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 주 믿는 자들 오라네
주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나 날마다 점점 가까워오죠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구원받기 늦지 않아요.
셋 둘 구름타고 다시 오실 날 날마다 점점 가까워오죠
이 찬양은 내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이 부른 노래다.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오십대 중반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 가사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노래는 천국이 저 높은 우주에 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한다.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도록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노래다.
나이가 들어 천국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고 보니 이런 노래가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반성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배운 노래는 우리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그것은 세계관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천국이 저 우주 어딘가에 있을 것이므로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의 여관집처럼 잠시 머물다 갈 곳이 된다. 그래서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삶으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젊은 시절을 지나오면서 생각한 인생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이었다.
청년 시절 나는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새겼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어린 시절에 부른 노래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는 사도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번 되살아났다. 그렇다! 땅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그것이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내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잠시동안 누리지 못할지라도 영원한 즐거움이 저 위에 기다리고 있으니까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오후에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집 근처의 하천변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을 하면서 최근에 설교한 내용을 마음 속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특히 지난 주일에 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소개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아닌가? 그곳은 저 높은 우주에 지어지고 있는 천국집이라고 어린 시절에 배운 기억이 났다. 이 글의 초두에 소개한 노래는 바로 오늘 산책하는 동안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다른 이야기인가!
나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를 들으며 개울에서 먹이를 찾는 두루미처럼 생긴 새를 보았다. 노란 발로 개울물을 비비면서 먹이를 찾는 새의 지혜로움을 보며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고 하늘에는 멀리 구름이 조금 보인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초여름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리고 문득 내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위를 바라보고 살아왔다. 저 높은 우주에 만들어지고 있는 천국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살았다. 천국에 우리들의 집이 건설되고 있으며 그 집이 완공되면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땅보다는 하늘에 들림 받을 것을 기대했고, 생전에 휴거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죽으면 천국에 올라갈 것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늘나라에 비하면 이 세상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아왔다. 천국과 관련된 일들 외에는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가치에 비하면 금방 그 빛이 바래고 만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여기 이 땅이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의 나라다. 천국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는 계시록의 환상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환상과 일치한다. 예언자들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이 올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밧모섬의 요한은 그것을 새 예루살렘이 하강하여 이 땅을 새롭게 하는 모습으로 그려주었다. 그것은 새롭게 된 세상을 말한다.
성경 이야기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 세상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들려준다. 누군가 이 땅을 더럽게 하면 그들은 심판을 받는다. 땅이 그들을 토하여 낸다(레 18:25).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늘 이 땅을 주목하신다. 그 관심사는 언제나 땅에 있으며, 이 땅을 관리하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신다. 인간을 만든 목적이 바로 그것 때문이고 계속적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이유도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경영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천국을 저 높은 우주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의미 있게 사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 이후에 들어갈 세상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게 되었을까?
신학자 톰 라이트는 그 원인을 헬라적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은 종말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론은 이 세상의 불의와 불법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말한다. 그런데 교회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바라는 신앙으로 왜곡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톰 라이트는 한탄한다.
그의 강연과 그의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2017년 톰 라이트의 휘튼 칼리지 강연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91
그의 책, The Day the Revolution Began 소개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94
되돌아보니, 지금껏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왔다. 이제부터는 땅을 바라보며 살아야겠다. 땅을 잘 관찰하고 사람들을 더 자세히 바라보면서 얼마나 아름답고 오묘한지 볼 수 있는 눈을 훈련하고 싶다. 땅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것을 보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 그려진 하나님의 청사진이 결국 땅에 구현되게 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하늘로 올라오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 그려진 그 청사진을 보고 땅에 그와 똑같이 만들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은 하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여 창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런 흔적은 곳곳에 드러나기도 하고 숨어 있기도 하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잠언 25:2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이 땅 곳곳에 숨겨 두셨다. 우리는 그 숨은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다. 인생은 그런 점에서 보물찾기 놀이와 같다. 이제 하늘로 올라갈 생각 대신에 하늘이 땅에 숨겨둔 보물찾기에 좀더 열심을 내고 싶다. 그 일을 더욱 잘하기 위해서 가끔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의 고백이 생각난다. 나는 지난 2018년 8월 설교에서 그의 고백을 소개했다. 그도 아마 이 땅과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새롭게 보는 눈이 열렸던 것 아닐까? 그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상가 중심에서 나는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거리를 오가는 이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었다. 비록 서로 낯선 사람들이지만 서로 이질적인 사람일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이로써 나는 격리된 꿈에서, 모든 것을 단념하는 세계이자 거룩한 곳이라 여겨지는 특별한 세계에 관한 거짓된 자기 고립의 꿈에서 깨어났다.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사는 거룩한 존재라는 망상은 모두 꿈이다. 이는 내 소명을 의심하거나 내 수도원 삶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내가 회의한 것은 우리가 수도원에 대해 너무나 쉽게 착각하는,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
나는 우리가 수도원을 생각할 때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이 순진한 망상을 16-17년 동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운명이다. …나는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몸소 성육신하신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Merton, Thomas.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Image. 157쪽. ISBN 978-0385010184. 2018년 1월 15일에 확인함[위키사전에서 재인용].
2018년 8월 설교안:
https://cafe.daum.net/Wellspring/Vfav/5
그러고 보니, 토마스 머튼이 죽은 해에 내가 태어났구나! 오늘 나의 깨우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이 땅을 살아간 선배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바른 깨우침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구도자의 길을 담담하게 걸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