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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奇參衍 (1851 ~ 1908)】 "백마장군 장성의병장 기삼연"
1851년 1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 하남(河南) 마을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어려서 노사의 문하에서 삼종질(三從姪)이자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혔다. 대단히 명민(明敏)하여 한 번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여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경사(經史)와 병서(兵書)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필법(筆法)이 절묘하였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한 과거(科擧)에는 나가지 않았다.
1895년 후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남에서는 장성이 가장 먼저 의병 준비에 앞장섰다. 이미 병인양요 당시 노사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은 먼저 복수토적(復讐討賊)과 단발령 철폐 등을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거의(擧義) 준비에 돌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기우만은 근왕(勤王)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장성의병은 기우만의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 외에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였고, 거사 과정에서 유생과 향리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의 지도부는 기우만을 비롯하여 기삼연·기재(奇宰)·기우익(奇宇益)·김익중(金翼中) 등이었는데, 대부분 노사의 제자였다. 이에 약 300명의 장정을 불러 모아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였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렀다. 처음에 의병들을 능숙하게 훈련시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을미의병 실패 후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기삼연의 편지 [판형2] |
1896년 (음)2월 7일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일 후 나주로 이진하였다.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근왕하기 위한 북상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나주의병을 나주의소(羅州義所), 장성의병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전라도 각지의 의병을 (음)2월 그믐날 광주(光州)에 집결시키자고 통문을 돌렸다. 이들이 광주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파견하여 국왕의 명령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기우만이 다른 양반 출신 의병장과 마찬가지로 장성의병의 해산을 결정하자, “선비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며 반발하였다. 이때 체포를 피해 전남 담양군 금성면(金城面)의 송훈(宋壎) 집에 은신하여 송진우(宋鎭禹)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 (음)5월 9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인통함원(忍痛含寃)’을 가슴에 새기고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봄 영광(靈光)의 선비 김용구(金容球) 등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또 1907년 봄에도 전남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화순(和順)의 양회일(梁會一)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1907년 10월 중순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 수십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전북 고창(高敞)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면서 약 4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李英華), 나주의 김준(金準),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이 합류하였다. 이처럼 여러 의병부대의 호응으로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기삼연의병 주둔지 문수사(전북 고창) [판형2] |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 선봉(先鋒) 김준,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총독(摠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의 이름으로 격문을 사방에 발송하였다. 격문을 통해 개항 이래 40년 동안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죄상을 성토한 후 조선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일제의 침략을 반드시 격퇴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고위관료로부터 모든 계층이 협력하여 500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격문의 말미에,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는 점을 명시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장성·함평·영광·나주·고창 등 주로 전라도 서부 지역의 양반 유생들이었다. 이들이 각자 의병을 규합하여 하나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였던 관계로 회맹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거나, 기삼연의 제자들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이나 춘추의리를 중시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금성산성(전남 담양) [판형2] |
이들은 따로 광고문(廣告文)을 작성하여 사방에 게시하였는데, 주로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즉, 곡식의 역외 유출 및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의 도조(賭租)의 의소(義所) 납부, 세금 납부 금지, 자위단(自衛團) 및 일진회 가입 금지 등이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외국 상품의 폐해로 인한 민중의 생존권을 우선시하였으며, 친일 세력의 확산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의 의병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광고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어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정책을 알리고 나아가 세계 각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도모하자고 호소하였다.
의병 활동은 1907년 10월 중순부터 1908년 2월 초 순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10월 하순 고창 문수사전투를 시작으로 전북 무장주재소 공격, 11월 고창읍성 점령, 12월 장성우편취급소 및 영광주재소, 1908년 1월 담양우편취급소, 함평주재소, 광주·영광·나주의 일본인 농장 등 일제 침략 기구와 일본인 농장을 집중 공격하였다. 친일 세력의 처단과 납세 거부 투쟁에도 앞장섰는데 면장과 일진회원, 자위단장 등이 주된 제거 대상이었다. 세무 업무를 담당하는 면장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의 공격을 통해 납세 거부를 유도하였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부호가의 곡식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제거에 현상금을 걸거나 일본인 농장이나 상점을 닥치는 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장성을 비롯한 영광·담양·함평·나주·고창 등 전라도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담한 공격은 일제 군경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고창읍성과 함평·영광·법성포 등을 일시 점령하여 다량의 무기와 곡식을 확보하였다. 특히 고창읍성 점령시 고창 지역민들의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전투 역량을 제고하려고 총기를 수집하고 포수의 모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곳곳에서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였으며, 1908년 2월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는 수비대 조장 등 2명의 일본군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1908년 1월 25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광주수비대는 10개 종대(縱隊)를 편성하여 전남 서부 지역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귀순을 권유하여 의병의 분열을 노렸다. 이로 인해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여러 부대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겨울이 닥치자 잠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혹한을 피하며 험준한 요새인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주둔하면서 병사들과 같이 과세(過歲)할 작정이었다.
기삼연 체포 보고문(1908) [판형3] |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은 그를 체포하려고 금성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그만큼 발생하였다. 발병(足病)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여 통령 김용구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전북 순창(淳昌) 구수동(九水洞, 일명 槽洞)의 친척 기구연(奇九衍)의 집에 은신하였다. 1908년 2월 2일 설날 아침 일제의 수비대가 마을을 포위하였다. 이른바 이마무라토벌대(今村討伐隊)는 기구연의 집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를 찾아내어 광주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봉장 김준은 날랜 병사 약 30명을 선발하여 기삼연 의병장 탈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 경양역(景陽驛) 근처까지 추격하였으나 이미 그곳을 통과한 뒤였다. 기삼연 의병장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광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지자, 일제는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였다. 즉,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광주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불법적 총살을 자행한 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일제는 “누차 도주를 기도하고 반항하여 부득이 총살”하였다고 호도하였다. 발병이 심해 걸음걸이도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자신들이 불법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이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키던 꿈 또한 헛되었구나(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순국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저술로는 『기삼연실기(奇參衍實記)』(『省齋奇先生擧義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51년 1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 하남(河南) 마을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어려서 노사의 문하에서 삼종질(三從姪)이자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혔다. 대단히 명민(明敏)하여 한 번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여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경사(經史)와 병서(兵書)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필법(筆法)이 절묘하였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한 과거(科擧)에는 나가지 않았다.
1895년 후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남에서는 장성이 가장 먼저 의병 준비에 앞장섰다. 이미 병인양요 당시 노사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은 먼저 복수토적(復讐討賊)과 단발령 철폐 등을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거의(擧義) 준비에 돌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기우만은 근왕(勤王)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장성의병은 기우만의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 외에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였고, 거사 과정에서 유생과 향리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의 지도부는 기우만을 비롯하여 기삼연·기재(奇宰)·기우익(奇宇益)·김익중(金翼中) 등이었는데, 대부분 노사의 제자였다. 이에 약 300명의 장정을 불러 모아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였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렀다. 처음에 의병들을 능숙하게 훈련시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을미의병 실패 후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기삼연의 편지 [판형2] |
1896년 (음)2월 7일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일 후 나주로 이진하였다.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근왕하기 위한 북상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나주의병을 나주의소(羅州義所), 장성의병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전라도 각지의 의병을 (음)2월 그믐날 광주(光州)에 집결시키자고 통문을 돌렸다. 이들이 광주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파견하여 국왕의 명령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기우만이 다른 양반 출신 의병장과 마찬가지로 장성의병의 해산을 결정하자, “선비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며 반발하였다. 이때 체포를 피해 전남 담양군 금성면(金城面)의 송훈(宋壎) 집에 은신하여 송진우(宋鎭禹)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 (음)5월 9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인통함원(忍痛含寃)’을 가슴에 새기고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봄 영광(靈光)의 선비 김용구(金容球) 등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또 1907년 봄에도 전남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화순(和順)의 양회일(梁會一)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1907년 10월 중순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 수십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전북 고창(高敞)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면서 약 4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李英華), 나주의 김준(金準),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이 합류하였다. 이처럼 여러 의병부대의 호응으로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기삼연의병 주둔지 문수사(전북 고창) [판형2] |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 선봉(先鋒) 김준,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총독(摠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의 이름으로 격문을 사방에 발송하였다. 격문을 통해 개항 이래 40년 동안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죄상을 성토한 후 조선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일제의 침략을 반드시 격퇴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고위관료로부터 모든 계층이 협력하여 500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격문의 말미에,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는 점을 명시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장성·함평·영광·나주·고창 등 주로 전라도 서부 지역의 양반 유생들이었다. 이들이 각자 의병을 규합하여 하나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였던 관계로 회맹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거나, 기삼연의 제자들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이나 춘추의리를 중시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금성산성(전남 담양) [판형2] |
이들은 따로 광고문(廣告文)을 작성하여 사방에 게시하였는데, 주로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즉, 곡식의 역외 유출 및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의 도조(賭租)의 의소(義所) 납부, 세금 납부 금지, 자위단(自衛團) 및 일진회 가입 금지 등이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외국 상품의 폐해로 인한 민중의 생존권을 우선시하였으며, 친일 세력의 확산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의 의병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광고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어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정책을 알리고 나아가 세계 각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도모하자고 호소하였다.
의병 활동은 1907년 10월 중순부터 1908년 2월 초 순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10월 하순 고창 문수사전투를 시작으로 전북 무장주재소 공격, 11월 고창읍성 점령, 12월 장성우편취급소 및 영광주재소, 1908년 1월 담양우편취급소, 함평주재소, 광주·영광·나주의 일본인 농장 등 일제 침략 기구와 일본인 농장을 집중 공격하였다. 친일 세력의 처단과 납세 거부 투쟁에도 앞장섰는데 면장과 일진회원, 자위단장 등이 주된 제거 대상이었다. 세무 업무를 담당하는 면장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의 공격을 통해 납세 거부를 유도하였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부호가의 곡식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제거에 현상금을 걸거나 일본인 농장이나 상점을 닥치는 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장성을 비롯한 영광·담양·함평·나주·고창 등 전라도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담한 공격은 일제 군경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고창읍성과 함평·영광·법성포 등을 일시 점령하여 다량의 무기와 곡식을 확보하였다. 특히 고창읍성 점령시 고창 지역민들의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전투 역량을 제고하려고 총기를 수집하고 포수의 모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곳곳에서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였으며, 1908년 2월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는 수비대 조장 등 2명의 일본군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1908년 1월 25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광주수비대는 10개 종대(縱隊)를 편성하여 전남 서부 지역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귀순을 권유하여 의병의 분열을 노렸다. 이로 인해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여러 부대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겨울이 닥치자 잠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혹한을 피하며 험준한 요새인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주둔하면서 병사들과 같이 과세(過歲)할 작정이었다.
기삼연 체포 보고문(1908) [판형3] |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은 그를 체포하려고 금성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그만큼 발생하였다. 발병(足病)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여 통령 김용구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전북 순창(淳昌) 구수동(九水洞, 일명 槽洞)의 친척 기구연(奇九衍)의 집에 은신하였다. 1908년 2월 2일 설날 아침 일제의 수비대가 마을을 포위하였다. 이른바 이마무라토벌대(今村討伐隊)는 기구연의 집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를 찾아내어 광주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봉장 김준은 날랜 병사 약 30명을 선발하여 기삼연 의병장 탈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 경양역(景陽驛) 근처까지 추격하였으나 이미 그곳을 통과한 뒤였다. 기삼연 의병장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광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지자, 일제는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였다. 즉,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광주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불법적 총살을 자행한 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일제는 “누차 도주를 기도하고 반항하여 부득이 총살”하였다고 호도하였다. 발병이 심해 걸음걸이도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자신들이 불법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이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키던 꿈 또한 헛되었구나(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순국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저술로는 『기삼연실기(奇參衍實記)』(『省齋奇先生擧義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51년 1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 하남(河南) 마을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어려서 노사의 문하에서 삼종질(三從姪)이자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혔다. 대단히 명민(明敏)하여 한 번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여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경사(經史)와 병서(兵書)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필법(筆法)이 절묘하였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한 과거(科擧)에는 나가지 않았다.
1895년 후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남에서는 장성이 가장 먼저 의병 준비에 앞장섰다. 이미 병인양요 당시 노사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은 먼저 복수토적(復讐討賊)과 단발령 철폐 등을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거의(擧義) 준비에 돌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기우만은 근왕(勤王)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장성의병은 기우만의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 외에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였고, 거사 과정에서 유생과 향리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의 지도부는 기우만을 비롯하여 기삼연·기재(奇宰)·기우익(奇宇益)·김익중(金翼中) 등이었는데, 대부분 노사의 제자였다. 이에 약 300명의 장정을 불러 모아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였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렀다. 처음에 의병들을 능숙하게 훈련시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을미의병 실패 후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기삼연의 편지 [판형2] |
1896년 (음)2월 7일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일 후 나주로 이진하였다.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근왕하기 위한 북상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나주의병을 나주의소(羅州義所), 장성의병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전라도 각지의 의병을 (음)2월 그믐날 광주(光州)에 집결시키자고 통문을 돌렸다. 이들이 광주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파견하여 국왕의 명령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기우만이 다른 양반 출신 의병장과 마찬가지로 장성의병의 해산을 결정하자, “선비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며 반발하였다. 이때 체포를 피해 전남 담양군 금성면(金城面)의 송훈(宋壎) 집에 은신하여 송진우(宋鎭禹)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 (음)5월 9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인통함원(忍痛含寃)’을 가슴에 새기고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봄 영광(靈光)의 선비 김용구(金容球) 등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또 1907년 봄에도 전남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화순(和順)의 양회일(梁會一)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1907년 10월 중순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 수십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전북 고창(高敞)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면서 약 4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李英華), 나주의 김준(金準),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이 합류하였다. 이처럼 여러 의병부대의 호응으로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기삼연의병 주둔지 문수사(전북 고창) [판형2] |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 선봉(先鋒) 김준,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총독(摠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의 이름으로 격문을 사방에 발송하였다. 격문을 통해 개항 이래 40년 동안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죄상을 성토한 후 조선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일제의 침략을 반드시 격퇴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고위관료로부터 모든 계층이 협력하여 500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격문의 말미에,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는 점을 명시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장성·함평·영광·나주·고창 등 주로 전라도 서부 지역의 양반 유생들이었다. 이들이 각자 의병을 규합하여 하나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였던 관계로 회맹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거나, 기삼연의 제자들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이나 춘추의리를 중시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금성산성(전남 담양) [판형2] |
이들은 따로 광고문(廣告文)을 작성하여 사방에 게시하였는데, 주로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즉, 곡식의 역외 유출 및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의 도조(賭租)의 의소(義所) 납부, 세금 납부 금지, 자위단(自衛團) 및 일진회 가입 금지 등이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외국 상품의 폐해로 인한 민중의 생존권을 우선시하였으며, 친일 세력의 확산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의 의병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광고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어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정책을 알리고 나아가 세계 각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도모하자고 호소하였다.
의병 활동은 1907년 10월 중순부터 1908년 2월 초 순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10월 하순 고창 문수사전투를 시작으로 전북 무장주재소 공격, 11월 고창읍성 점령, 12월 장성우편취급소 및 영광주재소, 1908년 1월 담양우편취급소, 함평주재소, 광주·영광·나주의 일본인 농장 등 일제 침략 기구와 일본인 농장을 집중 공격하였다. 친일 세력의 처단과 납세 거부 투쟁에도 앞장섰는데 면장과 일진회원, 자위단장 등이 주된 제거 대상이었다. 세무 업무를 담당하는 면장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의 공격을 통해 납세 거부를 유도하였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부호가의 곡식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제거에 현상금을 걸거나 일본인 농장이나 상점을 닥치는 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장성을 비롯한 영광·담양·함평·나주·고창 등 전라도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담한 공격은 일제 군경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고창읍성과 함평·영광·법성포 등을 일시 점령하여 다량의 무기와 곡식을 확보하였다. 특히 고창읍성 점령시 고창 지역민들의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전투 역량을 제고하려고 총기를 수집하고 포수의 모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곳곳에서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였으며, 1908년 2월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는 수비대 조장 등 2명의 일본군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1908년 1월 25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광주수비대는 10개 종대(縱隊)를 편성하여 전남 서부 지역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귀순을 권유하여 의병의 분열을 노렸다. 이로 인해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여러 부대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겨울이 닥치자 잠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혹한을 피하며 험준한 요새인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주둔하면서 병사들과 같이 과세(過歲)할 작정이었다.
기삼연 체포 보고문(1908) [판형3] |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은 그를 체포하려고 금성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그만큼 발생하였다. 발병(足病)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여 통령 김용구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전북 순창(淳昌) 구수동(九水洞, 일명 槽洞)의 친척 기구연(奇九衍)의 집에 은신하였다. 1908년 2월 2일 설날 아침 일제의 수비대가 마을을 포위하였다. 이른바 이마무라토벌대(今村討伐隊)는 기구연의 집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를 찾아내어 광주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봉장 김준은 날랜 병사 약 30명을 선발하여 기삼연 의병장 탈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 경양역(景陽驛) 근처까지 추격하였으나 이미 그곳을 통과한 뒤였다. 기삼연 의병장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광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지자, 일제는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였다. 즉,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광주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불법적 총살을 자행한 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일제는 “누차 도주를 기도하고 반항하여 부득이 총살”하였다고 호도하였다. 발병이 심해 걸음걸이도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자신들이 불법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이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키던 꿈 또한 헛되었구나(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순국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저술로는 『기삼연실기(奇參衍實記)』(『省齋奇先生擧義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51년 1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 하남(河南) 마을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어려서 노사의 문하에서 삼종질(三從姪)이자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혔다. 대단히 명민(明敏)하여 한 번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여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경사(經史)와 병서(兵書)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필법(筆法)이 절묘하였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한 과거(科擧)에는 나가지 않았다.
1895년 후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남에서는 장성이 가장 먼저 의병 준비에 앞장섰다. 이미 병인양요 당시 노사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은 먼저 복수토적(復讐討賊)과 단발령 철폐 등을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거의(擧義) 준비에 돌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기우만은 근왕(勤王)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장성의병은 기우만의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 외에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였고, 거사 과정에서 유생과 향리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의 지도부는 기우만을 비롯하여 기삼연·기재(奇宰)·기우익(奇宇益)·김익중(金翼中) 등이었는데, 대부분 노사의 제자였다. 이에 약 300명의 장정을 불러 모아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였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렀다. 처음에 의병들을 능숙하게 훈련시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을미의병 실패 후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기삼연의 편지 [판형2] |
1896년 (음)2월 7일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일 후 나주로 이진하였다.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근왕하기 위한 북상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나주의병을 나주의소(羅州義所), 장성의병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전라도 각지의 의병을 (음)2월 그믐날 광주(光州)에 집결시키자고 통문을 돌렸다. 이들이 광주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파견하여 국왕의 명령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기우만이 다른 양반 출신 의병장과 마찬가지로 장성의병의 해산을 결정하자, “선비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며 반발하였다. 이때 체포를 피해 전남 담양군 금성면(金城面)의 송훈(宋壎) 집에 은신하여 송진우(宋鎭禹)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 (음)5월 9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인통함원(忍痛含寃)’을 가슴에 새기고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봄 영광(靈光)의 선비 김용구(金容球) 등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또 1907년 봄에도 전남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화순(和順)의 양회일(梁會一)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1907년 10월 중순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 수십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전북 고창(高敞)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면서 약 4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李英華), 나주의 김준(金準),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이 합류하였다. 이처럼 여러 의병부대의 호응으로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기삼연의병 주둔지 문수사(전북 고창) [판형2] |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 선봉(先鋒) 김준,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총독(摠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의 이름으로 격문을 사방에 발송하였다. 격문을 통해 개항 이래 40년 동안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죄상을 성토한 후 조선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일제의 침략을 반드시 격퇴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고위관료로부터 모든 계층이 협력하여 500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격문의 말미에,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는 점을 명시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장성·함평·영광·나주·고창 등 주로 전라도 서부 지역의 양반 유생들이었다. 이들이 각자 의병을 규합하여 하나의 의병부대를 형성하였던 관계로 회맹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거나, 기삼연의 제자들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이나 춘추의리를 중시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금성산성(전남 담양) [판형2] |
이들은 따로 광고문(廣告文)을 작성하여 사방에 게시하였는데, 주로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즉, 곡식의 역외 유출 및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의 도조(賭租)의 의소(義所) 납부, 세금 납부 금지, 자위단(自衛團) 및 일진회 가입 금지 등이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외국 상품의 폐해로 인한 민중의 생존권을 우선시하였으며, 친일 세력의 확산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의 의병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광고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어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정책을 알리고 나아가 세계 각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도모하자고 호소하였다.
의병 활동은 1907년 10월 중순부터 1908년 2월 초 순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10월 하순 고창 문수사전투를 시작으로 전북 무장주재소 공격, 11월 고창읍성 점령, 12월 장성우편취급소 및 영광주재소, 1908년 1월 담양우편취급소, 함평주재소, 광주·영광·나주의 일본인 농장 등 일제 침략 기구와 일본인 농장을 집중 공격하였다. 친일 세력의 처단과 납세 거부 투쟁에도 앞장섰는데 면장과 일진회원, 자위단장 등이 주된 제거 대상이었다. 세무 업무를 담당하는 면장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의 공격을 통해 납세 거부를 유도하였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부호가의 곡식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제거에 현상금을 걸거나 일본인 농장이나 상점을 닥치는 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장성을 비롯한 영광·담양·함평·나주·고창 등 전라도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담한 공격은 일제 군경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고창읍성과 함평·영광·법성포 등을 일시 점령하여 다량의 무기와 곡식을 확보하였다. 특히 고창읍성 점령시 고창 지역민들의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전투 역량을 제고하려고 총기를 수집하고 포수의 모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곳곳에서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였으며, 1908년 2월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는 수비대 조장 등 2명의 일본군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1908년 1월 25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광주수비대는 10개 종대(縱隊)를 편성하여 전남 서부 지역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귀순을 권유하여 의병의 분열을 노렸다. 이로 인해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여러 부대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겨울이 닥치자 잠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혹한을 피하며 험준한 요새인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주둔하면서 병사들과 같이 과세(過歲)할 작정이었다.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든,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에서이지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라. 이 군사를 한 번 파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기삼연 체포 보고문(1908) [판형3] |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은 그를 체포하려고 금성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그만큼 발생하였다. 발병(足病)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여 통령 김용구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전북 순창(淳昌) 구수동(九水洞, 일명 槽洞)의 친척 기구연(奇九衍)의 집에 은신하였다. 1908년 2월 2일 설날 아침 일제의 수비대가 마을을 포위하였다. 이른바 이마무라토벌대(今村討伐隊)는 기구연의 집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를 찾아내어 광주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봉장 김준은 날랜 병사 약 30명을 선발하여 기삼연 의병장 탈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 경양역(景陽驛) 근처까지 추격하였으나 이미 그곳을 통과한 뒤였다. 기삼연 의병장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광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지자, 일제는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였다. 즉,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광주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불법적 총살을 자행한 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일제는 “누차 도주를 기도하고 반항하여 부득이 총살”하였다고 호도하였다. 발병이 심해 걸음걸이도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자신들이 불법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이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키던 꿈 또한 헛되었구나(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순국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저술로는 『기삼연실기(奇參衍實記)』(『省齋奇先生擧義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