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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바꾼 궁녀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이나
잘 알려져있기에 여기서는 마지막 상궁 성옥염의 삶을 소개하면서, 이어 궁녀의 삶을 살펴본다.
조선 시대 마지막 궁녀, 성옥염 상궁
성옥염 상궁(成玉艶 尙宮, 1920년 ~ 2001년)은 창덕궁 낙선재 궁인 가운데 끝까지 남았었던 세 사람(김명길, 박창복)의 상궁 중에서 가장 젊은 상궁이었다. 학력은 보통학교(초등학교) 수준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고 손끝이 야물어 15세 때에 창덕궁의 침방(針房) 나인으로 입궁하였으며, 해방되던 그 직후까지 있었다가 안동별궁(安洞別宮)의 폐지에 따라 본궁(本宮)으로 들어와 있었다. 한국 전쟁 때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시고 피난살이와 정릉의 백씨 별장의 우거(寓居)살이를 거쳐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다.
"윤비는 61년 낙선재로 돌아와 피아노 연주와 불경 읽기로 소일하셨지. 늘 내게 '비록 왕조는 망했지만 궁녀로서의 체통과 권위를 지켜야 한다' 고 가르치셨어" 成씨는 상궁 시절을 이렇게 주변에 회상했다고 한다.
1966년 순정효황후가 사망하자 궁중의 법도대로 3년상까지 치렀다. 그리고 '궁녀는 궁 밖으로 나오더라도 시집을 가면 안된다' 는 원칙을 지켜 홀몸으로 여생을 살았다.
70 년대 초부터 조카인 명오(明悟) 스님이 주지로 있던 서울 보문사의 시자원(施慈院) 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돌봐왔다. 그후 무의탁 노인시설인 노원구 중계복지관과 보문사(普門寺)에 소속된 '신자' 아파트에서 노년을 보냈다. 2000년 9월부터 신부전증으로 서울 강남병원에서 투병해오다가 2001년 5월 4일 오후 6시 50분 서울 강남병원에서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당시 지갑에 들어 있던 23,000원이 유품의 전부였다고 한다.
유언은 "저 세상에 가서도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순정효황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달라"였다. 5월 6일 오전 경기도 벽제의 서울시립화장장에서 시신을 화장하였으며, 고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후 순정효황후의 위패를 모신 강원도 강릉의 백운사(白雲寺, 강릉 연곡면 만월산 시슭에 있는 비구니 수행처)에서 49재를 치르고 위패를 안치하였다.
성 상궁이 모신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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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고종 31)∼1966.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
본관은 해평(海平).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바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그의 윤씨 집안은 대표적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씨는 그렇지 않았다.
만년에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낙선재(樂善齋)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정효황후와 나인들
궁녀(宮女)의 삶
궁녀(宮女)는 궁의 일을 보는 여성을 말한다. 이들은 내명부(內命婦)에 속한 실무직으로 종 9품 주변궁(奏變宮)부터 정 5품 상궁(尙宮)까지의 품계를 받았다. 후궁(後宮)이 될 경우 정 1품 빈(嬪)부터 종 4품 숙원(淑媛)의 품계가 내려진다. 궁녀의 일종으로 비자, 무수리, 각심이, 방자, 의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상궁, 나인의 시중을 들거나 궐의 하찮은 일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품계도 받지 못했고 대우 또한 일반 궁녀들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궁녀의 수는 왕에 따라 달랐지만 700-1,000명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백제 의자왕시절 삼천궁녀가 있었다는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은.................
1. 선발과 훈련
원칙적으로 각 관청의 여자 노비가 선발되었으나 실제로는 양인 여성도 궁녀가 되었다. 견습 나인은 무려 15년이나 궁중 법도, 한글, 천자문, 대학, 소학 등 다양한 교양을 익히면서 훈련을 받았다.
그 전문성을 위해 가장 습득력이 빠른 나이에 선발해 합숙하며 기르는 것이 궁녀다. 가장 어리게는 4세~ 10여세 초반까지가 궁녀 선발 나이대 였다.
왕실 어른을 지근에서 모시는 지밀의 나인은 보통 4~5세의 나이에 선발되어 집중적인 전문 교육을 받았다.
침방, 수방의 내인은 7~8세, 그 외 소속은 13~14세 가끔 15세도 선출되나 나이가 어릴 수록 가장 전문적인 부서의 소속이 되었다. 따라서 완전히 성인이 된 20세 전후에는 궁녀로 선발 되기 어려웠다.
2. 궁에 갇혀 지내는 직업
이들은 궁에 들어오면 늙고 병들기 전까지는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단, 모시던 분이 승하할 경우 3년
상을 치른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궁녀들중에는 종교인들도 있었는데, 이덕일의 '여인열전'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중에는 양반계급의 천주교 신자인 강완숙이 전교한 궁녀들도 있었다. 궁녀는 결혼을 하면 안되었다.
(궁녀는 오직 왕을 상대로만 연애행위가 허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궁녀가 외갓남자와 혼례를 치르게 될 경우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아이로 인해 왕조의 족보를 크게 어지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3. 하는 일
궁에서 소요되는 의복을 만들고 수를 놓은 '침방'과 '수방', 식사를 담당하는 '소주방', 음료 및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 빨래와 옷의 뒷손질을 하는 '세답방', 내전을 모시는 '지밀' 등에서의 근무로 자신들의 전문분야에 종사하였다. 크게 궁녀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 편의상 정5품 상궁으로 분류하였다.
4. 급여
궁녀도 직업이므로 이들도 월급을 받았다. 1926년 순종 승하 3개월 전의 창덕궁 나인에게 지급됐던 월봉명세서에 따르면 가장 높은 보수를 받았던 이는 지밀상궁으로서 당시 월급이 196원(현재금액으로 약 200만 원)이었다. 하지만 궁녀들은 맡은 일, 연차, 품계에 따라 받는 월급이 달랐으므로 지밀 중 가장 적은 액수를 받은 이는 50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40원부터 95원 사이였다. 기타 비자는 한 사람이 20원을 받은 것을 빼고는 모두 18원을 받았다.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 품계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받았던 것이다
5. 궁녀의 죽음과 장례
연로하여 궁에서 나온 궁녀들은 모여서 살았으며, 사찰에 시주를 하면서 종교를 통해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조선 시대 궁녀는 혼인을 할 수 없으므로 자녀가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궁녀가 죽더라도 무덤을 돌보거나 제사를 올려 줄 후손이 없었다. 이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죽은 후에 화장을 했다. 상전의 3년 상을 치른 후 출궁한 궁녀들은 대체로 절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절에서 임종해도 화장이 편했다.
절에 들어가지 않은 궁녀들은 한 곳에 모여살거나 친인척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예컨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이라는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아서 궁말, 즉 궁녀들의 마을이라 불렸다. 서울의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 살던 화자동이 효자동으로 바뀐 것이다.
함께 모여서 살거나 친인척에 의탁했던 궁녀들은 땅에 묻히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선산에 묻히지는 못하고 임자 없는 산에 묻혔다. 2002년 2월 25일 사적지 439호로 지정된 서울시 초안산에 소재하는 궁녀와 내시들의 무덤이 그런 예라 하겠다. 이곳은 도성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명당으로 소문나서 자손이 없거나 선산에 묻히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덤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6. 품계와 직위 : 내명부
내명부(內命婦)란 궁중에서 직역을 가진 여자 관리들의 부서이며, 그녀 자신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내명부의 수장은 왕비이나, 왕비와 세자빈은 내명부에 소속되지는 않는다.
내명부는 정1품에서 종4품까지를 '내관'이라 하며, 왕의 측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하의 신분이므로, 직역은 정해져 있으며, 국가행사(혼례나 왕의 즉위)나 국상이 있을때
이러한 직역대로의 일을 행하였다.
서열은 정1품 빈에서 종9품 주변치 순으로 낮아진다. 즉, 빈이 내명부의 최고 관직이다.
내명부 내관(왕의 후궁)
정1품 빈(嬪) --- 왕비 보좌, 부례 논의
종1품 귀인(貴人) - 왕비 보좌, 부례논의
정2품 소의(昭儀) - 비례, 찬도 담당
종2품 숙의(淑儀) - 비례, 찬도 담당
정3품 소용(昭容) - 제사, 빈객 담당
종3품 숙용(淑容) - 제사, 빈객 담당
정4품 소원(昭媛) - 연침, 사시, 헌공 담당
종4품 숙원(淑媛) - 연침, 사시, 헌공담당
내명부 궁관(궁녀조직)
정5품 상궁, 상의
종5품 상복, 상식
정6품 상침, 상공
종6품 상정, 상기
정7품 전빈, 전의, 전선
종7품 전설, 전제, 전언
정8품 전찬, 전식, 전약
종8품 전등, 전채, 전정
정9품 주군, 주상, 주각
종9품 주변치, 주치, 주궁, 주변궁
내명부
7. 조선멸망 후 내시(내관)들과 궁녀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들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질이 높은 교육을 받은 인물들로 중국처럼 질이 낮은 노동 인
력이 아니었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일본의 고문 정치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황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시하고 싶어했는데, 내시와 궁녀들이 방해가 되어서 1908년 이후에 거의 대부분을 해고하였다.
이른바 내시와 궁녀 제도가 구시대의 야만적인 제도라는 것이었는데, 실제 이유는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 식구의 손발을 자르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해고가 된 내시와 궁녀들은 궁궐 밖에 거처를 구하고 서로 연락망을 구축한 이후에 연합회를 조직하고, 궁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이용하여 식당과 호텔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고종과 순종 그리고 종친도 사업 자금을 대어 큰 이익을 보았고, 이 때에 건립된 식당과 숙박 업소는 1920년대에 일본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정도의 성공을 보았다. 이들은 덕수궁과 창덕궁에 남아 있는 황제에게 음식을 헌납하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황제와 황비에게 옷을 지어 바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몇 내시는 사업에서 성공한 자금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기도 하였고, 일제 시대 민족 문화 사업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8. 궁녀에서 후궁이 되어 왕(추존왕 포함)을 생산한 여인들을 모신 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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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
칠궁(七宮)이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면적 27,150㎡. 이곳은 원래 1725년(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년(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으며, 1908년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우궁(延祐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① 육상궁 :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② 연우궁 :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 ③ 덕안궁 :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 ④ 경우궁 :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 ⑤ 선희궁 :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⑥ 대빈궁 :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 ⑦ 저경궁 :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등이다.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냉천정(冷泉亭), 초가집으로 된 정자, 늘어진 소나무, 긴 돌로 짠 연못과 축대, 벽돌담 등이 잘 어울려 있어 우리나라 정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평민들은 왜 딸이 궁녀가 되는 것을 싫어하였을까 ?
위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천민이 궁녀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 공빈(광해군의 어머니)과 장 희빈(경종의 어머니)과 최 숙빈(영조의 어머니)처럼 하급 궁녀에서 후궁을 거쳐 왕까지 낳은 여인들의 사례가 있는 탓에, 우리의 인식 속에는 궁녀와 관련하여 '보랏빛 환상' 같은 게 존재한다.
천민 중에서만 선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 평민들이 궁녀가 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 평민들이 궁녀가 되는 것을 견제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딸을 궁녀로 만들지 않기 위해 민간에서는 조혼 현상까지 나타났다.
궁녀가 되는 게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저항까지 나타났을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평민들의 정서가 조혼 풍습을 낳았듯이, 조선 왕궁의 궁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그들의 정서가 조혼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 대목에서 '그 좋은 궁녀 자리를 왜 거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궁녀는 힘들고 고된 직업인 데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자리였다. 특히 '독신의 의무'에는 '성관계 금지의 의무'도 포함되었다.
이런 의무는 궁녀를 그만둔 후에도 계속 부과되었다. 이 의무를 위반한 대가는 사형이었다.
'설령 그렇게 힘든 자리일지라도, 잘만 하면 김 공빈·장 희빈·최 숙빈처럼 후궁이 될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기회는 '로또 당첨'보다도 확률이 낮다.
둘째, 평민들이 궁녀가 되는 것을 견제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그 '강력한 정치세력'이란 양반 관료집단을 말한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조선시대의 정치구도에서 알 수 있듯이, 양반 관료집단은 한편으로는 왕의 신하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왕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국왕의 힘이 너무 강해질 경우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양반 관료집단은 국왕 주변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했다. 예컨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이 효종의 중앙군 확충정책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왕권강화로 연결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왕궁에 궁녀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견제했다. 군인이든 환관이든 궁녀든 국왕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국왕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평민을 궁녀로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존재했다. 하나는 평민들 자신의 저항이고, 또 하나는 양반 관료집단의 견제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왕실로서는 평민 대신 '만만한' 공노비들을 궁녀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민들의 저항과 관료들의 견제를 물리치고 평민 중에서 궁녀를 선발할 있을 만큼 조선 국왕의 권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