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큰 기쁨 (마 28:8-10)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시간 "부활의 큰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릴 때 우리 함께 부활의 감격을 누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있었는데 특별히 어떤 대학교수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래 동안 신봉하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썬다 싱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간단하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답변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종교가 있다 해도 결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기독교만이 참 진리임을 증거하는 대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바울은 고전15:14-19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했습니다.
그럼 부활의 감격은 어떻습니까? 내용적으로는 기뻐서 뛰지 않고서는 가만있을 수 없는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새벽에도 그랬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많았지만 감격하고 기쁨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본문 8절에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그랬습니다.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무섭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기뻐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떻게 부활의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1. 절망을 알 때입니다.
막16:1-3에 “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이처럼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기 위하여 절망 가운데 갔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절망을 알 때 기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린 자였습니다. 막16:9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전에 비참했던 일을 왜 언급할까요? 그것도 일곱 귀신 말입니다. 일곱이란 유대인의 숫자개념에 비추어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잘 알려줍니다. 거기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절망을 아는 자가 부활의 감격을 압니다.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합니다. 죄악의 험한 수렁에 빠져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사탄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구원해 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눅7:47에 그가 많이 사함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죄가 컸다는 뜻도 되지만 그만큼 자기 죄를 깨달았다는 뜻도 됩니다. 이처럼 진정 죄악의 방황과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부활의 감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의 고통과 실패를 모른 사람은 그것을 해결하신 부활의 기쁨을 몰라요. 율법 아래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악의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자만이 그것을 해결하신 부활의 복음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 율법 아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보혈로 용서 받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성령으로 승리하는 것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 슬픔을 알 때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가장 슬퍼한 사람들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못지않게 주님을 슬퍼했습니다. 막 16장을 보면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16:1-3) 했습니다.
아직 부활신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따르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랬기에 온갖 장애와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 새벽에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체를 찾지 못하자 다시 울었습니다. 요20:1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했듯 마리아는 울었습니다.
이처럼 슬픔을 아는 사람이 부활의 감격도 큽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40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은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함께 힘써 나가세. 함께 힘써 나가세.” 잘 아시는 광복절 노래입니다. 36년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해방의 기쁨을 압니다.
이처럼 인생의 죽음과 저주와 슬픔을 아는 자만이 부활의 감격을 가집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깨끗하게 해결해 버리신 그 사실을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 공부 잘해야 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눈물로 밤을 새워 본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말로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소망도 없으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이것은 듣기만 그럴듯 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공부한다더니 허무만 외치다 갑니다. 그것은 득도가 아닙니다. ‘인생을 공부해 보니 뭔가 있다. 뭔가가 있다. 천지와 그 안의 만물과 그리고 인생과 나, 그리고 그 존재와 신비로움,,, 그 안에 뭔가가 있다. 나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다.’ 최소한 이 정도는 깨달아야 인생 공부 입문이라도 했다 할 수 있지요. '뭔가가 있다.'
사실 이건 예수 믿기 전 초등학교 때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너무 조숙한가요? 그랬기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입니다. 롬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 했습니다.
이처럼 진정 역사를 아는 자만이, 그리고 인생의 슬픔을 아는 자만이, 마리아처럼 진정 눈물 흘려 본 사람만이,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처절하게 느껴본 사람만이 죽음과 그 공포조차도 해결하신 부활의 예수 앞에 진정 감격할 수 있습니다.
3. 부활을 체험할 때입니다.
마28:9-10에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생이요 성결이며 성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엡2:5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다시 살았고 주님이 높이 되실 때 우리도 예수와 함께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 영혼 속에서 누리는 중생의 체험, 그리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이 능력, 모두 부활의 은혜입니다.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으로 자유와 해방과 생명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임하는 부활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골3:1-4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했습니다.
부활은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죄도 이기고 사망도 미움도 마귀도 절망도 질병도 그 무엇도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적과 표적이 나타납니다. 감격을 모르는 이유가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어두운 새벽 미명에 주님이 부활하셨듯 우리의 삶이 칠흑 같이 어두울지라도 주님을 모시면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방황하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인생의 수고와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면 할수록 그 기쁨은 더욱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고 사랑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리아처럼 부활의 큰 기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