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
오늘 교회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란 프란치스코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방탄한 생활로 삶을 이어가다 기사가 되어 명예를 누려보겠다는 욕심으로 참전한 전쟁에서 처참한 패배와 결국 전쟁 포로가 되는 굴욕적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부유한 아버지로부터의 많은 보석금으로 포로 상태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그는 패잔병의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패배와 비참함 그리고 전쟁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체험한 성인은 자신이 소유한 그 모든 재화들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자신의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하는 삶, 곧 가난과 겸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같은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고자 성인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하고 가난의 삶을 실제 살고 그 삶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며 가난의 사도가 됩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이 같은 성인의 삶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잘 제시해 줍니다.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입당송)
부유했지만 스스로 그 모든 부유함을 버리고 가난을 선택한 프란치스코는 오늘 입당송의 이 말씀처럼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를 오히려 들어 높여 올려주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 상 죽음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예수님의 그 같은 삶을 자신의 삶으로 증거하고 그 삶으로 신앙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예수님이 받으셨던 다섯 상처, 곧 자신의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예수님의 상처와 똑같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시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성흔으로 여기며 이를 인내로 견뎌내십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루카 복음의 말씀으로서 제자들을 두 명씩 짝지어 각 고을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건네신 후, 당신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모든 고을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탄식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 말씀 중에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은 이제껏 당신 스스로를 사랑과 자비와 이해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과는 달리 비난과 저주를 서슴지 않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서 그 모습을 대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언제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대하며 이해와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불행을 넘어 저승에 떨어질 것이라는 심한 저주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모습은 사실 그 모습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낯설기만 할 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은 낯선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일까? 도대체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예수님은 이토록 화를 내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 그것은 제쳐주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무엇을 하던 동네인가?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 물가에 있는 고을들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 복음을 선포하며 활동하시던 주 무대가 되는 도시들입니다. 그런데 이 고을의 사람들은 이후에 드러나게 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기는커녕 그들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홀대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모습을 미리 예언하시고 그들의 변하지 않는 굳은 마음을 심하게 질책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예수님은 이들 마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고하신 것이고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심으로서 그들의 회개를 위한 기회를 한 번 더 주신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예언하고 이토록 심한 말을 하면서까지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회개하고 않고 그들의 잘못된 습성과 성향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 결과 예수님의 저주의 말 그대로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왜, 도대체 왜 그들은 이 같은 마지막 기회마저도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도대체 그들은 무엇이 잘못이었기에 이 같은 결과를 불러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독서의 욥기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이에게 주어지는 불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욥은 하느님께 의인의 불행에 대해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능력을 지닌 양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항의를 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욥 자신의 처지, 곧 한낱 창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갖는 한계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시고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욥의 고백에 이르도록 그를 이끌어 주십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욥기 40,4-5)
욥의 이 고백처럼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한낱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경우, 마치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 마냥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하느님께 항의하며 따져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의 욥의 고백처럼 우린 그저 보잘 것 없는 몸,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그저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에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맡길 때, 평화의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이 원하는 때에,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분노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굳은 마음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에 가까운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왜 그토록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지, 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머뭇거리는지 안타까움에 가슴에 사무쳐 분노의 모습으로 표출된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
오늘 복음환호송의 이 시편의 말씀처럼 우리 귓가에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에 등장하는 마음이 무딘 백성들이 보여준 완고한 모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그대로 회개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 삶은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서 얻게 되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전해들은 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회개의 삶,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서 하느님 말씀을 통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