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성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20)과 최후의 만찬(13-17장) 사이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생명의 逆說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역설이란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 인간에겐 아주 생소한 이론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집착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목숨과 건강을 부지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주어야 산다는 역설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밀알의 모범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24절)
밀알 하나가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밀알이 죽는 이유가 많은 열매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의 시간이
곧 예수께는 영광과 새 생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의 역설은 곧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추종 법칙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와 준비를 하였을 때,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을 것이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있게 될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간절한 원의가 하늘에 가 닿다.
김 빈첸시아 수녀
팔색조가 부리에 지렁이를 잔뜩 물고 날아가는 장면을 따라가니
둥지 안에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장해서 이소할 때까지 먹이를 나르고 품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산다는 것은, ‘나눔’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눔은 특별한 선행이라기보다
피조물이 살아가는 방식이자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눔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진정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또한 그러한 공간에 생명력이 있을지...
모든 피조물은 태어나서 부모와 이웃의 도움 없이 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딛고 살아가는 이 지구의 생태계 안에서도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 생명을 위한 모든 것을 얻어 살아갑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도, 바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덕분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자녀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우리가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본받고 따라가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때론 목숨을 걸고 세상과 이웃을 위해 살아간
수많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요한 12,24-26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