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기 2558년 갑오년(甲午年) 정월 성지순례
서울 강남 수도산 봉은사(修道山 奉恩寺)를 찾아서 ①
-봉은사입구에서 진여문(眞如門)까지-
우리는 지난 2월 23일 오후 1시 25분경 불광사를 물러나 봉은사로 향하였습니다. 제 생각 에는 지하철 2호선 잠실역으로 가서 삼성역에서 내린 다음 봉은사로 가려 했는데, 미소님 께서 사전 조사를 하여 불광사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 다. 하여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삼성역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는 것이었습 니다. 그래서 우리는 1시 35분에 시내버스를 타고 7~8개 정류장을 지나 삼성역에 도착 했는데 시계를 보니 1시 50분이었습니다. 삼성역에서부터 걸어 2시 5분, 봉은사에 도착 했습니다.
봉은사 안내판 -미소님 사진-
봉은사 안내도
1. 봉은서점 2. 산중다원 3. 응향각 4. 아름다운 가게 5. 진여문 6. 외국인 안내소 7. 부도전 8. 해수관음상 9. 종루 10. 법왕루 11. 휴게소 12. 선불당 13. 삼층석탑 14. 심검당 15. 대웅전 16. 제사공양간 17. 신도홀 18. 지장전 19. 영산전 20. 북극보전 21. 영각 22. 운허당 23. 미륵전 24. 미륵대불 25. 비각 26. 판전 27. 봉은선원 28. 다래헌 29. 종각 30. 보우당 31. 공양간. 32. 해우소. 33. 주차장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大韓佛敎曹溪宗 奉恩寺)
봉은사에 왔으니 이제 봉은사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입니다.
봉은사는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로 531(73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의 말사입니다. 봉은사의 역사는 <전통사찰 총서> 『봉은사편』을 출처로 간략히 정리 해 보았습니다.
우선 봉은사의 창건시기에 대하여 봉은사의 안내자료나 일반적인 봉은사 관련 사료에는 모두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설을 따르고 있다 합니다.
봉은사 홈피에는 다음과 같이 올려져 있습니다.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 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며 보현행을 닦았던 신라 원성왕대의 고승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38 『(잡지(雜誌)』 제7에는 봉은사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이른바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곱 사찰은 사천왕사ㆍ봉선사ㆍ감은사ㆍ봉덕사ㆍ영모사ㆍ영흥사 그리고 봉은사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하는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였다. 또한 일반 행정관청과는 다른 특수 관청으로서 그 관원 조직도 일반적인 관직 이름과 다른 호칭의 관 원들이 왕실 사원의 행정과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당시에 성전이 설치될 정도의 사찰은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다. 실제 봉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라 진지왕의 추복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이미 혜공왕대로부터 사찰 조성 을 시작하여 선덕왕을 거쳐 원성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 등이 각종 자료에 의해 확 인되고 있다.』
봉은사 일주문(一柱門)
《삼국사기》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원성왕(元聖王)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 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그런데《삼국사기》에 있는 봉은사가 현재의 봉은사인가 하는 것은 단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라 때의 봉은사는 신라의 7개 성전사원(成典寺院) 가운데 하나로 경 주지역 어딘가에 진지왕(眞智王. 576~579 재위)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사찰이기 때문입 니다. 7개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은 사천왕사(四天王寺)ㆍ봉성사(奉聖寺)ㆍ감은사(感恩寺) ㆍ봉덕사(奉德寺)ㆍ봉은사(奉恩寺)ㆍ영묘사(靈妙寺)ㆍ영흥사(永興寺)를 말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현재의 봉은사는 신라의 봉은사와는 동명이처(同名異處)가 아닌가 생각됩 니다. 신라 경주에 있는 진지왕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데, 특별한 근거도 없이 뚝 떨어진 한강 근처에 세웠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
봉은사측은 《삼국사기》기록을 근거로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발단은 봉은사 경내에 세워 진 사적비(寺蹟碑)가 있는데, 1932년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권상로(權相老) 스님이 지은 것 인데, 여기에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초대주지로 부임했다는 내용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산 봉은사 수선종(修道山 奉恩寺 首禪宗)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峰) 선생글씨
그러면 봉은사 창건은 언제로 보아야 할까?
『견성사(見性寺)를 지금 유자광(柳子光)과 박안성(朴安性)의 말을 들어 옮겨 지으시려고 하시는데, 유자광 등은 대비(大妃)의 뜻을 받들어 말한 것이오니 만일 철거하지 못한다면 예전대로 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사사(寺社)에서 세(稅)를 거둔 것과 세납 한 소금을 옮겨 주라.』
이들 자료는 각각 연산군 4년(1498)과 연산군 5년(1498)에 해당하므로 견성사가 봉은사로 개창된 때는 1498~1499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것으로 견성사를 이건하려는 왕의 의도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견성사가 중창된 후 봉은사(奉恩寺)로 사찰이름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 입니다. 이것이 봉은사의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일주문 옆 응향각. 아름다운가게도 살짝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책으로 불교의 위세가 크게 약화된 때입니다. 세종 때는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정리되었고, 그나마 연산군 때는 양종제마저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首寺刹)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은 명종대 문정왕후와 허응 당(虛應堂) 보우(普雨) 스님의 활동에서부터입니다. 명종 3년(1548)에 보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문정왕후는 명종 5년(1550)에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교양종의 사찰로 지정하 여 선교 양종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또한 명종 7년(1552)에 봉은사에서 선종 승과고시를 시행하여 400여명이 응시하였다고 합니다. 이 승과고시가 시행되자 명종 10년(1555) 초시 에 청허휴정(淸虛休靜) 선사가 대선(大選)에 합격하였고, 그해 휴정선사가 선종판사(禪宗 判事)가 되어 절의 주지를 맡았으며, 명종 16년(1561)에는 사명 유정(四溟惟政) 대사가 선 과(禪科)에 합격하였습니다. 명종 15년(1560)에 청평사에 주석하던 보우 스님이 다시 돌 아와 주지를 맡았고, 명종 17년(1562)에는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봉은사를 현재의 위치 인 수도산에 사찰을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명종 20년(1565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 보우스님은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고 제주목사 변협(卞協)에 의해 죽임을 당해 입적한 후 불교는 다시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가 폐지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래도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의 위치는 유지되었습 니다.
아름다운 가게와 행복한 나눔 여여
1902년년과 1911년의 사찰령 제정과정에서 계속 본사의 위치를 유지해 일제시대에는 서 울과 경기 일원의 80사찰을 관장하던 본사(本寺)였습니다.
1912년에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본래 오대산에서 강학에 열중하였는데 주지로 취임하자 사원의 토지를 20만평 확보하고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였습니다. 스님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홍수가 일 어 가옥과 사람이 떠내려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수백명의 인명을 구해내 생불로 추앙을 받 았습니다.
광복 후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세를 일신하여 봉은사는 수행과 포교 중심의 사찰 운영으로 수많은 불자의 귀의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총무원 직영사찰로 선정되었습 니다.
성보문화재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 명부전, 북극보전, 영각, 판전 등 무수한 문화재 가 많습니다. 특히 대웅전의 현판과 판전의 글씨는 추사 선생의 글씨로 이름 높습니다.
행복한 나눔 여여 간판이 아름답네요.
이곳은 지역특산물, 지역음료, 지역홍보물 등을 구매하실 수 있는 곳이라 합니다.
응향각 앞에서 대각화님
먼 길 달려오신 대각화님, 지난 송년회 때에 이어 다시 뵈니 더욱 반갑고 즐겁습니다.
즐거운 만남. 미소님, 대각화님, 황심행님, 화광님.
외손을 보시느라 두문불출하시는 황심행님
요즘 황혼육아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에 딱 맞는 주인공이시죠. 천 리도 마다 않고 불철주야 두문불출 황혼육아의 전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직 황혼은 아니시지만 수척하 신 모습을 뵈니 이제는 자기 자신에만 보신하여 건강을 유지해 가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향기로운 불교 현수막을 2개나 제작해 오신 화광님
저에게 법사복도 선물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유용하게 활용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으신 청안님
앞으로 더욱 안전에 주의하시고 기도 많이 하세요.
무표정에서 벗어납시다. ㅎㅎㅎ
웃으니까 분위기가 좋습니다.
좌로부터 백우, 도안님, 묘법님, 덕명님, 청안님, 염화님.
묘법님, 아름다운 부부 염화ㆍ미소님 내외 멋지게 잘 찍어 주세요.
저도 잘 찍어 보려 했는데 잘 안 나와 차마 올릴 수 없어 못 올렸네요. ^^ 기대합니다.
봉은사순례 기념
일주문 앞의 허응당 보우대사상(虛應堂 普雨大師像)
봉은사에서 보우스님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요. 그래서 보우스님에 대하여 소개해 볼까 합니다. 봉은사 홈피에서 옮겨 보았습니다.
보우대사(普雨大師) (1509∼1565)
사대부들과 교류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마하연사, 표훈사 등 금강산 일대에서 20여 년 간 수행하다 세상을 나와 호남지역을 유람하다 곳곳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폐불과 법난을 몸소 겪고 양주 회암사로 돌아와 몸져누웠다. 병고를 떨치고 일어날 즈음 당시 봉은사의 명곡조사가 노환으로 물러나게 되자 문정대비는 보우대사를 천거 봉은사에 주석케 하였 다.
봉은사로 하고 이곳에서 중흥불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승려 5000여명 도첩을 주어 승려 의 신분을 보장하였고, 선교양종을 부활하였으며, 승과고시를 실시함으로써 불교 인재발 굴의 장을 마련, 서산ㆍ사명과 같은 당대의 고승을 배출할 수 있었다.
론」을 주장하였으며, 유불선(孺佛仙) 삼교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사상은 후학들이 편찬한 허응당 문집에 잘 나타나 있다.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長安寺) ㆍ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 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 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 나 여러 가지 문헌을 종합해 보면,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 (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48년(명종 3) 12월 봉은사(奉恩寺)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 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 (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 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에는 방(榜)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 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 와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허응당 보우대사상(虛應堂 普雨大師像) 안내문
『이때부터 문정대비ㆍ보우와 유생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이후 문정대비 로 하여금 선교 (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선교 양종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 계(啓)나 되었다. 그러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 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 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 (論妖僧普 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 (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 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3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 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보우대사에 대한 글을 읽어 보시는 법우님들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보호유리창이 있어 반사되어 사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봉은사 목 사천왕상(奉恩寺 木四天王像)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 1746년(영조 22년)
『이 사천왕상의 재질은 나무인데 원래 봉은사 천왕문(天王門)에 모셨던 것을 지금의 진여 문(眞如門)으로 옮겼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면서 동서남북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고 알려진 신 (神)이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은 무인(武人)으로 묘사된다.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으로 비파(琵琶)를 든 북방 다문천(多聞天), 검(劍)을 든 동방 지국천(持國天), 좌측으로 당(幢)을 든 서방 광목천(廣目天), 용(龍)을 든 남방 증장천 (增長天)으로, 18세기의 다른 사천왕들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사천왕상들은 동시대의 다 른 상들에 비해 입상(立像)임에도 불구하고 크기가 작고, 재질이 나무라는 것이 독특하다. 또한 사천왕들이 대부분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해학적이고 친근한 모습이다.
최근에 영조 22년(1746년)에 화원(畵員) 여찬(呂燦)ㆍ신찰(愼察)ㆍ성현(性賢)ㆍ정일(淨日) ㆍ해운(海雲)ㆍ민휘(敏輝) 등이 이 상을 만들었다는 조상발원문(造像發願文)을 비롯하여 후령통(喉令筒)과 여러 복장물(腹藏物)이 발견되었다.』 -안내문에서 옮김.-
일주문의 안쪽은 진여문(眞如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봉은사 일주문은 바깥쪽은 '奉恩寺'란 편액이 걸려 있고 안쪽은 '眞如文'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진여(眞如)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진여(眞如)란 범어 tathātā의 번역으로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는 만유(萬有)의 본체로서 진실로 영 원불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여(如如), 여실(如實), 여(如)라고도 합니다.
이 문은 안에 사천왕상을 모셨으니 사천왕문을 겸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문은 여덟 개의 긴 석주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진여문(眞如門) 편액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峰 1908~1991) 선생 글씨
진여문을 들어서니 앞에 법왕루가 보입니다.
이제 진여의 세계 봉은사로 들어갑니다. 눈앞에 법왕루(法王樓)가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는 제2탄에서 만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반가운 얼굴들.~~~~~~
함께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몸살기운만 아니였음 식사까지 함께했을 것인데
다음 뵈올날을 기다려봅니다.
운영진 여러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_()_
봉은사는 다시한번 더 가고싶네요
꽃피는 봄이 오면 더욱 아름다운 곳 입니다.
....나무묘법연화경()()()
이번에 자세히 담아 보려 했지만 단시간에 담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은사의 역사를 알고 _()_
봉은사에 관계된 인물들을 두루 공부하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미처 못 담은 사진을 담아보려 동분서주하느라 가신 줄도 몰랐네요. 다음에 또 뵈어요.
봉은사에는 제가 먼저 도착해 다 둘러 본 시간 같네요. ㅎㅎㅎ
봉은사에서 무엇을 두루 보셨습니까 그래도 사진을 보시니 환하지요 _()_
봉은사 하면 선릉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요.
우리가 참배때 못들린 곳 이지만, 조선왕조 9대 성종 임금 그리고 두번재 부인 정현왕후
또한 중종의 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 바로 봉은사에서 관리 하던 곳 이지요.
그런데 강남 개발이 되면서 대로가 생기겨면서 뚝 짤려나가고 주변에 현대식 대형 건물들
뒤편으로 경기고등학교 까지 들어서면서 지금의 형태만 남아 있지요.
서울에서 5대 사찰에 속하는 곳이 바로 봉은사 이지요.
얼마전만 해도 주지 발령으로 인한 폭력 사태가 나무하던 곳,
이제는 전법 도량으로 다시 발돋음 하고 있는 곳,
깊은 역사가 숨쉬는 곳 이지요.
....나무묘법연화경()()()
사실 선릉도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접었지요. 봉은사가 제자리를 잡은 것은 전 주지 명진스님이었죠. _()_
이제는 강남에서 불광사, 능인선원, 구룡사 등과 더불어 시민의 귀의처가 되어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강남 도심에 있는 아름다운 고찰 봉은사. 한번 가봐야지하고 생각한것이 20년이 넘었네요. _()_
이번 정월순례 많이 기다렸답니다. 백우님의 봉은사 상세한 설명에 공부 많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잘 가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앞으로 이런 사찰 순례를 계속했으면 합니다. _()_
공부가 많이 되신다니 감사합니다.
다시보는 법우님들 반갑고, 봉은사에 얽힌 해설 사진글 잘 봤습니다. _()_
가만히 보니 봉은사 역시 초행길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몇 번 가보기는 했어도 초행이나반 다를 게 감사합니다. _()_
없었습니다.
이제 봉은사를 찾아들었습니다. 봉은사의 역사를 소상히 밝혀 주셨네요. 일제 강점기의 나청호스님의 활약과,조 보우스님에 대해서 공부 잘 햇습니다. 보우스님은 요승이라 하는데 이 글을 읽으니 유생들의 _()_
조선불교의 중
비방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이 문정왕후 사후 보우스님을 탄핵한 분이 이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천왕상이 참으로 순하게 보입니다. 동네 아저씨처럼 보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봉은사의 실제적 역사가연한 것은 연산군 때로 보여집니다. 연산군의 부왕인 성의 능이 선릉인데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유교가 국시이니 유생들의 _()_
봉은사가 선릉의 원찰이지요. 이번 기회에 나청호 스님에 대한 행장을 간략하나마 새롭게 알았습니다.
보우스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더욱
막무가내식 횡포가 도를 넘었을 때이죠. 무엇이든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문정왕후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자체도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우스님을 백안시하게 되고 나라를 망치는 요승
이라 치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생을 대표하는 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으로나마 반가운 법우님들 뵙습니다. _()_
아, 다녀가셨네요. 늘 소식이 궁금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