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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유월절 어린양(김요셉)
고린도전서 5장 7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모세 때 출애굽 당시의 일입니다. 애굽 땅에 열 번이나 무서운 재앙을 이렇게 내리게 되는데, 아홉 번째까지 이 무서운 재앙이 내리고 드디어 마지막 재앙인 열 번째 재앙이 내린 때가 되었습니다. 아홉 번까지 바로 왕이 고집을 부리고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고 그러고 있다가 결국 이 열 번째 무서운 재앙에 항복하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가라 하고 쫓아내다시피 이렇게 하는 거죠. 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마저도 맏 새끼는 전부 죽었습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재앙이 내리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 집에는 안 들어가요. 왜 안 들어갑니까? 그 이스라엘 집에는 해지기 전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라놓았습니다. 이렇게 해놓았기 때문에 피가 발라져 있는 집에는 재앙이 안 들어가고 피가 없는, 이 비밀을 모르는 애굽 사람의 집에는 전부 재앙이 내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들어야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 집 가운데서도 이렇게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발라라 하는 명령을 내렸을 때 혹시 불순종하고 비웃고 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는 몰라요. 그래서 피를 안 발라놨으면 그 집은 다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요. 반대로 애굽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이스라엘 사람들 하는 거를 보고서 저 사람들이 양을 잡아서 이렇게 피를 발라놓는구나 이런 거를 알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그 규례를 어떻게 하는지 잘 배워가지고, 자기들도 가서 양을 잡아서 피를 발라놓고 집 안에 들어가 있어서 바깥에 나가지 아니하고, 그리고 안에서 양고기와 무교병과 나물을 먹고 했으면 아마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재앙이 안 내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것만 쭉 설명하고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에게 이런 일이 있었더라~ 이렇게까지는 설명을 안 하십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한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 이 말씀대로 행했던 애굽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는 안 나와요. 그렇지만 이 큰 원칙은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발라놓은 집에는 구원이 있었고 이 피가 없는 집에는 재앙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첫째로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이것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늘 기억하고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받아가지고 우리도 마음의 인방과 설주에 발라놓아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도 그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 인방이 있고 설주가 있느냐. 어디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마음을 말하는 거죠. 우리 마음의 인방과 설주에 발라놓아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주신 이 거룩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십자가 위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 손에 받아가지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발라야 합니다. 마음 문에 바르면서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에 이 보혈을 바릅니다. 옛날 유월절에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이 험하고 악한 애굽과 같은 죄악이 들끓는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이 가득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를 가지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발라 나갈 때 하나님의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왔다가 이스라엘 집에 피가 있는 것을 보면 껑충 뛰어서 넘어가고 이 피가 없는 애굽 집에는 그냥 들어가서 때려가지고 장자들을 다 죽였더라, 이 사실이 우리에게 깊이 새겨지고 이 절기 이름을 유월절이다 껑충 뛰어넘어갔단 말이죠. 우리에게도 이걸 발라놓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이 생기느냐 무슨 이익이 생깁니까?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왔다가 우리는 껑충 뛰어넘어간다, 그런 말이죠. 유월절 어린 양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피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마음에 있으면 재앙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둘째로 어린 양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양을 잡았으면 양의 고기를 먹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너희 집에 식구가 몇 명이냐, 양 한 마리를 잡으면 이 식구가 다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식구가 너무 적으면 다른 집 식구들이라도 불러가지고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도록 해야지 이 양의 고기를 먹지 못하고 남겨놓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또는 내집 식구가 너무 많으면 식구 적은 집으로 내 아이들 몇 명을 보내서라도 다 양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을 먹어라 말씀하시고 다음에는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것을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마셔야 된다 하면서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생명을 받는 것이고,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랬으니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종교 의식인 줄로 알고 이렇게 받아먹을 게 아니고 정말 이것이 나를 살려내는 그리스도의 살이요 그리스도의 피요 이런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정말 눈에 눈물을 흘리는 감격을 가지고 이것을 받아서 먹고 마실 때에 그 보혈의 역사가 예수님의 살의 그 역사가 내 속에 이루어져서 내 속에 참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말씀을 보면 두 가지를 더 먹어야 되는 거죠. 무교병을 먹어야 되고 쓴 나무를 먹어야 된다 그랬어요. 무교병이라는 게 뭐냐 누룩 없는 빵입니다. 누룩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빵을 만들 때 그 속에 넣어 부풀게 하는 거잖아요.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을 보면 누룩에 대한 설명이 나와요. 이것이 곧 죄와 부패성을 상징합니다.
또 하나는 쓴 나물이라고 그랬죠. 왜 달콤한 나물을 먹지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 인생이 쓰디 쓴 것이라고 하는 거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거고, 이 세상에서 너무 달콤한 것만 찾지 말고 쓴 것도 달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쓰라린 고난을 달게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이 죄악이 많고 험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잘 따라가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습니다. 유월절 양은 정월 10일 양을 택합니다. 그리고 나흘 동안 관찰합니다. 혹시 이 양에게 무슨 흠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거를 관찰해야 돼요. 만약에 어떤 흠이 있다면 그 양은 불합격입니다. 흠이 없는 양이라야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나를 상징하는 네 종류의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조사를 받으셨어요.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이 종려주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그다음부터 나흘 동안이죠.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신문을 받았다, 테스트를 받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는데
제일 첫째로 나타난 것이 제일 높임을 받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무리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말했죠. 성전을 둘러엎으시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더니 말라 죽어버렸고. 이런 거를 보면 이 사람들도 깨닫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될 거고, 예수님이 가서 상을 둘러엎으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에는 과연 우리 이 성전이 얼마나 부패했나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타락했는가 이거를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여,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우리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해야 될 텐데, 악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대듭니다.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나도 너희에게 하나 물어보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겠노라> 하니까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비유로 저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둘째로 나타난 것은 헤롯 당이죠. 이들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게 옳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셋 돈을 하나 가져와 봐라> 그랬어요. 데나리온 하나를 갖다가 보여주니까 <여기에 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건 가이사의 것이죠> <그래,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나타난 게 사두개인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잘난 척하며 <부활이라고 하는 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거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입니다. 부활이 일어나면 아주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이 장가를 들었다가 그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고, 그래서 둘째가 형수를 취해서 살았는데 또 자식 못 낳고 죽었고, 그다음에 셋째, 넷째 이렇게 일곱째까지 이 여자를 취해서 살았는데 다 자식을 못 낳고 죽었고 나중에는 여자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부활할 때에는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지어내어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거로 오해하였구나> 하시면서 <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마치 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저들을 물리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넷째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죠. 예수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가지가 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 가운데 대강령이니라> 하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흠 잡힐 때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빌라도의 재판정에 섰을 때 빌라도가 예수님을 보고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 하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는 아무 죄가 없으셨다 하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그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내립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려주시는 그분의 삶 곧 이것이 뭡니까? 오늘날에는 성경책이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참 진리의 말씀 생명의 양식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고 강건케 하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발라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주시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8. 이삭 대신 죽은 어린 양(나균용 목사님)
창세기 22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까지 사흘 길을 가서 올라가 단을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해서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서 막 죽이려고 하는 찰나에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급하게 부르시고 <네 독자 네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마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깜짝 놀라서 멈추고 뒤를 돌아 보니까 수풀에 어린 양 한 마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어린 양을 가져와 이삭 대신에 하나님 앞에 바쳐 번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님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시는데 두 번 나타납니다. 처음에 <네 독자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마라> 말씀하실 때 나타나시고,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다시 두 번째 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자로서 두 번 나타나시는데 이 두 번이 다 예수님의 상징이죠.
둘째는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이삭이 죽을 거를 대신 어린양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삭을 대신한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우리 모두가 다 이삭같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릴 때에 드디어 예수님이 내 대신 생명을 바쳐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어린 양은 언제 발견되었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명령하셨는데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100세에 주신 이 귀한 아들 절대로 죽이시고 그렇게 해서 데려가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 아들을 살려내실 것이다. 또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이 산 꼭대기까지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무슨 양 같은 게 없을까?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다 찾아봤을 거예요. 그때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언제 발견되느냐, 이삭을 단에 결박하고 칼을 들고 잡으려고 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급하게 제지시켜 놓으시고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서 드디어 수풀에 걸려 있는 양이 발견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가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모든 것이 우리 주변에 다 감추어져 있어요. 때가 되면 이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튀어나와서 우리를 돕고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를 이룰 텐데 우리가 자신을 드리는 것이 없으면 이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지만 하겠습니다. 이삭 대신에 죽은 어린 양은 그냥 우연히 발견되는 어린 양이 아니고 내가 나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내 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드릴 때 그때에 드디어 내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 양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에 대한 첫째 설명은 여기에서부터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이 나왔지요. 하나님이 예비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게 많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 9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하신 모든 것은 첫째, 우리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둘째, 우리 귀로 듣지도 못했고 셋째, 우리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것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식을 위해서 예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내 자식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은 훨씬 더 크고 엄청나게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거는 뭐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말을 하게 되면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데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좋은 일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앞길에 좋은 일만 생겨야 좋은 게 아니고 사실은 굳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 생기고 억울한 일 생기고 분통 터질 일이 생기고 화딱지가 나는 일이 생기고 막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더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꼭 믿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 우리 개개인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나라 곧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사실은 똑같이 이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은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신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 예레미야서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재앙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 장래를 주고 희망을 주려고 하는 것이라>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은 지금 유대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거예요. 유대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 하염없이 울고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마라. 울고 그러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희망을 준다. 장래를 준다>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받기까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되는 과정이 있다고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광야 사십 년이라고 하는 멀고도 길고도 긴 생활, 고난 그리고 광야에서 다 멸망당해 엎드러지고 마는 이런 불행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복을 쏟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자로도 이렇게 나타나셨잖아요. 처음에는 어린 그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마라 해서 이삭을 못 죽이게 만들고 어린 양을 볼 수 있게 발견하게 만들어서 어린 양을 대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바쳤는데 이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로, 다시 나타나셔 가지고 큰 복을 쏟아 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에게는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복을 내려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를 드린 사람들에게 주시는 어마어마한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삭 대신에 어린 양을 보내셔서 이 어린 양을 대신 바치게 하시고 이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 하시며 맹세하시기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여기에 말하는 네 씨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를 설명을 해요. 여기서 씨라고 말하는 것은 복수 씨들이 아니고 씨는 단수다, 그래 가지고 이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모리아 산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사자로 이렇게 나타났고 또 하나는 이삭 대신에 바쳐진 수풀에 걸려 있던 어린 양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다음에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약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희의 씨로 하늘의 별과 같게 하고 바닷가에 모래같이 많이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시고 네 씨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씨가 바로 씨들이라고 하는 육신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설명하는 게 아니고 이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고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씨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사람의 몸으로 찾아오셨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또 다른 씨가 되게 하세요. 천하만민에게 복음 전하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복음 전하는 씨가 되고 복을 전하는 씨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의 씨가 되어서 아름다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해 나가는 거룩한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주님의 백성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넘치는 새 은혜를 베푸시고 복의 복을 더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모세의 지팡이
나균용 목사님
[출4:1-5]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우리 성경에서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처음 나타나는 게 어떤 말씀이냐 보니까. 야곱이 자기 외갓집에 찾아갔다가 결혼하고 20년 만에 돌아오잖아요. 돌아오면서 <내가 이 강을 건널 때에는 지팡이 하나밖에는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큰 떼를 거느리고 왔다> 말합니다.
다음 유다 이야깁니다. 창세기 38장에 유다는 자기 친구 양털 깎는다, 거기 갔다가 그만 자기 며느리 다말이 변장을 하고 유혹하는데 들어가서 며느리를 범했습니다. 며느리가 증표를 달라고 하니 양을 주겠다고 그러니까 증표를 달라고, 지팡이 도장 끈을 달라고 합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론에게도 지팡이, 제일 유명한 말씀은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이야기가 나오죠. 다윗이 시편 23편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노래를 해요. 안위한다는 게 뭡니까? 그냥 생각하면 이 지팡이가 나한테 있어서 내가 든든하다 이게 있어서 어떤 짐승들이 오더라도 이걸 가지고서 싸워서 물리치고 이렇게 한다. 그래서 이 지팡이가 나를 보호하신다.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안위하신다. 안위한다는 게 뭡니까? 위로한다는 말이죠.
이 지팡이가 있으므로 마음의 위로가 된대요. 마음이 평안해진대요. 겁이 없어진답니다.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얘기예요. 이 지팡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아니다. 뭔가가 깊은 뜻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거예요. 히브리말로 찾아보면 지팡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하나지만 히브리 말로는 여러 가지가 나와요. 첫째, 가장 대표적인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 둘째, 아론의 지팡이 또 하나는 다윗의 지팡이 이렇게 세 가지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어요.
모세의 지팡이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모세 지팡이는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다시 애굽으로 가라 그래서 내 백성들을 인도해내라> 하니까 모세가 못 가겠다고 발버둥치잖아요. 1절에 뭐라고 핑계를 댑니다, 내가 가서 백성들한테 말해도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겁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셨을 거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좀 주세요. 자기는 할 수 있으면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 손에 지팡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지팡이를 던져라> 던졌더니, 갑자기 뱀이 됐어요. 모세를 물려고 달려들었는지는 몰라도 꿈틀꿈틀하고 모세 쪽으로 오니까 모세가 겁이 나 뱀을 피하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꼬리를 잡아라> 그래서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됐어요. 우리는 이런 거를 놓고 내 손에 있는 지팡이를 내던져버리면 뱀이 돼서 나를 물으려고 한다, 꼬리를 잡으면 지팡이가 되어서 나를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지팡이 같은 사람들에다가 비유할 수 있죠.
다 저 사람이 나를 돕는 사람이야 내가 저 사람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고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을 내가 던져버리면 그 사람이 나에게 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절대로 함부로 내치지 말고 잘해야 돼요.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정말 나를 잘 도와주는 것인데 이것을 내던져 버리면 뱀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 내가 나의 부하들~ 다윗으로 치면은 그런 사람이죠. 또 나에게 가장 허물이 없이 도와주는 나의 친구, 또 아내, 남편, 자녀들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팡이가 된단 말이예요. 그래서 자녀가 많은 사람은 전통에 화살이 가득한 사람과 같다. 그래서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늙을수록 초라해진단 말이죠. 화살이 없는 빈 활만 가진 사람처럼 겉으로는 뭔가 될 수 있는 것 같아도 실속은 하나도 없고 어려운 일 당하면 감당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참 충성하는 충신도, 나를 잘 도와주던 사람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버림받는다.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하는 사람이 된다. 마지막 때에는 절대로 죄짓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게 되면 내 친구도 떠나가요. 내 아내도 나를 배반하고 떠나가요. 내 자식도 다 나를 떠나가요. 그래서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서 살아야 된다. 다윗이 노래하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보호한다는 말이 아니라 안위한다, 위로를 준다는 말이잖아요. 이 지팡이가 있으면 원수들이 쳐들어와도 내가 이걸로 다 깨뜨려 버린다가 아니라 나의 마음의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고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많이 있고 훌륭한 자식들, 효도 잘하는 자식들 얼마나 든든합니까? 좋은 아내를 보면 남편이 든든한 것처럼 우리 주변에 든든한 사람들을 많이 가진 사람은 지팡이를 가진 사람처럼 안위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떤 어려운 일 당해도, 아무리 억울한 일 당하고, 위험한 일을 당해도, 주변에 나를 이렇게 위로해 줄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 이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가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히 우리의 지팡이가 되었죠. 막대기가 되어 주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너희의 지팡이가 되고 너희의 막대기가 되어 주신다. 그가 너희를 위로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보혜사라고 하는 이름을 우리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은 보혜사다”라고 한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위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킹 제임스에서 번역한 것은 Comforter 라고 한다. 위로한다는 말, 힘을 넣어주는다는 말인데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셔서 성령이 계시면, 예수님이 나에게 계시면 든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세의 지팡이 할 때 이 지팡이가 과연 모세에게 무슨 일을 했나? 하는 거를 더 찾아봐야 돼요.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어 오히려 모세를 물으려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고, 모세가 뱀의 꼬리 잡으니 지팡이 되었더라. 5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왜 이런 표적을 행하느냐? 자 이거를 네가 백성들 앞에 가서 보여줘라. 백성들 앞에 가서 보여주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 말이죠.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내실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이 지팡이를 보여주시고 뱀이 되게 하는 표적을 보여주시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도 보여주고 바로 앞에 가서도 행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는 가운데 모세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재앙을 내리는 게 4번 나타나요? 첫째, 나일강을 가서 쳤더니 강물이 피로 변합니다. 그다음 셋째, 재앙이에요. 티끌을 치니까 이가 돼서 나타나죠. 일곱째 우박이 쏟아지는 재앙이고, 여덟째 재앙은 바람이 불면서 메뚜기 재앙인 나오고,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치니까 생수가 터져 나오는 놀라운 일을 계속해요. 그래서 모세는 항상 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또 신기한 일이 또 나타나요. 모세가 자기 지팡이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론이 지팡이를 던집니다. 그랬던 그 지팡이가 뱀이 되어 왕도 깜짝 놀랐겠지, 다시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 됐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부어주셔서 이런 기적을 행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거룩한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참 목자가 되시는 걸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희의 선한 목자다>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의 지팡이가 되고 막대기가 돼 말씀하시고, 또 다시 이분이 떠나시면서는 새롭게 성령을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그분이 너희의 지팡이가 되고 너희의 막대기가 되어서 너희에게 참 위로를 주실 것이고. 세상을 이겨나가게 하실 것이고.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지팡이로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이 놀라운 지팡이를 받아 하나님 앞에서 힘있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되게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나균용 목사님
요한복음 1:33-34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니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이 증언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잠깐 비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으로, 말씀이 육십이 되셔서 오신 분입니다. 소리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형태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도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은 와서 소리로써 외치다가 사라졌습니다. 이 소리는 한번 외치고 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지만 말씀은 영원히 그대로 있습니다.
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와요. 두 증인이 나와 전하는데, 전하는 메시지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더라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들이 기적도 막 행하고,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들게 되었지만, 그 두 증인들은 다 순교 당합니다. 그들이 순교를 당함으로 한때의 역사가 반짝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시들어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능력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말씀하셨고요. 권능을 받으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례라고 하는 게 뭔가를 잠깐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의 첫째 의미는 죄를 씻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6절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와서 그 소경된 것을 고쳐주고 할 때 일어나서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보면 세례를 많이 베풀지는 않았어요.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다. 종교 의식인데 이 의식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오히려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의식에 대해서는 자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우리 베드로전서 3장 21절 보니까 <물은 곧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세례 그러니까 그러면서 이 세례가 뭐냐 너희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다> 개역성경에 그랬구요. 우리 개정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양심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선한 양심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한국말로 선량한 마음을 양심이라고, 선할 양자하고 마음 심 자, 양심이라고 해서 선한 마음을 말하는 건데 사실 양심이라는 말에 그 헬라어 원어나 물론 영어로도 마찬가지지만 그 뜻은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영적인 겁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수단입니다.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의 죽었던 양심이 살아나 하나님을 찾게 돼요. 세례를 받음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줄을 몰라요. 입술로는 찾는다고 할지 몰라도 그의 영이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영이 하나님을 찾아야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이 살아나야 된다. 세례란 둘째로, 선한 양심을 살려내는 방법이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셋째로는 어떤 뜻을 가지느냐 로마서 6장 4절 세례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체가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물속에 장사 지내는 것을 상징하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가 세례를 받으므로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자 마지막으로 성령 세례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이 성령세례라는 게 뭐냐하는 거를 교단별로도 보면은 설명하는 게 다 달라요. 그래서 성령의 세례는 성령 받아가지고, 방언하는 걸 보면 성령세례 받은 거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 있고요.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라는 거는 성령 충만함을 받는 거다 그래서 우리 몸이 물속에 이렇게 잠기는 것처럼 성령의 이 바다속에 성령의 불 속에 우리가 이게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자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과연 어떤 것이 성경적인 설명인가 우리는 그거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집어내기는 쉽지는 않지만, 여하간 성경에서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몇 가지 말씀들을 찾아보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 6절이죠.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라고 말씀을 하셨죠. 바울도 에베소에서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하고 그들이 대답하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했더니, <요한의 세례니라> 대답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였더니,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이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은사가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긴 받았는데 가짜 세례를 받은 거죠. 진짜 세례가 아니고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근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자기는 성령을 바둔 줄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폐역한 시대에 산 우리가 정말 정신 바짝 차려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도 넘게 따라다녔어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못 받았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닐 때 예수님이 전도하러 내보내셔서 저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이렇게 능력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아직 저들에게 성경이 임하시지 않았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이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이 열흘 동안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열흘 동안 날마다 모여서 열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열흘을 꽉 채웠어요. 드디어 오순절 날이 되어서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불이 임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 예언도 하게 됐습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능력이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즉흥 설교를 했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다 알아가지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설명하면서 그때야 성경책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처럼 이렇게 있어서 <자 이제부터 요엘서 2장 18절 다 같이 읽읍시다>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에도 성령께서 친히 역사시니까 요엘서만이 아니라 시편에서 예수님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 이런 것도 자유자재로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해 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너희가 죽인 그 예수 그분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제 하늘에 올라가셔서 우리에게 성령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렇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오늘 우리가 다 이렇게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하는 거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다 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의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다고 힘 있게 전파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그 자리에 있던 유태인들이 다 회개하고 뒤집어지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그들이 다 성명 세례를 받고 구원받는 자리에 나아가게 됐습니다. 이렇게 그날의 3천 명이 주께로 돌아왔다. 그다음 5천 명이 또 주께로 돌아왔다. 이런 말씀들이 계속 나오고요. 엄청난 박해를 받았지만 박해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전해서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 오늘날 교회들같이 형식적으로 믿는 척만 하고있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정말로 성령 충만한 교회 모이면 성령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교회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한번 우리의 마음에 새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새 역사를 이루어가는데 쓰임받는 복음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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