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신라사에 대한 여러 책에 대해서 설명해주신 아혜모호 님의 답에 글 가운데 이종욱 교수의 글에 대하여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그분이 쓴 "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년, 일지사.
에서는 석씨마립간시대와 김씨마립간 시대의 왕실세력 변천에 대한 글이 실려있습니다. pp 133-173
이종욱 교수 역시 신라 왕실의 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몇가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다시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참고하고 몇가지 정리를 해서 보겠습니다.
자. 먼저 꾸우꾸우 님이 말한 것에서 구도갈문왕과 갈문왕 이칠 박씨 사이에서 옥모, 말구, 미추, 대서지 4명의 자녀가 있다고 했는데, 이들이 모두 형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먼저 옥모. 벌휴이사금의 자식인 골정갈문왕과 결혼하여 조분이사금, 첨해이사금, 석씨(여자)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분이사금이 왕위에 오른 230년에 대략 10세라고 해도 220년에는 적어도 나이가 20이 되어야 하고, 옥모는 늦어도 200년에 태어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조분이사금 조 참조)
그렇다면 구도갈문왕의 자식들은 2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그런데 미추이사금이 옥모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220년(20년 터울도 많기는 하지만) 이전에 태어나야겠지요. 그렇게 보아도 미추이사금과 옥모가 남매인 것은 좀 어색하지요.
그래서 차라리 옥모는 조분이사금이 200년에 태어났고, 옥모는 170년대에 태어났다고 보기로 하지요.
옥모가 낳은 석씨 여인이 내해이사금과 결혼합니다. 석씨여인은 조분이사금의 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해이사금 조)
옥모가 낳은 석씨 여인은 내해이사금은 (196-230년)과 결혼한 만큼 이 여인은 190년대에 태어났다고 봐야겠지요. 조분이사금보다 늦게 태어났다고 하면 석씨와 조분이사금이 남매인 것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 더 궁금한 것이 우로라는 아들이 나오는 것인데, 석우로전에는 우로의 어머니가 석씨라고 기록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내해이사금의 자식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로의 어머니가 석씨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석씨가 어머니라면 이 둘의 계보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 석우로전에는 우로의 아버지를 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 대서지 문제인데, 대서지는 이리부인과 결혼하여 실성이사금을 낳은 사람입니다. 실성은 402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서지는 적어도 360년대에는 태어났어야 합니다. 만약 대서지가 300년에 태어나서 360세에 아들을 낳고 그 실성이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대서지와 옥모와 남매지간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대서지에 대해서는 실성이사금 조에 알지의 후손이라고만 했을 분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 미추왕의 동생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미추이사금이 262-284년에 왕위에 있었으므로, 이것 역시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대서지와 미추가 형제간이라는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므로, 이것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구분지어 봅시다.
말구는 구도갈문왕의 손으로 내물이사금의 아버지로 나옵니다.(내물이사금 조) 또 말구는 유례이사금 8년(291년)에 이벌찬이 된 사람입니다. 내물이사금이 356년에 왕위에 올라 46년이나 왕위에 있었으므로 내물이사금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330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말구는 이벌찬이 되엇을 때 나이가 30이라고 하더라도 무려 7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이 됩니다. 말구 또한 늦어도 260년에 태어난 것이 되는데, 말구가 구도갈문왕의 자식으로 보기에는 같은 형제간이 되야 하는 옥모와의 나이가 무려 60년 정도 차이가 나야 하므로, 이 또한 의문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종욱 역시 구도갈문왕의 손을 아들이 아닌 구도갈문왕의 핏줄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종욱은 말구를 미추이사금의 자식으로 보았습니다. (구도갈문왕의 손자가 되는 셈이지요)
그러면 옥모, 미추, 대서지, 옥모는 모두 남매지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음 우로의 계보인데, 우로는 명원부인과 결혼을 합니다. 명원부인은 조분이사금의 딸입니다. 조분이사금의 또 하나의 딸인 광명부인은 미추이사금의 부인이 되지요. 명원과 광명 두 사람은 결국 미추이사금과 석우로의 부인이 되는데 석우로와 미추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대에 활동하는 것으로 볼 때 큰 무리는 없습니다.
석우로와 명원부인의 자식이 흘해 이사금이 됩니다.
자 여기서 꾸우꾸우님이 할아버지와 손녀의 결혼이라고 이들의 결혼을 꼬집은 것은
구도갈문왕 - 미추이사금
구도갈문왕 - 옥모 - 조분이사금 - 광명부인, 명원부인
이렇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미추이사금과 옥모가 남매라고 할 때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옥모와 미추간에 남매지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의 핵심인 옥모의 출생연대, 옥모가 구도갈문왕의 딸인가가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종욱 역시 옥모가 미추이사금의 남매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자. 계보상의 문제를 정리해보면 결국 구도갈문왕의 4남매 가운데 몇 가지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들이 모두 남매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도갈문왕의 존재입니다.
구도갈문왕은 알지 - 세한 - 아도 - 수륙 - 욱보 - 구도 의 계보에서 왕이 안된 직전의 인물입니다.
이 구도라는 인물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김씨가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그래서 가설은 두 가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계보는 구도 - 미추의 계보입니다. 미추는 김씨 가운데 최초로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런만큼 그의 아버지가 구도갈문왕이라고 표기한 것은 계보작성의 예로 볼 때 가장 확실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나머지 옥모, 말구, 대서지는 각기 왕의 조상, 김씨 왕비의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들은 김씨의 방계인데 이들의 족보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 수륙, 욱보의 자식에서 나온 자들로 미추의 4촌이나 6촌일 수도 있지요) 이들의 조상을 미추이사금과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구도갈문왕와 연결 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계보상의 문제는 석씨왕계에서도 드러납니다.
앞서 벌휴, 내해, 조분, 첨해, 유례, 기립, 흘해 7명의 이사금을 보면 여기서는 부자상속에 의하여 왕위가 계승된 적이 없으며, 벌휴 이사금의 혈족후손집단 가운데 우수자를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석씨들은 결국 벌휴이사금과의 계보가 인위적으로 조정될 수 있는 집단간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씨왕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왕위 계승에서 제대로 부자상속이 확립된 것은 5세기에 눌지-자비-소지 왕대에 이르러서 입니다. 물론 이것도 일시적이기는 하지요. 지증왕계보로 다시 또 바뀌니까요.
3-4세기 신라 왕계의 계보상의 혼란 문제는 후대에 이르러 계보가 어느 정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삼국사기를 불신하는 기록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족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계보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지, 이것이 신라 왕실을 불신하는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나는 이희진 박사의 주장처럼 강종훈을 비롯한 몇몇 삼국사기 수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신라왕실의 계보를 다시 고치는 것을 역사학자들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계보의 조작은 후대에 와서도 이루어집니다. 16세기 이후 가문마다 족보를 만들 때 장자 개념을 세우면서 양자를 들이고 누가 누구의 대를 이었다는 계보에 천착하는 현상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6-7세기 이후 유교적 가치관이 들어오면서 계보를 정리하면서 왕실의 적통이 아닌 자들이 왕비가 되거나, 왕실의 중요한 인사가 되었을 때 이들의 조상의 계보를 좀 더 유명한 사람과 연계시키는 의식으로 인해 계보가 일부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라에서는 족내혼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사실 촌수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은 혈연집단내에 속하고 그 집단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혈통에 대한 의식만이 강했는데(화랑세기를 빌리면 대원신통 등의 혈통) 이 때문에 후대에 구도갈문왕이라는 김씨계의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혈연 잇기 조작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표적으로 대서지가 단지 알지의 후손 즉 김씨라고만 하는데, 이를 굳이 미추이사금의 동생이라고 하는 것 등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말구도 구도갈문왕으이 후손일 뿐인데, 이를 직접 자식인 것처럼 묘사한 것이 이러한 조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신라 초기 왕계는 이러한 혈통의식에 의한 약간의 조작은 있었지만, 신라 왕실의 연대가 줄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왕위의 계승은 대체로 정확하고 혈통간의 촌수가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왕위의 전승은 나라 사람 모두가 알지만, 혈통간의 촌수는 훗날 혈통에 의한 의식 때문에 변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