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수 (2023.01.17.01:26)
1. 2010년대에 10여 년 넘게 날 보고 연속적 중생론의 좌장이라며 지속적인 괴롭힘과 이단 시비를 걸던 이가 있었다. 진짜 지긋지긋했다. 단 한 번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대응하지 않았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어느 목사가 전화로 2 시간 넘게 설득해 그날로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진짜 화가 났던 것은 내가 볼 땐 자기 문제가 더 심각한 어느 목사의 언행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십 년의 고통을 하나님께 신원했고 지금도 갚으실 것을 기도한다. 난 지금도 문제가 될 일이 아니며 그걸로 싸울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2. 2018년에 다른 빌런이 나타났다. 능동 순종으로 이단 시비하는 빌런이 3 년째 날 괴롭히고 있다. 처음 일이 교훈이 되어 가만히 있으면 개호구로 아는구나 싶어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대응을 다 했다.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그치는 기소중지 상태다.
3. 원래 메시나 손흥민은 마크를 많이 당하는 법이라 생각하고 이 험한 세월 인내로 보낸다.
4. 모든 생을 마친 후 아버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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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제가 안 읽었어야 할 글인데, {페북} 노승수 목사님 담벼락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제목 <정이철 목사보다 더 악한 빌런(범죄자)인 어떤 이>는 제가 지었습니다.
“2010년대에 10여 년 넘게 날 보고 연속적 중생론의 좌장이라며 지속적인 괴롭힘과 이단 시비를 걸던 이”는 저 박채동을 뜻합니다. 또한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어느 목사”는 제가 “한국 교회 순중론 영의정 목사님”으로 높였던 故 강릉예명 박래구 목사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치는”은 정이철 목사를 뜻합니다. 그런데 “자기 문제가 더 심각한 어느 목사”는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교회 연중론 우장 바보새 노승수 목사님이 연중론을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단회 순간 중생’을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에 대적해 ‘두 번 중생’을 주장하는 연중론, ‘단회 순간 중생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신 故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한 연중론을 두고 “난 지금도 문제가 될 일이 아니며”라 하신 걸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또한 2012년 임진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에서 연중론의 이단성를 밝힌 저를 두고 하나님께 신원伸寃의 기도, 하나님께서 보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신다는 것 역시 안타깝습니다.
제가 2011년 12월에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중생론 교과서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감히 피터 마스터스 목사가 넘볼 수 없는 20세기 개혁신학의 거목이자 우리 개혁신앙의 선진이신 故 존 머레이 목사님, 그분 중생론을 개혁신학 중생론의 “변종”, “미혹”, “원조”라는 단어로 이단시했다는 {영혼의 의사}를 살펴본 까닭 하나는, 강릉예명 박래구 목사님을 통해 ‘피터 마스터스 목사 이단 정죄 때문에 故 존 머레이 목사님 반려자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께서 눈물로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날마다 신원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께 역지사지 심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0세기 개혁신학의 거목 故 존 머레이 목사님을 메시나 손흥민으로 빗대 말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메시나 손흥민으로 빗대 말할 수 없는 듣보잡 피터 마스터스 목사가 {영혼의 의사}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두고 쓴 정죄의 단어 “변종”, “미혹”…. 그리고 2011년 12월에 {양무리 마을}에서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이 강릉예명 박래구 목사님을 두고 쓴 “미혹의 영”…. 이 정죄의 단어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나머지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께 역지사지 심정을 가지지 못한 채 연중론을 지지 설파하셨던 노승수 목사님이 ‘빌런 정이철 목사에게 왜 3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는 험한 세월을 살고 있는가?’를 돌이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즉, ‘이 괴롭힘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돌이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께 역지사지 심정을 가지지 못했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복하셨는지,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 신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을 마친 후 아버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고 싶다.”는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이 점에서 제 글 두 편 링크합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188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