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귀순배우보다는 연기자로, 가수로 인정받고 싶어요."
평양연극영화학교 배우과 출신 배우 겸 가수 김혜영(미카엘라, 32)씨. 1998년 가족과 함께 탈북, 한국에서 연기생활 7년차인 그는 요즘 뮤지컬에 푹 빠져 있다. 196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최근 뮤지컬로 새롭게 각색돼 4~13일, 19~27일 서울 능동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공연될 '팔도강산'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여주인공 '순녀'역을 맡는다. 금강산에서 만난 평양예술단원 처녀를 잊지 못한 남한 총각이 북경에 날아가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미 가수로도 데뷔한 그는 첫 앨범 '첫사랑 오빠', 2집 '빰빠라 빠라'에 이어 이달말께 3집 '살짝쿵'을 선보일 계획이다. 최근엔 한국 대통령과 북녘 여인과의 사랑을 그릴 영화 '미래 나라'(가제) 출연도 확정했다.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는 김씨를 1월25일 서울 연희동 서울뮤지컬컴퍼니 2층 연습실에서 만났다. 뮤지컬 연습에 혼신을 다하다 잠깐 시간을 낸 김씨는 "제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되겠지만 이젠 한국 무대에서 연기자로, 가수로 자리를 잡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씨는 이미 청진사범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스카우트돼 평양국립연극단 주연으로 활약한 재원. 그런 만큼 한국에 정착하고나서도 '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나선 연기자의 길. 하지만 북녘에서 배운 연기와 한국에서 하는 연기는 너무 달라 처음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북한 연기가 틀에 박힌 신파와도 같다면, 남한식 연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어요. 맨처음 출연했던 작품이 서울방송(SBS) 드라마 '덕이'인데, 이 드라마에서 연기를 해보니 앞으로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3학년에 편입해 지난 2003년 8월 학사모를 썼어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투리와 발음 교정. 입에 볼펜을 물고 뉴스 아나운서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남들은 10년 걸려도 어렵다는 사투리 교정을 3년만에 해냈다. 북녘 특유 음색이야 어쩔 수 없이 남았지만 말투나 억양은 어느 정도 바로 잡혔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은 생활 적응. 북녘에서 무역업을 했던 아버지 덕택에 한국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도 모든 게 생소했다. 그는 '난 이제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배워 나갔다. 심지어는 명동이나 동대문시장에 일부러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상인들한테 눈총도 많이 받았다. 동료에게서"이런 거 (북녘에서) 먹어봤니?" 하는 물음을 받고 속이 상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같은 땅에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으로 적응했죠. 가끔 남한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을 보게 되는데, 그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있어요.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 '믿지 말라'는 말도 해드리고 싶어요. 속을 털어놨다가 상처를 입은 경우도 많았거든요."
생채기가 날 때마다 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신앙이었다. 지난 2002년 악극 '여로'를 공연하다 배우와 관객으로 만나 그해 가을 혼인한 성형외과 의사 이철용(미카엘, 36)씨 덕분에 이듬해 8월10일 서울 중계본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엄숙하기만한 성당 분위기가 참 좋다는 김씨는 세례를 받고 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춘천에서 개업한 남편 이씨와는 요즘 주말부부로만 만나지만 늘 전화를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남한 정착 이후 드라마 연기자에 연극인, 가수, MC, 뮤지컬 배우, 개그맨까지 안해본 역할이 없다는 그는 "북에서 넘어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차 사고에 총알이 귀를 스치고 때론 중국 공안(경찰)에 잡히기도 하고 난방도 안되는 집에서 7개월을 버텼는데 적응이 뭐가 어렵겠냐"고 반문한다.
그 때문인지 김씨는 욕심이 많다. 지난 1월 한양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친 그는 앞으로 남북간 차이와 원인, 대안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물론 연예 활동에 대한 욕심도 버리지 못한다.
수건으로 땀에 절은 얼굴을 씻고 화장을 고친 뒤 다시 연습하러 무대로 나서는 그의 땀과 열정이 삭막한 도심 속으로 넉넉하게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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