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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3:12-16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24.10.13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입니다.
지난주 동아일보에 기독교의 한 교단이라고 소개를 하고 다른 교회들도 이렇게 봉사하고 섬김으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교단 설립 60주년 행사를 취재하고 전국의 400개가 넘는 교회 중에 잘 지은 건물 사진도 올려놓고 홍보를 대신해주었습니다. 그 교단이 안상홍씨가 세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장길자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여 어머니 하나님을 섬기는 이단 사이비입니다. 안상홍의 후계자가 바로 김주철인데 이날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전 세계 175개 국가 370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전하며 이웃과 함께 성장해왔습니다. 서로 반목하는 국제사회에서 평화와 희망을 불러오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메이저 신문이 이단 사이비교회를 홍보하다니 큰 실수를 했다고 봅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에게 예수님이 천사나, 모세나,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남을 전하면서 구약에 양과 염소로 제사하던 모든 예법을 흠 없고 티 없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완성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였듯이 우리도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자는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셔서 믿는 자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12,13절에서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을 믿고 그의 십자가의 치욕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영문 밖으로, 즉 고난을 감당하며 나아가자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곳이 아니기에,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달려가되,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오직 선을 행하고 나눠 주기를 잊지 말고 계속하라고 합니다. 이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도 그리하시길 소망합니다.
암5:14에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살려면 선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선을 구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악이 아니라 선을 구하고 항상 베풀고 나눠 주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라고 하는데 자본이 뭡니까. 돈입니다. 돈 중심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자본(돈)이 가치이고 자본(돈)이 성공의 기준이 되어 선과 악도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지만, 우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마 6:24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을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재물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 재물로 인해 기뻐하고 재물을 위해 살아가면 재물이 주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쟁취하고 또 그것을 누리는 것이 정당하고 아무른 거리낌이나 문제될 것이 없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의 방식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경주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성경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억지로 빼앗아 강제로라도 분배하여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우리가 가진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도구로 쓰이도록 자원하여 베풀고 나누며 섬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강요나 강제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와 살도 나누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떡이 되고 포도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성도가 곧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그 맛을 잃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롬12:1).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빈손이 되고 무소유가 되는 게 아닙니다. 눅6:32에 약속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후히 주시고 흔들어 넘치도록 더 하여 안겨 주시리라" 도리어 거부(거룩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입술에 찬송이 울려 퍼지길 축복합니다. 가끔이 아니라 항상 드려야 합니다.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찬송 가사처럼 입술에 찬양이 있고 섬김의 손길이 있어야 주님의 흔적을 가진 삶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체질에 따라서, 체형에 따라서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홍삼이 아무리 좋아도 열이 많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몸에 맞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과일이 아무리 좋아도 당이 있는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는 특별한 약은 산삼, 녹용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찬양입니다.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얼굴이 언제나 환해요.” 찬양이 넘치는 곳에 치유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고, 소망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찬양이 곧 기도요, 예배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자!”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서 울려나는 찬양보다 더 진정한 예배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69:30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황소를 드림보다 진정한 찬양의 제사를 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이사야 43:21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입니다. 찬양받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 때도 목적 없이 만들지 않습니다. 벽에 선풍기는 왜 만들었을까요? 이 마이크는 왜 만들었을까요? 부엌에 냉장고는 왜 만들었을까요? 창문과 문짝은 왜 만들었을까요? 이 건물은 왜 만들었을까요? 목적 없이 만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그 목적에 맞게 쓰인다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찬양받기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고 그 목적대로 쓰이면 가장 바람직한 한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창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는 것 보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새벽에 내가 주께 경배하나이다, 주를 찬양합니다’로 시작하는 것이 낫습니다. 매일을 그렇게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찬양의 제사를 드릴 이유를 더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15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선을 행하고 베푸는 것도 예수님 때문일 뿐만 아니라 찬송할 이유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심, 우리를 사랑하심, 부활로 승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심, 이처럼 그분이 하신 모든 일에 우리는 감격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 최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노이트라는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인류 역사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파르테논 신전이지요?” 라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 박사가 90세가 넘었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쓴 책 중에 최고의 책은 어떤 것입니까.”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다음에 나올 책.”이라고 했습니다. (구순이 안 되신 분들은 분발하셔야 합니다.)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세페 베르디에게도 팔순이 넘었을 때 그동안 만든 작품 중에 어느 것이 제일 훌륭하냐고 물었더니 역시 다음에 나올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피카소에게도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모나리자인가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스승인 박목월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동안 쓴 시중에 가장 완성된 시는 무엇입니까.” 역시 “다음에 나올 시”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얼마나 예술가로서, 문학인으로서, 건축가로서 창작에 힘쓰는 아름다운 모습인가요. 한강 작가에게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사랑은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타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희생을 통해 최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은 그 이상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어줄 아들이 없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사랑이고 완성된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 받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은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아직도 주님을 구주로 알지 못해 손가락질하고 비방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형벌 받고 돌아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원자임을 믿고 그 놀라운 사랑에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예수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그분만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계5:13에서 수많은 천사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시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계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에게 약속합니다. 요엘2:26에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를 높이시지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수치 당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한 찬양할 때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찬양이 능력입니다. 찬양은 우리의 수치를 자랑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눈물을 웃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매 맞은 통증을 안고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손과 발에 묶어둔 착고를 풀어버리고 옥문을 열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이 악신에 붙잡혀 괴로워할 때 다윗을 불러 수금을 타며 찬양을 부르게 했습니다. 찬양할 때마다 악신이 떠나고 사울왕의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찬양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악기를 잘 연주하는 은사만 아니라 악기를 만드는 은사도 주셨습니다. 암6:5에 “비파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찬양의 은사만 아니라 악기를 만드는 재능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119:164에 다윗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해 뜨는데 부터 해 지는데 까지 주를 찬양했습니다. 기쁠 때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절망 중에도 찬양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11) 우리도 진정한 찬양을 회복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고달프고 힘든 날의 연속일지라도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기쁘고 감사할 때만 아니라 어려운 날들일수록 더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그 찬양이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시온의 대로로 향하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일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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