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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즐거움을 회복하자(시119:161-174)-2017.1.29
예수 믿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 인생의 행복이요, 즐거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도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마지못해 억지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즐겁고 행복한 믿음생활을 하기 원하십니다. 성도는 반드시 믿음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안에 믿음의 즐거움이 없다면 회복하셔야 합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요,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즐겁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장 분명한 이유는 구원의 즐거움에 있습니다.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은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구원으로부터 시작된 즐거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드린 기쁨을 아십니까? 세상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즐거움을 아십니까?
모든 죄악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내 영혼이 기뻐하는 즐거움을 아십니까? 감히 내 자신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끝까지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신뢰의 기쁨을 아십니까? 나 같은 사람을 주의 일군 삼아주신 헌신의 기쁨을 아십니까? 예배의 기쁨을 아십니까? 각 사람의 개인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게 된 즐거운 일들을 감히 무엇으로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혹시 내안에 믿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 똑같은 교회 한 목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감흥이 없는 믿음생활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열차를 타고 가면서도 지옥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을 내며 피곤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 하는 것과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은 천양지차가 납니다. 만일 우리 안에 구원의 즐거움이 분명하다면 결코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즐거운 상상을 하면 즐거워집니다. 이번 설날연휴기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향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즐거운 상상 때문에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즐거운 귀향을 합니다. 믿음도 본향을 생각하면 정말 즐겁고 신나는 일입니다. 감히 상상만해도 기쁘고 즐거운 일 아닙니까? 찬송가 85장을 보십시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항상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내가 기쁘고 즐거워하면 모든 범사가 행복합니다.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딴 근심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감히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국민일보에 도전받은 기사가 하나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의 ‘아혹’이라는 첫 크리스천 주지사가 법정에서 외로운 싸움을 한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는 자카르타 시민들의 70%의 지지를 받는 주지사인데 코란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법정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V자 손을 흔들고 증언합니다.
“저는 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한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사(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지사 자리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주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여러분의 주지사가 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딴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면 은혜가 들어오고, 은사가 들어옵니다. 행복이 들어오고, 축복이 들어옵니다. 때문에 믿음의 성도는 일시적으로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적인 것이나 자극적인 것으로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분적인 것으로도 안됩니다. 어떤 이는 눈으로 즐거워합니다. 귀로만 즐거워합니다. 입으로만 즐거워합니다. 손으로만 즐거워하는 자도 있고, 발로만 즐거워하는 자도 있습니다. 건강한 성도는 전인적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시편 기자는 어떤 것을 즐거워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말씀을 즐거워했습니다(161-163절)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즐거움도 있고 영적인 즐거움도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즐거움도 천차만별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즐거움은 다르고, 은사에 따라서 즐거움이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인 즐거움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즐거움의 교과서입니다. 다른 것은 보조 교재에 불과하며 참고서일 뿐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시며 말씀으로 능력과 권세를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직 말씀으로 세상이 운행되어집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강퍅해도 변화됩니다. 말씀이 모든 영혼을 고치고 소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집니다. 말씀을 읽고 듣다가 깨어지고 녹아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파고들어 쪼개며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능입니다. 때문에 성도된 자는 말씀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이 가장 확실합니다. 가장 든든합니다. 그러나 말씀 밖에서 얻는 즐거움은 뭔가 감동이 약하고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즐거워하면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려야 합니다. 말씀이 영혼을 즐겁게 하는 양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즐거움을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날마다 내 영혼을 만족시켜주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절). 그리고 수없이 많은 곳에서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주의 말씀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고난 중에 멸망했을 거라고 증언합니다(시119:92). 심지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자살하려다가 하나님이 말씀이 떠올라서 죽음을 포기했다고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 162절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개선장군이 승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공부하는 학생이 책을 보는 것이 지겹다면 문제가 있는 학생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읽는 것이 싫증나고 짜증난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꿀송이보다 더 달고 기쁘고 즐거움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가시가 찌르는 것보다 더 아픈 통증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는 인모초보다 더 쓴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이 수면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달고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 영혼이 건강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읽던지 듣던지 항상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고달프십니까? 혹은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십니까? 한숨과 탄식밖에는 없습니까? 기쁨도 즐거움도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 같습니까?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같이 살다 가고 싶습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분명히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요, 최고로 즐겁고 행복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면 말씀이 여러분을 존귀하게 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즐거이 여기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존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말씀을 즐거이 여기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은혜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엄마 젖을 물고 있을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좋아서 옹알이를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여기시어 진정한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찬송을 즐거워했습니다(164-166절)
모든 성도는 말씀을 통해 영혼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원칙입니다. 말씀을 통해 얻는 기쁨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찬송을 통해서도 우리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지으신 목적도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찬송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드리는 선물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즐거움의 선물이라면, 찬송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즐거움의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며, 찬송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면서 자기의 스트레스를 푼다거나, 찬송하면서 자기감정에 집중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분의 최종적인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씩 청년들이 손을 들고 찬양하며, 땀을 흘리며 열심히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찬양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하여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찬양이 되기를 축복하는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찬양이라면 반드시 내 영혼에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영은 영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즐겁게 찬양했다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즐거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반드시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셔야 합니다. 때문에 찬양은 영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이나 분위기, 기교나 음악적인 테크닉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찬양을 통해서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거나, 즐거움을 보상받으려는 어떤 행위도 찬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찬송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찬송을 통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노래는 같은 곡을 서너번 반복하여 부르면 식상하고 질립니다. 노래방 같은 곳에서 같은 곡을 두 번만 불러도 옆 사람에게 마이크 빼앗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찬송은 한곡을 수십 번 수백 번 불러도 질리지 않습니다. 찬송은 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반복해서 부를수록 깊은 맛이 납니다. 어떤 집회는 한 두 시간을 같은 곡을 불러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찬송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찬송의 힘입니다. 찬송의 능력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으로 악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유되며, 옥문이 열립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통해 두려워하며 회개합니다. 찬송은 대단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은 모든 열방과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를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영으로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찬양은 찬양이 아닙니다. 그리고 즐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아니한 자는 찬양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찬양은 무시로 해야 합니다. 찬양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하는 음악이 아닙니다. 예배의 부속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찬양은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합니다. 찬양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저는 제 승용차가 제 개인 스튜디오입니다. 저 혼자 복음송 가수가 되기도 합니다. 메들리로 찬양합니다. 그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찬양합니다. 저 혼자 감동을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벅찬 은혜가 밀려옵니다. 때로는 회개와 감사의 고백이 밀려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3: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심지어 찬송의 옷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찬송을 즐겁게 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기자는 지금 상황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161절을 보면,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애매하게 핍박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으로 즐거움을 잃지 않았으며, 164절에서는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고 증언합니다. 어찌 보면 찬양할 형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일곱 번씩 찬양했다는 것은 숫자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찬양이 그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찬양이 생활화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일곱은 숫자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고 곤고할 때, 실망스럽고 낙심될 때 언제든지 찬양해야 합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울 때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찬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내 영혼의 컨디션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찬송을 위한 찬송이 아니라 찬송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찬송은 내 영혼을 만족케 하고 내 영혼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본문의 기자도 무고한 핍박 중에서 찬송하는 삶을 살았더니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165절을 보십시오. 큰 평안이 찾아오고 장애물들이 제거되었습니다. 불안이 변하여 평안이 되고, 괴로움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며,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래도 찬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찬양하면 내 영혼이 잘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찬양하면 수지맞습니다. 찬양을 통해 내 영혼의 즐거움이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순종을 즐거워했습니다(166-169절)
이 세상에 죄를 짓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죄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합니다. 두렵게 합니다.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 내 마음에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만일 불순종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분명히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순종하면 당당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순종은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령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즐거움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짓고 당당하고 기분이 즐거운 자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순종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큰 즐거움이 있습니다. 놀라운 행복이 있습니다. 가끔 순종할 마음이 없었는데 억지라도 순종했더니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경험들이 한 두 번은 다 있었을 것입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불순종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순종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보상해주십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자신이 하염없이 초라해지고 정죄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영혼 속에서는 어떠한 즐거움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에 짜증을 냅니다. 즐겁지 않다는 반응입니다. 살아도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순종에서 출발하며, 믿음의 시작도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순종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기자는 순종의 즐거움을 톡톡히 맛본 사람입니다. 166절을 보십시오.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167절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168절에는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지켰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고한 핍박중애서도 자신을 관리하고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형편이나 상황 중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상황이나 형편을 보고 불순종하지 말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순종하면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에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하나님은 믿음의 성도들이 항상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면 됩니다. 그분의 성전이 되면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구하고 찾아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날마다 천국을 이루며 사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천국은 내안에 계신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거워하시고, 찬송으로 즐거워하시며, 순종으로 즐거운 인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요,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며, 주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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