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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밀림에서 짐승처럼 살다 2007년 발견된 캄보디아 ‘늑대소녀’가 있습니다. 로촘 프니엥(29)인데, 인간사회로 돌아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정글 속으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아닌 짐승들과 함께 살다가 짐승으로 동화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은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양육강식의 정글 같은 공동체로, 혹은 사랑과 섬김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영적 공동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존재의 목적과 가치를 알고 바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에 불러모아 주신 것은 인간적인 일을 도모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 입니다(롬 8: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게 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합니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세상 속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연합과 일치(한 마음, 한 뜻)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우리는예수님이어떤분이신가를아는것이중요합니다.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서 ‘하나님과 동등되다’ 라고 했습니다.
‘본체’(모르페)라는 말은 단순히 사물의 외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성질을 비롯한 정체(identity)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정체를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조금 떨어지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등신(최고이 신보다 열등하신 신)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로고스)으로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주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보다 더 높은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과 능력을 다 가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얼마나 높은가를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조그마한 어선을 타고 있는 밤중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죽겠다고 야단법석을 부릴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서 손을 내밀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그것이 일시에 정지하였습니다. 창조주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렇게 바람과 바다를 순종케 하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 밖에 없는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은 애통이 여기시고, 지나가는 장례를 멈추게 하고는 죽은 아들을 살려서 과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기쁨과 행복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내 인생의 풍랑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모시고 사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6-7절을 다시 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광과 주권과 능력을 다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다고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이미 가지신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자신의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고집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를 비어’ 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모든 권능을 쏟아 버리시고 영광을 버리시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견해입니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 똑같은 영광과 똑같은 권위를 주장할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말은 영광과 권능이 예수님에게서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지위를 버렸다는 것은 신성을 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셨습니다. 신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신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제한 속에 스스로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에 신성(神聖)의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에게 궁핍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먹고도 얼마나 많이 남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늘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예수님은 굶기도 하셨습니다. 목마름을 친히 겪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입성하실 수도 있지만 그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지만 능력을 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낮은 몸의 상태에서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로마 군병에 의해서 끌려가실 때에 예수님은 얼마든지 천사를 동원해서 로마군인이 수만이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춘풍낙엽처럼 흩으시고 쓰러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끌려가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신 권세와 영광과 주권을 다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무한함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낮고 천한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왕이 일반 백성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 왕이 평민 의복으로 위장해서 감찰하곤 했습니다. 왕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왕이 직접 평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는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하는데 이때의 형체(몰페)란 단순히 겉데기만 혹은 환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인간으로 더욱이 복종과 봉사와 천대와 멸시로 특징되어지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친히 노예와 같이 되셔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지위에 계속 계실 수 있는데 죄의 노예로 신음하는 인간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의 노예로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의 형체를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의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비우고, 죄된 인간의 자리에 내려오시므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인간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고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로 내려가야 합니까? 나의 영광과 명예와 이기심을 버리고 내려가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 권위를 내려놓고, 내 이기심을 내려놓고, 내 입장을 내려놓고, 내 자녀와 아내와 남편과 교회식구와 이웃을 만난다면 분명코 우리 삶의 현장에는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8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어디까지 갔습니까? 전능자이신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셔서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기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지 않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가 소속한 한국교단에서는 이번에 사도신경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시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를 채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까지 내려가시어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의 형벌까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절정입니다.
이 겸손을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겸손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겸손함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다루는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여순 반란사건 때에 자신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죽인 학생을 자신의 양자로 맞아드리므로 그 학생을 살려주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자신의 자녀를 죽인 자를 어떻게 용서하고, 양자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도토리 키재기를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키재기를 한다면 그 사람을 원수로 대하고,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손 목사님은 예수님과 키재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나를 품고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온 겸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겸손하심에 빠져버렸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주님이 자기 속에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용서가 일어나고 화합과 일치를 낳게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도 분노하고 섭섭한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마음이 듭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섭섭한 감정을 던져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생깁니까?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대하는 사람과 키재기를 하면 섭섭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주님과 키재기를 하면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하루 아침에 많은 재산과 자식을 잃게 되었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재속에 들어가 기와조각으로 긁어야 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욥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죄의 결과이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지적에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욥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욥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입을 가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입을 가렸을까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로운 척 한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입을 가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말이 많고, 아직도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편하지 못하고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마태복음 11:2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의 마음을 배워서 겸손하므로 다른 사람을 세워가므로 연합하고 하나되는 역사가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 속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505,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