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es Brahms (1833-1897)
결혼은 안정일까 구속일까.
안정을 원한다면 부르지 않아도 따라오는 것이 구속이며
구속을 원치 않는다면 같이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안정일지도 모른다.
동전의 앞 뒷면 같은 이 둘의 특성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에
현재의 사랑과 영원히 함께하며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구속을 감수하며 결혼을 선택하겠고 아무리 아무리 사랑해도 구속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람은 안정을 잠시 접고 독신주의의 길을 걷는다.
사랑이 결혼으로 결말지어지지 않는 경우 중에는
앞으로 가고 싶으나 상대방의 파울로 인해 저지당하는 경우도 있겠고
내 갈길 막는 상대방에게 공격자 파울을 범해 중단되는 일도 있겠지만
천재 작곡가 브람스는 다분히 자신의 의지로 범한 결정들로 인해 64년 인생을 홀로 살았다.
7번의 사랑이 있었지만, 단 한 여인에게만 평생을 바치며.
-단 하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
1853년, 키 160cm가량, 푸른 눈, 긴 금발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예쁜 얼굴을 가진 20살 청년 브람스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고 당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작곡가 슈만(Robert Schumann)의 집을 찾아간다. 그 앞에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한 순간 브람스의 곡과 연주에 매료된 슈만은 부인 클라라(Clara Wieck Schumann)에게 이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 그녀를 불렀고, 이렇게 이 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클라라는 슈만이라는 남편의 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대 탁원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 본인도 브람스의 연주를 너무나도 좋아했으며 이러한 서로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존경은 그들 사이에 말로 꺼내지 못하는 사랑을 싹트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로 브람스보다 14살이나 많았지만 아버지보다 17살 연상인 어머니를 둔 브람스로서는 나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브람스는 그녀를 향한 사랑을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남편과 아이 7명을 두고 있던 클라라는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했다.
그 무렵 슈만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신경쇠약까지 가지고 있던 터, 급기야 1854년 라인 강에 투신을 감행했는데 미수에 그치긴 했으나 조울증에 정신 분열 증세까지 나타나며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여자 혼자 가장 역할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했던 클라라에게 브람스는 어느덧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고 브람스는 클라라와 아이들을 극진히 돌보았다.
그로부터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까지 브람스와 클라라는 친구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과 함께 수많은 브람스의 곡을 연주했으며 그 연주들은 클라라에게 적지 않은 경제적 도움이 되었다.
슈만의 죽음으로 비로소 둘의 사랑을 가로막을 벽이 없어진 그 때,
그토록 정열적이었던 브람스의 사랑 표현은 점차 수그러져 버렸다.
장애물이 없어지니 사랑이 식었을까?
브람스는 평생을 두고 클라라를 사랑하며 평생의 마음속 반려자로 여기며 아끼고 의지하며 살았다.
그저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 부담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을 뿐.
- 20대의 브람스 -
- 클라라 슈만 -
-1855년, 클라라와 요하임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회 프로그램-
-그녀에게서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
그 후 그는 데트몰트에서 궁정 음악 감독을 맡음과 동시에 가족이 있는 함부르크에서 여성합창단을 만들어 지휘하면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거기서 합창단 단원이었던 베르타 포루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길지 않은 시간의 사랑이었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베르타를 그는 사랑했는데(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를 제외한 브람스의 여섯 사랑은 모두 성악가였다) 결혼을 향한 더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함으로서 둘의 관계의 끝을 맺는다.
그녀의 결혼 후에도 베르타 부부와 좋은 유대관계를 갖고 지내던 브람스는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작품을 선물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자장가’이다.
브람스가 친구들과 함께 괴팅겐에 머물던 1858년 아가테 폰 지볼트(Agathe von Siebold) 라는 괴팅겐 대학교수의 딸이자 성악가였던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아가테는 브람스로 하여금 약혼을 하고 결혼 일보직전까지 가게 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들은 음악에 대해 같이 의견을 나누었으며 브람스가 쓴 가곡들을 그의 피아노에 맞추어 그녀가 부르며 사랑을 키워갔는데 둘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가 되자 그는 또다시 이런 편지를 쓰기에 이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좋을지 답을 주세요.”
아가테가 큰 충격을 받고 그를 떠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그 사건이후 아가테는 물론 브람스도 오랜 시간동안 이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클라라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아가테를 볼 때 마다 그녀의 슬픔을 같이 나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비슷한 일을 겪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마음을 브람스에게 전하기도 했다.
브람스는 아가테와의 이별 후에 현악 6중주 2번을 그녀에게 바친다.
- 아가테 폰 지볼트-
-그리고 또 다른-
브람스와 슈만가족의 인연?은 어디까지일까?
다음에 찾아 온 사랑을 이야기하자면 다시 클라라 슈만에게로 돌아간다.
슈만이 정신요양원에 들어갈 때에 클라라에게는 6명의 자녀와 배속에 8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을 때였는데 (딸 에밀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중 셋째 딸 율리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할머니 댁에서 자라며 집을 오갔다. 아가테와의 파혼 이후 클라라의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을 즈음, 그는 율리의 여성스러운 성격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긴다. 다행히 클라라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또다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브람스는 이후 율리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졌고, 몸이 유난히 약했던 그녀는 결혼생활 3년을 넘기지 못하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29세 때는 빈 여성합창단 소프라노였던 오틸리에 하우어와 사랑을 하며 가곡들을 작곡했으며, 나이 50에는 헤르미네 슈피츠와 사랑을 느끼며 ‘4개의 노래‘ op.96와 ’6개의 노래‘ op.97을 작곡하였으며, 57세에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알리스 바르비는 브람스의 노년 음악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 사랑, 하나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 사랑-
브람스가 63세 되던 1896년 봄, 그의 평생의 사랑이자 인새의 반려자로 믿어 살아왔던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클라라의 죽음과 자신의 다가올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성서에 가사를 둔 ‘4개의 엄숙한 노래’을 작곡한다. 이 곡은 브람스의 생일인 5월 7일에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발표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13일 후 클라라는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클라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고자 길을 떠났으나 당시로 4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지인들이 브람스를 위로해주기 위해 열어준 작은 음악회에서 그는 이 곡을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불렀는데,
노래를 했다기보다는 거의 흐느끼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897년 브람스는 세상을 떠난다.
다음은 1894년 클라라의 73회 생일에 보낸 브람스의 편지 중 일부분이다.
"버림받은 초라한 사나이로 하여금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늘 한결 같은 존경심을 갖고 당신을 생각하고 있으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당신께 모든 좋은 일, 멋진 일, 아름다운 일들이 있기를 온마음을 바쳐 기원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장가 (Brahms's Lullaby)
일찍이 작곡되어 베르타에게 선물했으나 브람스 작품번호 49(1868년 완성), “5개의 노래”중 4번째 곡으로 발표 된 곡이다.
‘요람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로 시작되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자장가 중의 하나다.
*현악 6중주 제 2번 (Streichsextett Nr. 2 G-Dur op.36)
다른 브람스의 곡들과는 다르게 다분히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멜로디의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1악장 Allegro non troppo에는 아가테의 이름 스펠링을 음이름으로 바꾸어 작곡이 되어있어 [아가테]라고도 불리는 작품이다.
*4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nge op.121)
이 곡의 원안은 평소에 절친하게 지냈던 엘리자베스 폰 헤르쪼겐베르크 부인의 사망을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1896년 클라라의 갑작스런 위독 소식에 편성을 바꾸어 지금의 바리톤 솔로와 관현악곡으로 탄생되었다.
4개의 노래 가사는 모두 성서에 기인하는데
제1곡 (전도서 3장):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다. 모든 게 헛되도다.
제2곡 (전도서 4장): 세상의 학대를 보았노라. 학대받는 자는 눈물을 흘리는데 위로하는 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보다 이미 죽은 자가 더 복되며 그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아 이 모든 일을 보지 못한 이가 더 복되도다.
제3곡 (외경 집회서 4장) 오! 죽음이여, 고통스런 죽음이여!
로 요약되는 삶의 덧없음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단조로 노래하다가
제4곡 (고린도전서 13장)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에서 장조로 변하여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두 번 반복하며 웅장하면서도 온화하게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