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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임미강展- 老化<갤러리 담 기획전>
전시기간: 2010년3월1일(월) – 3월13일(토)
전시장소: 갤러리 담 www.gallerydam.com
110-2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7-1 Tel.Fax. 02)738-2745
E-mail: gallerydam@empas.com http://cafe.daum.net/gallerydam
Gallery hours: 월~토 12:00pm~06:00pm 일12pm~05pm
오픈닝: 2010년3월1일(월)오후5시
전시내용
갤러리담에서 임미강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老化는 시간에 따라서 생물의 신체기능이 쇠퇴해 가는 것을 말한다. 노화는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감소하고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며 질병에 걸리는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작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손, 식물의 열매, 늙은 오이의 모습 등에서 이러한 노화를 발견한다. 이러한 오브제에 제의의 의미를 가진 제기 위에 제물처럼 올려져 있고 그 뒤로는 그 사진을 찍어서 기록한다. 마치 다큐멘타리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는 모멘토모리와 같이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작품 15점 가량이 출품될 예정이다.
작가의 변
虛 物
결국, 그를 위한 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은 설명을 들은 후에. 분만실에서 듣는 장례식 얘기 같은. 풋풋한 이 봄에 지난 가을의 애상을 노래하는. 생뚱맞게도. 그로부터. 친한 이에게도 낯을 가리는. 가끔. 나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미로. 아무리 되뇌어도 똑같은 메아리 속에 갇히고 마는 거울. 그럼, 나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나는 언제일까요? 내가 나를 인식하고 있으므로 내가 있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어디부터 언제까지 인가, 로 시작한 유치하고 고약한 고민 역시 한 번 들어서니 쉬 빠져나갈 수가 없네요.
지금, 새벽 여명을 비집고 새소리가 들립니다. 존재란 바깥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의 바깥을 인식합니다. 바깥은 저기에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에게 나는 저기에 있군요. 무한한 그대들이 있는 까닭에 나는 동시에 여기 그리고 저기에, 또 저기에, 거기에 무수히 있군요. 밤새 꼭 닫혀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 새 아침의 공기를 마십니다. 이내 뱉습니다. 나는 통로로군요. 새소리가 내게 들어왔네요. 나는 그대로군요.
그렇다면 나라 할 것이 없군요. 그대라 할 것도. 나도 없고 그대도 없고, 우리는 모두 없네요.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끊임없이 내뿜는 뿌연 담배 연기로 자신과 세상 사이에 허물 같은 옅은 장막을 치고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한’空하고 超한 골초 시인은 자신의 혼(魂)이 처한 자리를 그리 바라보았다.
그대는 바람 소리를 듣는가? 휘이이이~ 그러나 그것은 바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빌딩-협곡을 가를 때와 구름 속 산사 처마에 매달린 풍경을 흔들고, 운동장에 솟은 깃발을 펄럭일 때, 그것이 한 일은 같은 것. 다만 바람은 자기가 부딪치는 것에 소리를 달아 줄 뿐.
빨간 사과에는 빨간 색이 없다. 빨간 사과는 모든 빛을 흡수하고 빨간 빛만 튕겨낸다. 파아란 바다에는 파랑색만 없다. 노란 은행나무는 노랗지 않다, 7월의 녹음. 설원같이 눈부신 그대의 하아얀 치아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표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이고 우리는 그것을 좀 더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어떻게? 공초처럼?......
먹이는 나의 삶이니
그릇은 음식을 담는 도구. 산 자처럼, 망자를 위해서도 그릇엔 먹을 것이 담긴다.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죽은 자들도 잘 먹여야 위로할 수 있다(저승에서 잘 살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섭취하는 것. 그것은 물 마시는 뿌리로 입을 삼고 실바람 타고 살래살래 햇볕을 쫓아 길게 목을 늘이던 초록색 녀석이든, 펄떡이는 심장이 멈추기 전까지 큰 눈을 껌벅이던 누우런 녀석이든 가림없이, 산다는 것은 남의 살을 먹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남의 생명, 결국 죽임으로 삶을 섭취하는 것. 너의 희생 없이 나의 삶은 보장되지 않으니, 나-삶-포식자는 너-죽음-희생으로 말미암아 사는구나.
그러니까 나는 너로 말미암으니 너는 나를 있게 함이요, 내가 바로 너/그로다-Thou art that.
그렇다. 삶은 他의 삶을 취함-죽임으로써 살아지고, 삶은 그렇게 죽음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 고개 들어 설 수 있는 것. 살기 위해 섭취한 죽음은 삶 속에 뿌리내리니, 산다는 건 죽는 것. 삶은 곧 죽음, 죽음이 삶을 낳는다. 낱 어머니로부터 낱 생명 받아 한 때 피어났다가 나, 너 없이 흙으로 바람으로 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
어느 가을, 이른 바람이 불면/나뭇잎은 여기저기 떨어지는 것.(제망매가)
밭이 기름져야 수확이 풍요로운 법. 아,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몰아내고자 하는 삶의 바탕자리, 죽음의 형용은 얼마나 황폐한가. 공포, 고통, 불안, 몰수, 상실, 망각, 소멸, 불결, 폐기, 암흑, 부정, 종말, 허무, 무상…….
한 사회의 건강성은 그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가늠 할 수 있다고 믿는 바, 오늘 우리 모두의 실존에 드리운 자기상실의 무거운 비애가 정녕 금전적인 충족이나 턱뼈를 깎는 것만으로 회복되는가? 죽음은커녕 일생의 자연스런 결실에 해당하는 노년조차 아니, 중년의 주름마저 흉측한 치부라도 되는 양 안간힘으로 가리고 자기기만적인 시선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추방하려 드는 게 오늘 우리의 애처로운 자화상이 아니던가! 늙는다는 것, 쇠한다는 것이 이토록 추하게 자리 매김 한 적이 우리 기억 속에 또 있던가. 위태롭다. 그림자 없는 사물에 무슨 깊이가 있으랴. 죽음을 부인하는 삶, 그 이름은 ‘불모의 사막‘일 뿐.
썩는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순환의 먹이가 되는 것. 포식자와 희생의, 생성과 소멸의 고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완성되는 것. 멸해야만 새로워지는 것.
보자, 임의 그릇은 무엇을 담는가.
招 魂
무언가 있긴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심플하고 진지한 명상적 분위기의 저변에 깔린 뚝심이 인상적이던 그의 평소 작업 스타일에 비추어 보아도 이번엔 거의 ‘작업’이 안 보인다. 별로 한 게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가’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함이 없다…. 무위(無爲)?
우선, 채집된 벌레들, 열매들, 잎사귀들…. 생명은 고갈되었으되 형상은 명료하니 죽음, 완전한 무(無)로 부르기엔 너무나 또렷한 존재감. 친숙하면서도 조금 낯선, 그래서 약간의 호기심을 동반한 탐미적 시선을 유인하는 작은 미라들.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위치하는 참 소소한 허물들이다. 개중엔 지우개로도 지워질 어렴풋한 선으로만 가까스로 지탱하는, 그림자보다 얇은 두께와 무게를 가졌을 것 같은 그것들을 올려놓은 그릇들…… 그릇?
한 무더기는 일견 매혹적인 외양과는 거리가 먼 납작한 받침대 같고 다른 한 무더기는 그저 균열처럼 터져 있거나 아예 입이 막혀 있으니, 멋스런 도자 그릇이라 하기에 어눌하고 어색한 두 종류의, 글쎄, 제기(祭器)? 오, 아니다 그것은 제단(祭壇 ․ Altar)같다. 또는 그것은 주검을 운구하는 맥락에서 일종의 상여다 - 어차피 나는 그에게 ‘의미’를 추궁하지 않았고 그는 결코 다변(多辯)이 아닌지라 그의 의중을 모른 채 내 멋대로 판타지를 구축한다.
제단은 성소(聖所)다. 그것은 여기에 있지만 이곳에 속하지 않는 저 ‘너머’의 대리점이다. 聖과 俗 두 세계가 이원성을 벗고 서로 엉켜 교차하는 터널이다. 성소에 제단이 있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평범한 장소라도 제단을 놓으면 성소로 탈바꿈한다. 부뚜막, 장독대, 변소. 옛 할머니들에겐 정안수를 바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는 일상의 그 자리가 바로 제단이요 정결한 성소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김민기, 친구)’에서처럼 그 때 제단은 여기서 ‘비’와 같은 것. 산 것과 죽은 것이 구별 없는 그곳에선 의례를 통해 상징이 현실이 된다. 제례에서는 혼을 초대하는 것으로 저 너머의 힘을 빌어/빌려 일상사의 부정(不淨)을 비추고 씻어 냄으로써 삶을 정화시키고자 한다.
피안과 차안을 매개하는, 두 세계를 잇는 상여는 반대의 방향, 즉, 초대가 아니라 배웅하는, 육으로는 영영 떠나 보내는 배(船)다. 제단과 상여는 한 몸을 각기 다른 쪽에서 바라 본 이름.
도시엔 물건이, 산 속에는 생명이 많다. 당연히 도시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산은 주검으로 충만하다. 차이는 산 속의 그것이 멸하는 것은 분해를 뜻하며 곧, 다른 생물들로 화하는 죽음과 재생이 반복되는 릴레이, 윤회 과정이라면, 도시의 폐기물들은 잘 썩지(죽지) 않으므로 버려진 순간, 쓸모가 없어진 순간부터 자유를 얻어 자신들의 조물주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오래 느긋하게 지상에 머문다는 것(오래 산다고 숭배 받던 학이나 거북이 대신 알루미늄 음료 깡통과 김밥 포장용 스티로폼 용기 따위가 새 시대에 맞는 十長生 후보가 아닐는지).
그는 산자락에 산다. 때론 탐사하듯, 때론 무심히 작은 마당과 집 주변을 산책하며, 또 때론 속 깊은 이웃의 배려가 보태져 보물찾기하듯 세심하게 습득한 곤충, 식물 주검-허물들은 각각의 제단/상여에 정성껏 모셔진다. 여기와 저기, 두 세계가 겹쳐지게 하는 매개 공간 역할의 그릇-받침대들은 이 모의 의례에 걸맞게도 이미 말 한 것처럼 소박하니, 그 조촐한 어울림이 단정, 엄숙하게 다가온다. 꾸밈을 억제하여 드러나는, 흙을 상대해 온 오랜 단련에 의해 가능한, 얼핏, 투박하고 단순한 마감은 그릇의 원재료이자 또한 그 그릇에 담기는 모든 생명의 원천인 흙 자체의 본성을 정직하게 만나고자 하는 고집의 투영이다. 도회적 삶의 번쇄함, 그 과잉을 멀리하고 차라리 결핍을 추구하는 검박한 생활양식이 몸에 밴, 때론 스스로 답답해 할 만큼 원칙에 까다롭고 직실(直實)한 작가 자신의 성품도 한 몫 한다.
그리다-그리움-그림-그림자
전시하는 주검 중에 자연에서 습득한 다른 것들과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것을 주목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경단처럼 돌돌 말은 머리카락 뭉치들. 고치 같다. 바늘을 꽂아 놓으니 영락없이 실타래이기도. 무엇을 깁고 짤 것인가? 나무에서 마른 잎이 떨어져 나가듯이, 잘라내기 전까지 온전히 그의 일부였으되 이제 그것은 죽은 벌레들과 마른 열매와 낙엽들과 나란히 놓인다. 그것은 한때 그였고 여전히 잠재적 그이며(DNA) 또한 그가 아니다(생명 활동을 멈춘 것. 나의 바깥에 놓인 것). 나와 너(들). 나와 자연. 이로써 하나의 문장이 갈무리 된다. ‘나와 너는 한 몸이다.’ 수선스럽지 않고 조용한 퍼포먼스이지만, 그 울림은 웅변적이고 메시지는 확고하다.
그리운 이의 영정 사진을 대할 때 느낌이 그렇던가? 푸석푸석,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뭉치가 역설적이게도 한 때는 빛나던 시간을 강렬하게 회억케 하듯이, 말라버린 미라들의 세부 어딘 가엔 자신들 개체적 삶의 다채로운 면모가 은밀히 새겨져 있다. 수없이 집을 들고 나며 밟는 아담한 집 뜰 한 구석에서 오롯이 사위어 가며 그토록 오래 눈에 띄지 않았던 게 신기했다던 속이 텅 빈 오이처럼 이런 저런 정황 속에 채집된 허물들은 다시 하나하나 발견자-채집가의 각성을 촉구하는 매개물, 즉, 상징이 된다.
그런즉, 그들의 텅 빈 신체는 겉으로는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의 경구를 반복하되, 바늘만 갖다 대면 금방이라도 연주곡이 흘러나올 레코드판의 주름처럼, 또는 홍시보다 무서운 자외선이 파 놓은 할머니의 깊디깊은 주름처럼 언제라도 반대 방향의 푸르른 생으로 비약할 잠재된 활력을 담고 있는 것이다. Still life, 靜物, 정지된 삶. Vanitas의 무상성은 기껏 한 번 주어졌을 뿐인 찰나의 춤사위에 더할 나위 없는 깊은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그렇게 어슬한 어둠이 깃든 임의 그림이 좋다. 그는 생을 일구는 두 가지, 햇볕과 축축한 습기를 함께 머금은 흙으로 그림자들을 그린다. 성심으로 차린 그의 만찬에 초대되어 음미하듯이, 조용히, 천천히 살필 일이다.
無爲自然; (억지로)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다.
虛 沕
최근 그와 나는 만나면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 어느 선생님을 추억하곤 한다. 생전에 함께 담소를 나누던 벤치에서 주워 고이 간직한 마른 잎사귀가 오늘의 전시를 이끌어 낸 듯하다. 나이가 드는 것. 그것은 겨울을 맞이하는 것. 꺼려하던 것과 마주치는 것. 겨우내 몰아치는 칼바람, 눈보라에도 꼿꼿하게 기립해 있던 누런 수숫대들. 청명한 석양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껍질만 남은 희나리들. 잿빛 하늘이 덮어 누르는 겨울 들판을 더욱 황량하게 장식하던, 그런 아무 것도 아닌 푸나무 따위의 자태 앞에서 홀연 무너지고 마는 것. 에고(ego)를 겹겹이 둘러 싼 속 좁은 미혹을 벗고 모든 추위 속에 서 있는 것들과 동무 되는 것. ‘겨울 열매.’
그의 허물을 다시 돌아봅니다. 스산한 아름다움. 이해하면 좋아지고, 좋아하면 고와 보입니다. 들녘은 저기 그대로되 전처럼 신산하지 않습니다. 겨울이 어서 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대 덕분입니다.
누에는 고치 속으로/들어갑니다. /갑갑해 보이는/그 고치 속으로. /그렇지만 누에는/기뻐하지요, /나비 되어/날 수 있어요
-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ず), 고치와 무덤
2009. 4. 飛地에서, 전 상 용
임 미 강
1961년 대전 출생
1983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도자기 전공 졸업
1985 홍익대학교 대학원 도자기 공예전공 졸업
1988 독일 쾰른 국립미술대학 마이스터 슐러
1989 독일 니더라인 국립미술대학 디플롬 디자이너
2005-2006 훌부라이트 지원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The University of the Arts 대학 체류작가
현재
1996- 충남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미술학과 교수
2001- 국제도자협회(IAC) 회원
개인전
1988 한드베룩스캄머, 쾰른, 독일.
1990 모인화랑, 서울.
1992 갤러리 빙, 서울.
1993 미도파갤러리, 서울.
1993 갤러리 베니, 쿄토, 일본
1994 금호갤러리 기획전, 서울.
1997 갤러리 2000, 서울.
1999 시민회관, 대전.
2000 시민회관, 대전.
2000 아취브레이 가즈보, 헬레나, 미국.
2000 갤러리 도코노마, 제네바, 스위스.
2001 341갤러리, L.A, 미국.
2004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2005 통인갤러리, 뉴욕, 미국
2006 도자 조소 갤러리, 필리델피아, 미국
2006 통인갤러리, 서울
2008 갤러리 파랑, 대전
2010 쌍리 갤러리, 대전
국내외 단체전 100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