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과 군수>의 유해진
“사람이… 우리가 알던 이미지가 아니야.” 차승원의 추천으로 유해진을 군수 역에 캐스팅한 장규성 감독의 소감이다. <이장과 군수>는 유해진이 영화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이장 역의 차승원이 절박한 얼굴로 괄약근을 조이며 폭소를 자아낼 때 유해진은 소신대로 일을 진행하다 좌절을 맛보는 젊은 군수를 연기한다. 그를 극에 감칠맛 내는 조연으로 기억해온 관객에겐 <이장과 군수>의 그가 낯설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모든 역할을 꼼꼼한 정극의 접근법으로 연기한 유해진에겐 군수 노대규 역이 전혀 새롭지 않았다.
이날 만난 현실의 유해진은 진지하고 조용한, 주위의 작은 소음에도 민감한 사람이었다. 영화를 찍을 때도 짬이 나면 무리에 섞여 노는 대신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고, 관객이 가장 소화하기 쉬운 상태가 될 때까지 대사를 몇번이고 곱씹는 사람이다. 무리를 좋아하는 양의 반대 개념으로 ‘고독한 늑대’란 비유가 많이 쓰이지만, 그에겐 포식자 늑대보단 섬세한 성품 때문에 무리를 멀리하는 톰슨가젤이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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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영화는 보셨어요? 보통 본인 영화는 시사회에서 안 보고 개봉 뒤에 표를 사서 본다고 들었어요.
=이번엔 봤어요. 사실 일반 관객 시사인 줄 알고 갔는데 스탭끼리 보는 시사더라고요. 영화 관계자들 오는 시사회는 잘 안 가는데….
-굳이 일반 관객과 영화를 보는 이유가 있나요.
=관객 반응을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마음이 편해요, 일반 시사회가. 관계자들 시사회는 이것저것 신경쓸 것도 너무 많고…. (웃음)
-이번 영화에선 진지한 정극에 가까운 연기를 했어요. 이른바 ‘유해진스럽다’고 하는 감칠맛 나는 코믹함은 상대적으로 덜한데요.
=그렇죠. 사실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더 진지해서 처음 읽었을 때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 인물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이 안 왔어요. 마냥 코믹으로 가면 군수의 소신있는 자세가 전혀 신빙성없게 보일 테고, 하지만 관객은 제게 그 ‘유해진스러운’ 코믹함을 원할 테고. 하지만 장규성 감독의 전작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믿고 출연했어요. 그 사람이 저처럼 촌사람이라 작품에 따뜻한 걸 많이 담잖아요. 핵폐기장 같은 무거운 소재도 섞여 있지만 장규성 감독이라면 두 친구의 우정 이야기와 함께 무겁지 않고 따뜻하게 풀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군수 노대규라는 인물은 여러모로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인물인데, 부담은 없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정치적 풍자 그런 말도 있던데, 전 단순하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진 못해요. 그냥 극 속의 한 인물로만 생각했지, 현실 정치와의 관련성을 일부러 생각하진 않았어요.
-예전에 “오버하는 코미디는 내키지 않는다”고 얘기했는데요, 이번 작품을 택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나요.
=물론 오버하는 코미디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오버를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되는 걸 주문받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요. ‘이게 납득이 가는 거냐, 정말 현실에서 이 정도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계속 고민하죠. 가끔 ‘대놓고 코미디’인 영화도 있었어요. 내가 정말 하기 싫었던 장면이었는데 결국 편집되지 않고 영화에 나와서, 사실 그것 때문에 감독한테 전화해서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어요. 반면 제가 지금까지 출연한 인물 중엔 <무사> <해안선> <혈의 누>처럼 코믹하지만은 않은 인물들도 많잖아요.
-정극 연기에 대한 애정이 많으세요. 특히 드라마 <토지>의 김두수 역할을 자주 언급하세요.
=김두수는 정말 악인인데, 그게 사연이 있는 악인이에요. 그전에는 아무도 저에게 그런 역할을 주지 않았어요. 그 작품을 하면서 정말 연기하는 느낌이 생겼어요. “아, 이게 배우구나”라는 느낌. 우는 장면에서도 별로 애쓰지 않아도 눈물이 펑펑 났고, ‘캇’ 하고 나서도 바위 뒤에 가서 펑펑 울었죠. 정말 좋아했던 작품이에요.
-정극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연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있죠. 저는 연극하던 시절의 경험도 있고. 그런데 자기 입맛대로 그렇게 딱딱 먹을 수는 없잖아요. 때론 쓰지만 먹어야 할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게 턱 걸릴 수도 있는 거고. 이건 만날 하는 얘긴데, 전 코미디든 뭐든 간에 정당한 이유가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작품이면 다 좋아요. <이장과 군수>도 두 친구의 우정, 그 목표로 간 거였어요. <왕의 남자> 때는 ‘광대’가 목적이었고요. 배우란 바로 그런 일이기 때문에 꼭 하고 싶었죠. <타짜>도 너무 행복했던 작품이고요.
-그러고보면 <타짜>의 고광렬도 코믹 캐릭터는 아니죠.
=네, 사실 제가 맡은 역들이 다 그래요. 그냥 현실에 있는 보통 사람인데, 그 사람이 덜 배웠다거나, 한 가지 코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웃음이 나오는 거죠. 어떻게 보면 <타짜>나 <왕의 남자>나 다 정극이죠.
-유해진씨가 만들고 싶은 웃음이란 어떤 건가요.
=‘하하하’가 아니라 ‘으흐’, 이런 웃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웃는 거 있잖아요. ‘허허’ 하다가 ‘하아…’ 하면서 뒤에 긴 한숨도 따라붙는. ‘맞아, 저럴 수 있지… 어휴… 근데, 허… 안됐다…’ 싶은, 그런 마음에 남는 웃음요. 음… 제가 말을 잘 못하죠? 말솜씨가 없어서. 허허.
-이번 영화에서도 외모를 두고 하는 개그 코드가 많은 것 같아요.
=예, 뭐. 이게 “군수 얼굴이냐 괴수 얼굴이지” 하는 거나 “눈떠!” 이런 것들.
-감독님은 외모 개그를 줄이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으하하하. 줄여서 그만큼이면 외모로 할 개그가 엄청 많은가보죠, 저한테? 으하하하. 줄여서 그 정도면 트집잡을 게 더 많은가보다.
-지겹진 않으세요.
=아, 그거요? 이제는 그러려니 해요. 사춘기도 아니고. 사춘기 때는 민감하게 받아들였죠. 요즘은 그러려니 하고, 좋아요. 외모에 대해 불만도 없어요. 만날 봤더니 정이 들어서. 으하하하.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서 화제가 됐는데요, 정작 본인은 감회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아버님의 영향인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중용 같은 것을 굉장히 강조하셨던 것 같아요. 좋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고 나쁘다고 너무 싫어하지도 말고 그냥 있으라고. 어렸을 땐 그런 말 들으면 정말 짜증났어요. 아, 어린애가 좋다고 하면 그냥 좀 좋게 놔두지, 그걸 그렇게 구박하시나…. 그래서 전 아버지를 좀 싫어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기억 저편에 쟁여놨던 말씀이 스멀스멀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첫 주연 맡아서 좋죠.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기분이 나쁘기야 하겠어요? 그냥 고 정도, 그 정도 느낌이에요. 흔히 얘기하는 ‘투톱’, ‘주연’ 이런 말은 낯설어요. 어떤 때는 그 말을 들으면 딴 데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부담이 가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의미를 두고 싶진 않아요.
-그동안의 조연 연기는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나요.
=제가 지금까지 상을 딱 하나 받았거든요. 대종상 남우조연상. 저는 그 상이 너무 좋아요. <왕의 남자>로 받았나? 저는 평생 그 상 딱 하나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조연이란 게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저 자신도 그런 면이 있고요. 나서지 못하고 그냥 묻어서 가는… 뭐랄까, 소시민다운 거요. 그런 게 정감이 가요. 예전에는 양아치, 건달을 계속하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언제부터인가 굉장히 애착이 생겼어요. 전에는 그런 인물의 겉을 흉내내기 바빴다면 지금은 ‘아, 얘가 환경이 안 좋아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배운 게 그거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는구나’ 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더라고요. 나쁜 일을 하지만, ‘뭐, 자기도 그렇게 살고 싶었겠어’, 그렇게 생각하게 돼요. 보시는 분들에겐 그냥 그런 놈 정도겠지만 난 자꾸 그런 역을 해서 그런지….
-본인이 하고 싶은 연기는 어떤 건가요.
=굳이 얘기하자면 기타노 다케시의… 무슨 여름이죠? <기쿠지로의 여름>. ‘쓰레빠’ 신고 나와서 동네 애한테 막 뭐라고 하고. 저는 그런 게 굉장히 정감이 가요. 자신도 초라한 사람이 애에게 그러는 모습이. 제가 백수 같은 사람들이 뭉클한 걸 전해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제가 원래 백수 근성이 있나봐요. 그런 거 하면 너무 편할 거 같아요. 슬리퍼 신고 추리닝 입고, 그러면서 찡한 것도 있고. 음… 제가 말을 잘 못하죠. 전 항상 구체적이지 않아요. 그냥 이미지만 갖고 있고.
-평소에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들었어요.
=때에 따라 달라요. 근데 대체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만날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이장과 군수> 촬영장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뒷산에 올라가곤 했다면서요.
=원래 촬영하면 근처 산에 왔다갔다해요. 그 시간이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에요. 무리에서 약간 벗어나서… 남들이 보기엔 ‘미친놈 아니야’ 할지 몰라도 정말 소중한…. 그날 찍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혼자 있을 때, 자유로울 때 느낌이 언뜻언뜻 팍팍 올 때가 있어요. 대사도 고민하고.
-이번엔 어떤 대사가 고민됐나요.
=대본에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돼 있으면 “에, 제가 처음 부임해왔는데요, 에이그, 참 뭐, 여러분과 같이 할 수 있게 돼서 참 좋네요”로 가져가고요. 두 대사가 뜻은 같은 거잖아요. 그렇게 여러 가지로 바꿔보는 거죠. 현실에서 쓰이는 살아 있는 말을 찾아야, 관객이 인물과 함께 호흡할 수 있잖아요.
-말에 굉장히 민감한 배우세요.
=그렇죠. 말 가지고 하는 직업이니까요.
-토씨 하나도 굉장히 신경쓰시잖아요.
=에이, 그건 그냥 하는 얘기고. 그건 어떤 배우든 다 그래요.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연극하는 선배님들이 “이 새끼 이거, 저만 토씨 하나하나 신경쓰나…” 하실 거예요. 저만 잘난 것처럼 인터뷰하는 것 같아서 말하다 보면 헉헉 찔려요.
-최근 차승원씨와 출연한 TV프로그램을 봤어요. 그런데 메인 진행자 맞은편의 초대석에 앉지 않고 보조진행자들 사이에 파고들어가시던데요.
=저는 그게 오랜 습관일 수도 있는데, 그 자리가 편해요. 그래야 재밌는 거도 나올 수 있고. 메인 진행자와 맞대결하는 구도면 저는 막 벗어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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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보다는 참모를 맡을 때 더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인 것 같아요.
=예, 감투는 상당히 싫어해요.
-감투가 없어야 더 일을 잘하는 스타일이세요.
=예. 저보고 ‘야, 뭐 좋은 거 좀 생각해봐’ 그러면 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내버려두면 오히려 잘 나오는데, 그걸 강요하거나 하면. 그럼 저는 벽이 확실히 생겨요.
-개인 시간이 생기면 어떻게 여가를 보내세요.
=여행 가요. 시간이 없으면 가깝게 강원도도 가고. 최근엔 베트남을 갔는데 너무 좋았어요. 옛날에 <씨클로>를 본 이후 그 나라가 계속 궁금했어요. <그린 파파야 향기> 포스터도 좋았고. 그 비 온 뒤의 파릇파릇한 느낌을 직접 가서 보고 싶었어요. 갔더니 정말 스콜이 지나간 초저녁에, 파릇파릇한 데 박쥐가 날고 제비가 날아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제가 어릴 때 청주 살았는데 그 생각도 나고. 이런 게 문화의 힘이란 것도 느꼈어요. 그 영화에서 받은 느낌 하나가 계속 남아서 그 나라를 궁금하게 만들잖아요.
-평소 취미 생활은 어떤 건가요.
=동네 뒷산에서 산악자전거 타고…. 제가 썩 재밌게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끔 동대문 벼룩시장에 LP사러 다니고. 싸거든요. 2천, 3천원 해요. 가면 좋은 거 많아요.
-고양이를 기른다고 들었어요.
=예, 이제 한살이 좀 넘었어요.
-왜 기르고 싶었나요.
=지방촬영 많잖아요. 갔다오면 집이 너무 휑하니까. 여행을 많이 간 것도, 집에 오면 너무 허한 게 싫어서 떠나고 그런 건데. 그래도 고양이라도 있으면 자꾸 집에도 신경쓰게 되고, 고양이가 밥이나 먹었으려나, 생각하고요.
-연극은 자주 보러 다니세요.
=요즘은 잘 못 보죠. 보고 나면 속이 일렁일렁해서. 대학로 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 뒤가 무거워요.
-왜 속이 일렁이세요? 연극에 애정이 많고, 무대에도 다시 서고 싶어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것 때문에 속이 일렁거리는 건데…. 연극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편치 않을 때 연극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연극에는 이런 작품도 있는데, 이번 영화는 그런 면에서는 충족을 못 주는구나’ 하고. 정극을 하고 싶은데 현실에선 딴 걸 하고 있을 때 그런 충동이 많죠.
-영화를 시작한 지 어느새 10년인데요. 예전엔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대해 걱정도 많으셨다는데 더이상 그런 고민은 없겠네요.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생기는 거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기 계발을 해야 하나…. 자꾸 나를 들볶아야겠죠. 시간이 갈수록 감각이 예전만 못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70년생이신데, 자신의 40대에 대해서도 생각하나요.
=생각하죠. 나도 이제 곧 40대고… 음…. 그런데 그런 생각 들면 확 자전거 타버려요. 생각이 깊어지면 잡생각만 많아질 뿐이고. 지금은 자전거 타는 게 나에게 유익하니까 그냥 확. 정적인 생각에서 동적인 행동으로 가는 거죠. 그게 좋은 거 같아요. 허허…. 제가 말을 참… 잘 못해서.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