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여행이란 적어도 내게 있어 조용한 사색의 시간이었어요.
한껏 센치해지고, 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쉬었다 가고...'노마드'의 꿈을 꾸는게 나답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낯선 사람들과의 여행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여행도 참 즐겁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발견...예전 누군가 제게 말했어요. '롯데리아 버거만 먹다가 버거킹 버거를 먹었을 때의 맛....'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버거킹 버거를 먹었을 때의 맛이란 걸 올해 들어 느끼고 있답니다.
2장
아무리 봐도 등산복은 내 체형의 단점을 여과없이 보여줘서 싫어요.
더구나 바람막이 외투는 엄마의 진달래색...
밤 11시 10분쯤 양재역에 내려 주최자인 '오리알'님을 만나 다른 일행이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죠.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 나이를 묻고, 이름을 묻고, 사는 곳을 묻고...
서른넷의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참 어색하죠.
8명의 일행이 모두 모이고 잠시 마트에 들러 부족한 물건을 사고 두륜산을 향해서 출발했어요.
술집에서 술을 안 마셨다는 이유로 전 보조석에 앉아 운전하는 '오리알'님이 졸음운전을 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됐어요.
도착 예정 시간은 대략 6시 반에서 7시 사이...사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처음에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역사 이야기도 하고, 커피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데 웃긴 건 뒤에서 아름언니와 정은언니가 자는 척하며 토씨하나 흘리지 않고 다 들었다는 거죠.훗...
속으로 얼마나 재수?없었을까요? 저 잘난척 하는 것들^^
안 자려고 무지 애썼는데도 결국 5시 넘어서 조금 졸았던 것 같아요. 옆에서 졸아서 운전하는 사람도 같이 졸음이 밀려왔을텐데...
임무를 완수 못해서 미안해요^^
3장
7시가 조금 안 돼서 두륜산 주차장에 도착했죠? 주차장에 자리 깔고 라면을 끓여 먹고, 차를 나눠 마시고...두륜산은 남쪽이라 아직 단풍이 조금 덜 들었어요.
푸른 산 사이 사이 조금씩 바래있는 단풍들이 정말 고왔어요.
두륜산 입구의 길은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들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요.
영화 '가을로'가 떠오르더라고요. 예전에 '가을로'의 기억대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번 산행은 벅차게 오르지 않아서 좋았어요. 다들 알겠지만, 제가 잘 못오르잖아요.
배만 안 아팠다면 정말 즐겁게 올랐을텐데...사실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아팠답니다.
'유선관'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수많은 사람들이 묵어가고 사연을 남기고 간 곳이겠죠.
다음에는 이곳에서 한 번 묵어봤으면 해요.
대흥사...정원이 아름답더군요. 산에 오르느라고 탱화도 유심히 관찰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찰에 비해 크지도 작지도 않고...미륵불은 여성스런 신라의 모습과는 달리 남성스런 얼굴을 갖고 있더라고요. 눈매가 인상적이었고, 가사를 두른 어깨가 남자답더라고요.
산 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 한대요. 산에서의 고통은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난 보이차를 제외한 음식을 산에서 먹지 않기로 했어요. 복통이 언제 다시 재발할 지 모르니까...
지금도 기억나지 않아요?
둥글고 완만한 봉우리들, 고운 명주 수건을 두르듯 하얀 구름이 산들을 감싸고,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고,
억새밭엔 갈빛의 억새들이 부스스 몸을 부비면서 흔들거리던 곳.
그곳에 우리들이 있었잖아요.
각자 인생의 깊이만큼 다르게 살아왔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는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봉우리를 오르는 곳이 제법 힘에 부치고 버거웠지만 도와주고 보폭을 맞춰주고...
산을 내려가서의 삶도 그때처럼 너그럽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정상에서 바라본 육지의 끝과 남도의 바다. 수만개의 단어를 알고 있지만 그때는 아름답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4장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어요.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라는 시를 읽고 동백꽃이 피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두륜산엔 수십년을 굵어온 동백들이 무리지어 있더라고요. 간간히 빨간 동백도 꽃을 피우고...봄이 되면 장관이겠죠?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숙소는 한옥마을의 '흥부민박' 옆집은 '제비네 민박' ㅎㅎ 흥부처럼 인심좋은 아저씨가 기쁘게 맞아 주시고, 잠시 짐을 내리고 땅끝 마을에 갔었죠?
조용한 어촌 마을이 땅끝 마을이더라고요. 사실 이런 어촌은 많이 봤어요. 시시한 곳이라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요.
아마 '이름'때문이겠죠. 대륙의 끝이라는 상징성. '끝'이라는 어감이 주는 묘한 상실감.
5장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오빠들이 밥이랑, 김치찌개랑, 숯불로 구운 삼겹살이랑...모두 준비해 주시고...씻고 나오니 밥숟가락만 들어도 되는 참 따뜻하신 분들이에요. 많이 힘드셨을텐데... 준비도 모두 다 해주시고...저는 또 일찍 자버려서 뒷정리도 못하고...어디를 가나 문제에, 짐만 주는...적당한 알콜에 피로가 풀리고 사람을 알아간다는 기쁨이 이런 거겠죠?
6장
아침도 준비해 주셨네요. 라면밥, 콩나물국, 그리고 정말 맛있던 김치...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나중에 물을 숱하게 마셨어요^^
보성에 들러 고즈넉하게 산책도 하고, 차밭도 거닐고, 좋은 차도 마시고...
벙짱님이 맛있는 점심도 사주시고...돈 많이 나왔을텐데...아름언니도 찬조금을 적지 않게 내 주시고...
눈이 즐겁다는 말 이럴 때 써도 될 것 같아요. 길게 곡선을 그리며 푸른 차밭이 이어져 있고, 차꽃이 피어있고,
누군가의 향기가 되고, 기쁨이 될 차들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고...
초입엔 껍질이 부드러워 자꾸 만지고 싶은 삼나무들이 길게 늘어져 있고...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7장
올 때는 길이 많이 막혔죠?
전 역시 보조석에 앉아 열심히 재잘대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어요.
차가 많이 막힘에도 불구하고 천안까지 데려다 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덕분에 쉽게 집에 올 수 있었답니다.
아직도 눅진한 피곤함이 남아 있고, 근육도 조금 뭉쳐서 오늘 내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비명을 질러대야 했어요.
벙짱 오리알님 - 무언가를 계획하고 주체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신경쓰는 일인지 조금은 알고 있어요.
조용히 묵묵히 그 일 다 해주시고 챙겨주시고, 정말 고마워요. 만들어 오신 쿠키도 정말 맛있었고요.
많이 섬세하신 분이신 것 같아요. 또 좋은 여행도 올려주세요. 좋은 기억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똘이장군님 - 조용히 미소를 많이 짓고 계셨던 큰 오라버니^^ 눈이 크고 맑은 게 선하신 분이신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이야기를 함께
하지 못했네요. 뒤에서 사람들 챙겨 주시고 분위기 잘 조율해 주시고... 이제 배 아픈 건 괜찮아 지셨어요? ㅋ
소백산님 - 저한테 '정주리'닮았다고 했죠? 그리고 앉은 키도 크다고 했죠? 시종일관 저한테 넌 정체가 뭐야?라고 구박만 하고...
2천원밖에 없다고 강조하시던ㅋ 제가 말했죠? 저 뒤끝 있다고ㅋ
그래도 오빠덕분에 많이 웃고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역시 오빠는 아봉오빠랑 너무 잘 어울려요.
심각하게 성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 보세요ㅋ
아름수니님 - 전 언니가 넘 좋아요. 털털하고, 맺고 끊는게 분명하잖아요 ㅋ 제가 그러지 못하거든요.
언니를 알게 돼서 정말 기쁘고 앞으로도 같이 산행도 많이 하고, 연락도 많이 하고...그래요.
싸랑해요~ 아름언니^^
아봉님-오빠는 사실 박명수도 닮았어요 ㅋ. 닮은 사람 정말 많다 ㅋ. 호통개그의 또 다른 모습. 솔직하고, 재미있고, 막상 다른 사람을
챙겨야할 때는 따뜻하게 감싸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김치도 정말 맛있었고요. 어머님께 김치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래도 마지막 돌아올 때 화장실 사건은 정말 잊지 않을거예요.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그걸 갖고 놀리다니...나중에 소심하게 10번에 나누어서 복수할거예요.
정은님-제가 남자라면 언니 얼른 업어 갈텐데...참 섬세하고 꼼꼼하고 뒷일도 잘 챙겨주시고, 사람도 잘 챙겨주시고, 마음도 곱고,
이번 여행에서 좋았던 것 좋은 언니들을 만나고 알게 됐다는 거에요. 산도 못 탄다고 해 놓고선 잘 타고...요리도 못 한다고 해
놓고선 잘 하고...사진도 잘 찍고...못하는게 뭐예용?
포카혼타스님-사실 액면가로 보면 제가 훨씬 언니같아요ㅜㅜ. 예쁘고, 깜찍하고, 성격도 좋고, 이번 여행에서 언니들은 모두 제가 닮고
싶은 모습들을 많이 갖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우리 정말 연락 자주 해야 해요? 언니들하고 이야기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아요.
그 말 생각나요?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는....
첫댓글 여행후기는 빼먹지 않고 꼭 읽는편인데 참 따뜻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는 마지막 문구가 맘에 쏙 드는데요~ *^^*
동감입니다~^^
두말 필요없는 완벽한 후기임다~짝짝짝!!!!!^^ 노르웨이,,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넌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인거 같오~정말이지 요번산행 같이하게 되서 넘넘 좋았어~^^
출발전 술 않마셨다는이유로 강제로 조수석에앉혀서 고생두하구 산에올라가다 배아프다는이유로 음식두 제대로못먹구 노르웨이가 참 고생많았어~~~애교도 만점이구 보성차밭에서 검증되지않은 강의도해주고..^^후기까지쓰느랴 수고했어.~~~
7장까지 산행후기 잘읽고 갑니다.두륜산 산행하시느라 수고하셧어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하루끼 소설보다 읽기가 훨 좋은데요. 강추합니다. 자알 읽엇슴다.
노르웨이 어휘력뿐만 아니라.. 글솜씨가 참 좋다... 글을 읽다 보니 원정산행 출발할 때 깜깜한 차안에서 웃음이 빵! 터졌던...그 순간이 생각나네..^^
ㅋㅋ맞오,,,덕분에 많이 웃었다는,,,훅~갈뻔했당,,ㅋㅋㅋ
역시 딱 기대했던 만큼이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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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노르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잘 쓰기는 했는데 오빠야가 시로 쓰라고 했지![?](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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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까지 시로 다시 올려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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