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문도는 품격 있는 여행과 피서지
거문도는 대서양 카리브 해의 낭만을 자아내는 다도해 여수의 명품여행지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한 카리브 해의 도미니카 제도국처럼 서양인이 조선에 처음 발을 디뎌 논 곳이다.
따라서
한국의 다도해는 카리브 해의 여러 섬과 물빛이 흡사해서 한국의 카리브 해라고 부른다. 그 아름다운 바다의 중앙에 거문도가 있다.
서울에서
3시간 20분 ktx를 타고 여수로 가서 여객선 터미널에서 거문도 행 배를 타고 2시간 20분 물살을 가르고 달려 환상의 고도 거문도에 이른다.
배삯은 36,500원.
여수는
세계 4대 미항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볼거리 바다 환경을 가지고 있다. 여수 해양 엑스포 단지와 오동도를 돌아 향일암을 둘러보고 거문도 뱃길에
오른다. 여객선은 아름다운 다도해의 작은 섬들 사이로 지난다.
여수
가막만은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이 군락을 이룬 바다이다. 돌산도. 경도, 횡간도, 개도, 하화도, 둔병도, 백도. 낭도, 사도, 화태도, 금오도,
연도, 안도, 월호도, 제도, 조발도, 적금도의 연륙도를 바라보며 남서쪽으로 한참 달리면 남해 멀리 손죽도, 초도군도를 거쳐 거문도에 도착한다.
거문도는
서도, 동도, 고도 3섬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문도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신령의 섬. 백도가 있다. 거문도 여행의 절정은 백도에
있다. 신령의 섬 백도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거문도에
가면 아름다운 그녀, 인어공주 신지께를 만날 수 있다. 초승달이 뜰 즈음 물개바위에 올라 노래를 부른다는 여인이다. 거문도에 가면 꼭 그녀와
황상적인 파도를 타고 데이트를 즐겨보라. 운 좋은 자에게 주어지는 행운이다.
*전설의
인어공주 신지께, 거문도 녹산 등대와 코바이 해변의 물개바위에 비바람이 불고 태풍이 올 때면 인어공주 신지께가 물개 바위에서 나타나서 바다에
돌을 던진다. 풍덩풍덩 돌을 던지는 소리가 온 거문도에 울려 퍼진다.
어부들은
이 소릴 들으면 태풍이나 풍랑이 오는구나 하면서 어업을 중단한다. 그렇게 신지께 공주는 태풍을 예고 해 주는 여신이다. 때문에 거문도 사람들은
태풍을 맞아 배가 파손되어 생명을 잃은 적이 없단다, 그녀는 생명을 구해주는 바다의 여신이다.
그리고
거문도에 가서 무인등대 앞에서 먼 바다의 소릴 들어보라. 평생 들어보지 못한 내안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내안에 존재한 가슴을 치고 싶은 양심의
소리에 잊어버린 자아를 발견하고 반성하면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소원은 꼭 백도에 가서 빌어라. 반듯이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거문도는
한 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어족과 대량의 어량이 잡히는 어장이다. 우리나라 최대 삼치 어장으로 맛있는 참치구이와 갈치 회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막 잡아 올린 은빛 삼치를 굽고 싱싱한 갈치회로 감성돔으로 소주잔을 기울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안주에 술 한
잔을 걸치고 나면 바다의 낭만을 최대로 즐길 수 있다.
역시
여행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다. 두개가 상승할 때 여행의 풍미는 더한다.
아름다운
바다의 정취에 취해보는 여행과 먹을거리 취향을 즐긴 후 정신적인 피안도 필요하다. 거문도엔 품격 있는 여행과 피서를 즐길 수 있는 소재가 많다.
거문도는 역사적으로 이야기 자료가 많은 섬이다.
영국해병의
묘지에서 거문도 사건을 비롯하여 바다의 전설 신지께 인어공주 이야기, 등대의 고독에서 진솔한 인생을 음미해봄도 좋다. 여행과 피서에서 자기
고찰의 시간과 재충전의 시간은 일과 꿈을 새롭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2.거문도
사건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사
여수
거문도는 서양인 사절단이 첫 상륙한 땅이다. 영국 선장 베르체르. 해밀톤이 1832년에 처음 거문도에 와서 이 섬을 해밀톤이라 명명하였다.
대원군은
문을 굳게 닫고 서양 세력에 맞섰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선 개혁파들이 일본을 업고 갑오개혁을 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쇄국은 더욱 강해졌다.
서양 열국이 거세게 개항을 두들겼으나 실패, 가장 먼저 세력을 확보한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동방의 진주 불라디보스톡을 개척하고 일본과 조선, 청나라를 공략하였다. 1854년 러시아는 조선의 영흥에 자릴 잡고 거문도에 함선을 정박시켜
놓고 동해안에서 남해안, 서해안을 둘러보며 조선 영토를 측량 하였다.
이에
영국이 대항하고 맞섰다. 1855년 영국은 1천명의 해군으로 거문도를 무력 점령하였다. 청나라는 영국의 거문도 주둔을 질타하였다. 마침내
협상으로 1887년 9월2일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2년 반 동안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3.
백러시아 곤차로프의 ‘거문도 기행문’ 일부
1854년
제정 러시아의 극동 진출 함대 ‘팔라디’호의 푸티아틴 함장(전권사절단장)은 비서관 곤차르프와 중국인 통역관 고시게비치를 데리고 조선 해안을
측량하다가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섬사람들과 강하게 맞섰다.
귤은
김류와 김양록이 나서서 청나라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필담(筆談-글을 써서 대화를 함)으로 부당함을 지적하자 러시아는 친화적으로 그를 설득시켰다.
뒤이어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 했을 때도 김류와 김양록이 나서서 필담으로 부당함을 전하자 영국은 섬사람을 보호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필담1.
곤차로프는
거문도에서 겪은 이야길 기행문으로 남겼다. 그는 거문도에 와서 김류와 한·러 교섭을 필담으로 한 기행문을 썼다. 러시아가 한국을 보는 관점에서
사실을 외국인이 최초로 기록한 기행문이라 역사적 가치가 높다.
*.
1854년 3월 29일
우리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기 전에 해밀톤(거문도)으로 가고 있었다. 울라디보스톡에서 영흥을 거쳐 거문도(해밀턴)로 가는데 아직 300 마일이나 남았다.
비는 계속 내렸다. 수병이 갑판에서 지네를 발견하여 법석을 떨었다. 비와 안개 속을 날던 바다제비 무리가 함선 안으로 날아 들어와 바퀴를
잡아먹고 있었다. 참새 떼까지 날아와 먹이를 주었다.
*.
1854년 4월 4일
4월
2일, 아침에 해밀톤에 도착하였다. 섬은 마치 ‘물속에 떠있는 보석상자 같았다.’ 3개의 섬을 둘러싼 곳은 파도가 없는 호수이다. 정치적으로
조선은 독립국이지만 중국에 종속되어 있어서 조선왕은 중국의 황제로부터 권한을 승인 받아야 한다.
해밀톤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았다. 우리는 헤밀톤 섬 주민과 중국한자로 대화를 하였다. 조선인은 유구인(琉救人-오끼나와)과 비슷하다. 우리는 주민을
함선 안으로 불러들여 홍차와 빵과 비스킷과 램주를 대접했다.
그들은
처음 먹는 빵, 차, 램주를 즐겁게 마셨다. 그들은 우리가 입은 상. 하위로 구별된 양복과 장화를 보고신기하다며 입어 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피부색이 흰색이라고 웃음을 자아냈다. 해밀톤 섬사람들의 생활은 지저분했다. 그러나 도민들은 친절하였다.
오늘은
섬사람들이 우리 함선으로 올라와서 생선 20마리와 4통의 물을 주고 갔다. 우린 모든 섬 주민들이 우리배로 데리고 와서 내부를 보여주었다.
소통은 주민대표 노인 2명과 우리 측의 아바쿰 신부와 고시게비치(중국어 통역)를 통해 한자로 필담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염주를 손에 든 사람을 보았다. 아마도 라마교 스님인 듯하였다.
*.
1854년 4월 5일
어제
다소 불쾌한 사건이 발생했다. 동료 중 3명의 병사가 뭍에 올라갔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이유는 초가지붕 위로 뛰어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다에 처넣었다. 병사들이 총기로 위협했더니 마을 대표가 긴 문장으로 사죄문을 썼다. 모르고 한 일이다. 우린 함선으로 온
섬사람들에게 홍차와 보트카와 비스킷을 대접하였다.
*.
1854년 4월 18일
함선은
해밀톤에서 15일을 보내고 대마도로 떠났다.
1854년
5월 2일부터 5월 23일까지의 22일간, 두만강 어귀에서 거문도까지 해역 실측 했다. 이것은 우리 군함에 의한 최초의 한반도의 동해안
측량이다. 함장 푸티아틴은 이 작업을 통해 영국 해군성이 만든 조선의 지도를 대폭 수정하였다.
함장
푸티아틴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측량 허가증은 얻지 못했으나 조선 국왕에게 사실을 말하고 개항을 요청하였다. 우린 조선의 해안을 정밀 탐색하여
조선의 지도를 만들었다.
4.
김류의 필담 ‘해상기문(海上奇聞)’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자 러시아와 청나라가 반발하였다. 마침내 삼사회담이 이루어진다. 청나라 사신 정여창과 러시아
제독 푸티아틴, 영국의 해군제독이 회담을 열 때 거문도 유학자 김류가 필담으로 중재를 하였다.
청나라
사신 정여창은 어떻게 이 작은 섬에 높은 학식을 가진 자가 많은가 라면서 이 섬을 거문 巨門(큰 학문을 하는지가 많음)이라 이름
지었다.
그때
4상 회담의 내용을 김류가 자상하게 적었으나 일개 개인이 나라를 대표하여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벌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기록을
어딘가에 깊이 숨겨 뒀다는 것이다. 그것이 김류의 해상기문(海上奇聞)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기록을 남겼다. 푸티아틴 함장의 동양 개척선의 비서 곤차로프가 기행문으로 남겼다. 그는 갓을 쓴 두 필담 노인은 만회(晩晦) 김양록과
귤은(橘隱) 김류라고 밝혔다. 만회는 정작리 마을 훈장이고 귤은은 유학자였다. 그들은 정부 관문이 할 수 없는 실력의 필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와 나눈 필담은 정부 관원이 몰랐다. 두 노인은 학문이 높아 우리가 감탄할 정도로 언어구사를 잘했다.
귤은은
푸티아틴 제독으로부터 지방관에게 전달할 외교 문서를 도민의 안전 무사를 위해 묵살해 버렸다.
귤은과
푸티아틴의 필담
푸티아틴
: “조선은 서양의 어느 나라와도 통상을 맺지 안했으나 이미 중국은 5개 항구를 열어 통상의 길을 열었고 서양 열국이 잇달아 서로 접촉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러시아는 조선과 화친(和親) 조약을 맺고자 거문도에 왔습니다.”
귤은
: “제독, 나는 관아의 대표가 아니고 이곳 주민일 뿐입니다. 나와는 그런 이야길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푸티아틴:
“그래서 쇄국하는 조선에 통상의 길을 열려고 잠시 머물 것이니 허락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내 말을 대변해 주시오.”
귤은
: “조선이 화친을 거부하는데 러시아가 거문도에 온 것은 불법입니다.”
푸티아틴
: “불법이며 잘못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머잖아 조선과 국교를 틀 것입니다.”
귤은
: “잠시 머물다 가십시오. 그러나 간절히 바라건대 잠시 잠깐 거문도에 정박했다가 간 것으로 말하십시오. 그리고 이곳에 있는 한 민심의 동요가
없게 행동을 조심해 주십시오.”
푸티아틴
: “알겠습니다.”
김류:
“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어디에도 남기면 안 됩니다. 그 사실을 조정에서 알면 난 처벌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남긴 해상 기문은 일종의 외교 문서였다. 1854년 4월 14일 이전에는 조선의 어느 곳에도 외국인이 기항 한 적이 없으며 거문도에
최초로 러시아가 기항했고 또한 김류와 푸티아틴이 나눈 여러 장의 해상기문은 최초로 수교한 외교문서임은 분명하다. 라고 푸티아틴은 밝혔다.
5.
김류의 “거문도 삼호팔경(三湖八景)”
(고도. 동도. 서도)
橘亭秋月(귤정추월)
竹林夜雨(죽림야우)
廘門怒潮(녹문조조)
龍巒落照(용만낙조)
白島歸帆(백도귀범)
梨谷明沙(이곡명사)
紅國漁化(홍국어화)
石凜歸雲(석름귀운)
유자
숲 정자에 달빛이 비치더니
대나무
숲에 밤비가 내리고
녹산
벼랑에 성난 파도가 물기둥을 이루고
용암
사이로 낙조가 걸리며
백도에서
돌아오는 고기잡이 돛단배가
배꽃
같은 모래와 수정 같은 바다에 닿고
고깃배에서
뿜어내는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며
바위
능선에 안개가 걷히니 돌기와 지붕이 보이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