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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6(주일) 예레미야 5:20~31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히9:27).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마지막 절인 31절에서 하나님은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31절에 사용된 “마지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아카리트’(acharit)는 기본적으로 끝, 후반부, 결과, 최후 미래 들의 의미를 가집니다. 단순한 시간적 의미(chronological end)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결과 혹은 궁극적인 결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 심판, 또는 약속된 미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첫째, 시간적 끝, 미래의 운명을 말합니다. "너는 권고를 듣고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마지막에 지혜롭게 되리라"(잠 19:20)고 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은 시간적으로 먼 미래를 의미하며, 궁극적인 결과(지혜로움)를 강조합니다. 둘째는 심판의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마지막’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이며 여기서 마지막은 악인의 ‘궁극적인 운명, 결말, 심판’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민족의 운명을 말합니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닫고 자기들의 마지막 결말을 생각하였더라면”(신 32:29) 여기서 ‘마지막’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경우 맞이할 미래의 결과, 심판, 멸망을 암시합니다. 넷째는 소망의 마지막입니다. 예레미야 29:11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 아니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하리트’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미래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운명을 의미합니다. 문맥상 의미는 거짓 선지자와 부패한 지도자들을 따르며 악을 즐기는 이스라엘이 결국 맞이할 심판과 멸망의 결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단순한 시간적 ‘끝’이 아니라 행동의 필연적인 결과,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르게 될 비참한 결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살며,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죄악 가운데 빠졌습니다. 백성들은 불의를 사랑하며 지도자들조차 진리를 외면하고 불의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불순종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물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혹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물으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결단을 내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점검해보아야 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라(20~25절).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비하려면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그러나 이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여기에서 '배반'과 '반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배반(背叛)은 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반역(反逆)은 하나님이나 왕과 같은 권위자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을 뜻합니다. 배반은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를 의미하며, 반역은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대항하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배반자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소 다른 평가를 받지만,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합니다. 배반은 신뢰를 깨뜨리고 공동체의 결속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배반을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 고대 사회에서 배반자는 최악의 범죄자로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에서 국가를 배신한 자(예: 브루투스)는 영원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 중세 유럽에서는 배신자는 주군과 나라를 배반한 자로 간주되어 공공의 적이 되었으며, 종종 잔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 현대 정치에서도 배반자는 정치적 맥락에서 변절자, 내부 고발자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며, 일부는 정의로운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신뢰를 잃고 비난받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야곱 집과 유다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면서 야곱의 집이 어리석고 지각이 없어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고 하십니다(21절).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이기 때문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경외하고 잘 섬겨야 했습니다.
그들이 배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0~22절을 함께 있겠습니다. 예레미야 5:20-22절 “야곱의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아,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영원한 한계를 삼고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바다에 모래를 한계로 두어 그것을 넘지 못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주관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는 절대적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으며,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곧 배반과 불순종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 그들은 인애와 사랑으로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허물과 죄입니다.
23-24절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고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정해진 계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완고하고 반역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배반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23절의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은 단순한 실수나 순간적인 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을 뜻하며, NIV 번역에서는 “완고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가진 백성”이라고 하는데, 고집스럽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배반하고 잊어버리고 떠나면 어떤 수고를 해도 “좋은 것”(25절)을 얻지 못합니다. 또한 그들의 죄가 “좋은 것”을 막아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24절)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배반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았습니다.
불순종과 배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심판을 불러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의 복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0~22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3~24절).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5절).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배반은 최초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창 3:23).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셔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도 반복적으로 배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의산에 올라간 사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사사기 시대에도 반복된 배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다가 → 배반하여 우상 숭배를 하였고 → 하나님의 징계(이방 민족의 압제)를 받고 → 회개하고 → 회복하는 패턴대로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가 시대에도 배반함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13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배반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영적 간음이며, 신뢰를 저버린 행위로 묘사됩니다. 신약시대에는 가룟유다의 배반이 나오지요.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배반자(로마서 3:10-12)가 되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모든 인간이 배반자로서 하나님을 떠난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반응은 심판과 용서입니다. 인간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배반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시며,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고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의 길로 인간을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배반당하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배반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배반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크며,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은 결국 심판을 불러오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적용) 나는 내게 임한 고난보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배반한 내 죄가 더 무겁고 심각한 것을 인정합니까?
2.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라(26~29절)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비하려면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성경은 이기심을 추구하는 자에게 여러 가지 경고를 주십니다. 이기심은 자기중심적 태도, 탐욕, 교만, 사랑 없는 행위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파괴합니다.
이기심은 죄악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기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하며, 이기적인 자에게 닥칠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2:8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즉, 자기 이익을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 26~29절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기 이익만을 탐하며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을 강하게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26~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마치 사냥꾼처럼 약한 자를 함정에 빠뜨려 착취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탐욕적으로 속임수를 써서 재물을 쌓고 거부(부자)가 됩니다.
이들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재물은 결국 심판을 초래합니다. 성도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28절 말씀에서 악인들은 악인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며) 약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고아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인데, 그들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번영과 성공뿐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에는 무관심합니다.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돈과 성공보다 정직과 선한 행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다가 놓는 이기적인 행동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이 말은 농업사회에서 물을 배분할 때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는 행동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아전인수를 극복하는 방법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익의 균형을 맞추며, 투명한 소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협력과 배려는 통해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29절에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이익만을 탐하고, 타인을 착취하는 악한 행위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으며,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이 “어찌 이같은 나라를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29절)며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이익을 우선시 하고, 불의를 즐기고 공의를 무시하며, 강한 자에게는 굴복하나 연약한 자를 돌보지 않고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경고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것입니다.
[예화] 2017년 12월 10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BMW 댈러스 마라톤 대회에서의 일입니다. 여성부 1위로 달리고 있던 뉴욕 정신과 의사인 첸들러 셀프가 결승선을 고작 183m를 남기고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완전히 풀린 첸들러 셀프는 더는 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던 2위 주자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2위 주자인 17세 고교생 아리아나 루터먼은, 첸들러 셀프를 부축하고 함께 뛰기 시작했습니다.
의식을 잃을 것 같은 첸들러 셀프에게, 아리아나 루터먼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결승선이 바로 저기 눈앞에 있어요’라고 끊임없이 응원하며 함께 달렸습니다. 그리고 결승선 앞에서 그녀의 등을 밀어주어 우승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미국 시민들의 시선은 1등이 아니라, 2위로 들어온 아리아나 루터먼에게 돌아갔고 큰 환호와 찬사를 받았습니다. 17살밖에 안 된 여고생의 행동이 놀랍지 않나요?
성경은 이기심이 죄를 낳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결국 심판을 초래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24)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자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나는 내 이익과 교회 공동체의 이익 중 무엇을 더 중요시합니까? 오늘 내가 구원 때문에 포기해야 할 나의 이익은 무엇입니까?
3.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라(30~31절)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비하려면 회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보다 자기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더 원합니다. 이는 말세의 징조입니다(딤후4:3).
포스트모던시대는 절대 기준이 사라진 혼돈의 시대입니다다. 어떤 말을 해도 조합이 되며 조화로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공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선포한 말씀은 “회개하라”입니다.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행복하라”가 아니라 “돌이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살던 방식에서 돌이키고, 자신의 욕심과 죄를 따라 갔던 이전의 것에서 완전히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중심을 고치는 것이고, 뉘우치는 것이며 전인격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삶의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항복’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조심스러운 부탁이나 제안이 아닙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회개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최후의 경고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오던 이들로 복음의 메시지와 회개하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마치 뭔가를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독교 안에 사랑과 은혜와 구원이 있는 것은 맞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경고했어도 돌이키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마지막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즐겁고 기쁜 메시지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무서운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온 세례 요한도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1-2)라는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성령님이 오신 오순절에 설교할 때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너희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충분히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1장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 “화 있을 진저”라고 말하며 소돔과 고모라보다 심각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마13장에서는 들을 귀 없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듣지 않는 교만한 자들, 경고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이 더 이상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고 죄를 사랑하며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하는 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비하려면 회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 직전 감옥에서 쓴 마지막 편지로, 젊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말세에 교회가 겪을 어려움에 대해 경고하면서, 참된 복음을 끝까지 지켜야 함을 강조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여기서 "때"는 말세(말세의 마지막 시대)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를 가리키며,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바른 교훈"(건전한 교리, sound doctrine)은 성경의 진리와 복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듣기 싫어하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귀가 가려워서"에서 "귀가 가렵다"는 표현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가르침만을 찾는 모습을 뜻합니다.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사욕"(자기의 욕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욕심과 탐욕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맞는 가르침을 해주는 거짓 교사들을 따를 것입니다. 거짓 스승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복음을 왜곡하거나, 부담 없는 가르침을 전하게 됩니다.
30,3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런 맥락하에서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라는 선지자의 경고의 말씀을 외면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불편하게 여기며 반대로 “평안하고 안전하리라”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더 좋아합니다. 이들은 타락한 영적 지도자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고, 결국 거짓된 가르침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되었고, 결국 회개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거짓된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기뻐하며 죄를 즐겼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길 원합니다. 이렇게 회개에 대한 촉구를 거부하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떤 미국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부흥 목사가 설교를 마친 후 기도하는 중에 강단에서 내려와 머리 숙여 기도하는 이들 하나하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면서 회개하라고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신학교 교수가 한 분 앉아 있었습니다. 교수 머리 위에도 손을 얹으며 회개하라고 하니까 그이는 ‘나는 아무 신학교 교수’라고 아마 이런 말을 조용한 음성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 목사는 잘 알아듣지 못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큰 목소리로 "그거 쓸데없어요.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그 신학 교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신학교 교수에게도 제일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어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퇴원시키는 여부를 놓고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합니다. 방에 있는 수도꼭지에 물을 조금 틀어놓고 방바닥에 괴여 있는 물을 대걸레로 훔치게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먼저 수도꼭지를 닫은 다음에 방바닥의 물을 훔쳐내지만, 비정상적인 사람은 그냥 대걸레 하루 종일 방바닥의 물을 훔쳐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려면 문제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화 할 때 세 가지를 금기시 합니다. 하나는 정치 이야기입니다. 둘은 종교 이야기입니다. 셋은 사생활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가급적 서로 나누는 대화의 소재로 삼기를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적하신 것은 바로 그 은밀한 사생활이었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7-10).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 앞에 설 인생의 마지막 날을 바라보며 오늘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내 영혼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첫째로,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성경의 바른 교훈보다는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을 만족시키는 가르침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죄를 지적하는 말씀보다, 듣기 좋은 위로와 번영의 메시지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로, 거짓 가르침의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는 스승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대비해야 하려면 우리는 바른 교훈(성경의 진리)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즉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따르며 자신의 죄를 보면서 회개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죄에 관대해지면 그만큼 우리 삶은 편해질 것입니다. 더 성공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교회에 헌금도 더 많이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봉사할 기회도 더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결혼하기도 쉬워질 것이고, 직장 생활, 학교 생활, 모든 면에서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죄와 싸우지 않으니,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이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영원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죄에 관대하지 않고 싸워서 생기는 지금의 불편함,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며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때까지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과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주님께 청산해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율법 앞에 나가서 과거를 청산하면 그에 대해서 벌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과거를 고백할 때 그를 청산하고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드러내고 거기에 대한 형벌을 내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형벌하신다면 우리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다 짊어졌었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실 때 어떠한 죄를 회개해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지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과거는 주님께서 예수의 피로써 씻어버리고 다시 생각도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현재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신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율법을 가지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가지고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식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회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종중에 하나로 보아 주시옵소서. 회개의 기도를 아버지가 듣자마자 그 아들을 끌어안고 그 아들에게 의로운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의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좋은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성령으로 아들 된 증거로써 중생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예비한 신발을 신겨 주시고 그리고 가만히 보세요.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정한 회개, 합당한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만 아니라 죄의 길에서 돌이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통해 그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실로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고백이나 슬픔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섬, 곤 전적인 삶의 변화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곧 과거에 행하던 죄악의 길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의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거듭해서 고백하고 아무리 죄에 대하여 슬퍼한다고 해고 그 행동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하였다고 해도 이전의 죄악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면 그는 결코 회개한 자가 아닙니다.
[예화] 어떤 흑인 목사님이 있었는데 한번은 그의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다는 발표를 했읍니다. 그런데 막상 죽은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읍니다. 성도들이 장례식을 위해 교회에 왔읍니다. 강단 앞에는 관이 놓여 있고 이곳 저곳에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꽃들이 놓여 있었읍니다. 그 목사님은 죽은 사람을 기리는 칭송의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 있을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지었다고 하면서 사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될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설교가 끝나자 그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이 끔찍한 죄인이 누구인지 그의 모습을 한 번씩 바라보도록 관 곁으로 다가오게 하였읍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관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관은 텅 비어 있었고 대신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었습니다. 관속의 그 거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비칠 뿐이었읍니다. 그 때 그 흑인 목사님은 "바로 그 거울에 비취는 사람들이 바로 제가 설명한 그 죄인입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읍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깨닫고 주님께 회개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요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회개하라’와 ‘평안하라’는 말씀 중 어떤 말을 듣기를 더 좋아합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우연은 없어” 전호진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좋은 원장님을 만나 높은 연봉을 받으며 시간적,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보다 돈을 많이 주는 원장님을 우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던 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죄인이었습니다(21절).
당시 저의 관심은 온통 병원의 매출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양제를 더 많이 팔 수 있을까?” 고민하고, 환자들에게 값이 좀 더 나가는 주사를 맞도록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의 가치관이 아닌 세상 가치관에 따라 제 이익을 얻으려고 일한 것입니다(28절). 겉으로는 선한 척 친절하게 행동했지만, 실상은 이기심이 가득한 악인이었습니다(26절). 그런 제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셨던 하나님은 병원 문이 닫게 하셨습니다. 저는 한 순간에 내 우상과 같던 원장님과 병원이 사라지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잠시 원망하기도 했지만, 고난이 오니 말씀이 저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하나님을 잠시 원망하기도 했지만, 고난이 오니 말씀이 저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저는 다시 한 절 한 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동안 제가 병원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했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내원하는 환자들을 병원 매출을 올려줄 수단으로만 여겼던 저의 허물과 죄가 보여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내 죄를 깨닫게 되니 직장 고난은 절대 우연이 아닌 나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임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이익과 욕심을 내려놓자 믿지 않는 가족에 대한 구원의 애통함도 생겼습니다. 그 후 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청년부 소그룹 리더로 세워졌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고 날마다 외쳐주는 공동체에 속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24절). 앞으로 말씀의 가치관에 따라 영혼 구원을 위해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겠습니다. 적용하기) 매일 밤 자기 전에 청년부 소그룹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보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통화하며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1절)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는 자로 이 땅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말을 듣고 돌이키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로 오늘 이 시간 결단하시고, 기도하시는 이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