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봄, 꽃
애 잘 보는 동생들 지오디 (GOD)의 노래 "거짓말" 들어보셨죠? 요즘 가요의 가사를 곱씹어보면 작사가들이 우리말의 시적인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랩의 영향 때문인지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가사의 거침없는 말투를 탄식하며 한동안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인가 "거짓말"을 차분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아주 솔깃했습니다. 가사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몇 군데 있긴 해도 가사와 곡의 조화가 뛰어난 곡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허스키한 목소리와 그걸 받쳐주는 코러스가 재미있는 겁니다. 고음 솔로가 애인에게 가라고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하는 동안 낮은 음으로 계속되는 코러스는 가지마, 기억해, 등 완전히 상반된 고백을 중얼거립니다. 노래는 그렇게 끝나는 것 같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 애인을 떠밀던 솔로가 갑자기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이번에는 코러스가 애인을 담담히 보내려 합니다.
이렇게 상반된 두 편으로 의식이 분열된 경험 다들 갖고 계시죠? 사랑하지만 지긋지긋해서 떠나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러나 섣불리 보내기도 두려운 대상.
이번 (혹은 지난) 봄은 바로 그런 대상입니다. 노란 보자기 나뭇가지 가지마다 매어 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동구 밖으로 버선발로 달려나가, 손아귀를 덥석 잡아 맞아들였던 봄이었는데 바로 그 봄에 조금씩 싫증났기 때문이지요.
이번 봄에 세웠던 거대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겨우 내 냉기로 팽팽했던 긴장감마저 흐느적거리며 풀어졌습니다. 그래도 봄이 가져다 준 생기 덕분에 이런 결산이라도 뽑을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알기에 봄이 차츰 꽁무니를 빼자 아쉬움을 느낍니다.
한이 많은 만큼 정도 깊어지는가요?
원래 꽃들이란 순서를 지켜 피어나는 게 자기네들 도리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입니다. 기적처럼 순결한 자태를 뽐내다가 부뚜막 행주처럼 지는 하얀 목련의 충격과 곤혹으로 봄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색상 유치찬란한 개나리 진달래가 마구 마음을 설레게 한 뒤 푸른 잎사귀들 아래로 스산하게 떨어지면 무참히 누워있는 그 꽃잎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모처럼 눈길이 땅에 머뭅니다. 그 때 비로소 거기 촌스럽지만 꿋꿋하게 민들레가 서 있고 눈에 띨까 두렵다는 듯 보라색으로 치장한 제비꽃이 수수하게 핀 이름 모를 들꽃과 어울려 앉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난이 고상하게 개화하면 그걸 시샘하는지 호스를 타고 물이 힘차게 흐르듯 나무 줄기를 타고 벚꽃이 요란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와 한바탕 요염을 떨다가 요절합니다. 분홍빛 눈처럼 나리는 벚꽃의 꽃잎들은, 겹겹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느라 게으르게 봉오리 여는 장미 위로 떨어져 내려야 합니다. 이게 꽃들의 순리입니다.
그런데 올 봄꽃들은 일제히 개화하여 일제히 지는 그런 멋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자기네들 나름대로 수고하여 꽃망울을 터뜨렸겠지만 어쩐지 영양실조 든 아이 얼굴에 핀 버짐처럼 메말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빛 바랜 색깔로 시작하는 진달래는 지켜보는 마음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벚꽃이 숱을 키우기도 전에 덩달아 질 이유는 또 뭡니까.
신용을 지키는 건 일편단심 민들레 하나 뿐인 것 같았습니다. 후에 푸지게 모란이 피어있는 걸 봤으나 별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꽃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쓰고 보니 꽃들에 대한 고발장 같네요. 봄을 고이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 몇 자 적어 봤습니다.
봄밤의 넋두리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