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바르트는 본절과 관련된 주석에서 현재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참됨을 상실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제한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생각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과소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요 충분하며 인간은 미약하지만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계시를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불충분하고 그 진리성이 의심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살필 수 있는가 ?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나 완전하다.
본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3:3-6에서 바울이 취급했던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형적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 특권 의식에만 젖어든 채 그 구원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의 역사에 그릇되게 적용시켰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머레이는 본 구절을 압축하여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표현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이란 표현이 족장들의 혈통적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본 구절의 첫번째 '이스라엘'을 반드시 야곱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모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6절 후반 구절 내용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반증하기 위한 설명이다. 이는 본절의 초두에 있는 '또한...아니다'를 가리키는 부정사 '우드 호티'가 앞절의 '...아니요'라고 번역된 부정사 '우크 호티'와 논리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서 더욱 확인된다 본 구절에서 '씨'와 '자녀'는 본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한다.
먼저 이 문장에 대한 대부분의 역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와 '그의 자녀'에 대한 주석가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의 씨'란 '자연적, 혹은 육체적 후손'을 가리키며 '그의 자녀'란 약속을 좇아서 난 참된 이스라엘, 즉 '믿는 자'를 말한다.
(2) 이스마엘과 이삭은 다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여기서 말한 '자녀'는 이스마엘을 제외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육신적인 혈연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 이것은 창 21:12의 70인역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알 엔 이사악)는, 문자적으로 '오직 이삭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직 이삭 안에서'란 무슨 의미인가 ? 여기서 '엔'은 제한적 의미를 가진 전치사로서 '...으로부터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삭을 통해서만 아브라함의 참 자녀라는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약속의 후사로 인정될 후손이 나오리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유달리도 '오직 이삭으로부터'란 말을 강조했을까 ? (1) 언약의 후손에 참여할 수 있는 범주를 이삭으로부터 시작한 그 후손으로만 제한하는 의미이다. (2) 이스마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씨'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로 이 씨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앞 구절에서 사용된 '씨'가 제한된 범주로 해석된 반면에 본 구절에서 사용되 '씨'는 앞 구절 '자녀'(테크나)와 같은 것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 넘어 믿는 자 누구든지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칭하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클레데세타이'는 창 21:12에 나오는 '칭할 것임이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관용구로서 3인칭 단수 미래 수동형이다.
이 뜻은 '이름이 주어지다', '선택되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참된 씨라 일컬음 받은 계열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일방적인 은혜로 되는 것임을 '수동형'이란 점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매우 인간적이고 단순한 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족장과 유다의 계열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의 씨라 칭해질 계통을 정하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시작으로 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영적 후손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앞 구절들(6절ff.)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통에서 태어난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정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문장 구조에서 더욱 잘 나타나는데,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로 연결되어 앞뒤 문장을 대치시키면서 뒷문장을 강조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연결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
약속의 개념은 4장의 진술을 강력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 그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인정된 자들에게만 적용됨을 보여준다.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에 그 '약속'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그 약속의 범주에 넣고 어떤 사람은 제외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누구나 믿음으로써 그 약속이 제시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근거로 갈 3:26과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도 그 약속 안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제시한다.
즉 약속이 모든 자연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택자들에게만 주어졌다면 어떻게 이방인들이 그 약속의 범주안에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그 약속을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예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택자들에게 약속의 능력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다만 인간들은 그 예정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롬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약속'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으로 두어서 강조하고 있다. 즉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또 다른 성경의증거를 들어 제시한다. 이는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진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이 약속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언급하려는 것이지 약속의 자녀로서의 '이삭'과 육신의 자녀로서의 '이스마엘'을 대조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들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반응함으로써 그 약속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선택은 육신적인 혈통에 의한 것도 어떤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특별한 배려로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무능력했으며 사라는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았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 본 구절은 구약의 인용인데,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도 있지만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며 단순한 암시만 하기도 한다. 본절은 70인역의 창 18:10, 14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하여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