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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복음
오늘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
부스러기로 열두 광주리 남았다
여러분은 이게 믿어지는가? 그때 사람들도 못 믿었다. 이것 때문에 논란이 생겼다. 모세는 우리를 40년 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여 살렸는데 이거 한 끼 먹인다고 뭐가 되냐? 이런 사람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사람이 생기고, 여러 가지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릴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그랬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너무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걸림이 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했다.
앞의 줄 같으면 우리는 이해가 될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릴 것이다.”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 이 얘기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요6:57-59)
제자 중 여럿이 듣고 가로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들을 수 있냐? 자기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사실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걸림이 되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면 ‘내 살과 피가 아니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다른 것이다.’ 이런 말이 된다.
내가 여러 번 요한복음을 하면서 이 얘기를 했다. 이 말씀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말씀은 다 그렇고 말해왔다. 그러니까 모든 형제가 이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하겠구나.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구나 하고 말씀을 열심히 듣게 됐다.
그런데 내가 말한 이 마지막 복음은 결국은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내가 그 안에 있다. 그는 나고 나는 그다. 이 말이 그 말이다. 어떤가? 다른 말인가? 같은 말이다.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2천년 동안 버려진 채로 누구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왜냐, 살과 피를 먹으면 뭐하냐? 그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상대하겠는가.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와 만나겠는가. 어떤 말을 듣고 내가 예수와 만났다고 하겠는가. 그런 말이 없다.
어느 말을 들어도 참 심오한 말이라고 하든지, 모르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모르겠다고 하지, 예수와 내가 하나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말을 들어보기는 정말 어렵다.
나도 평생을 예수만, 예수만 이렇게 살아왔다. 왜냐면 나는 원래 예수를 몰랐다. 그 예수님에게 부름 받은 일도 없다. 예수님이 나를 살려준 일도 없다. 누군지 모르는 어떤 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내가 노와도 땅을 떠났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몇 번이고 오해가 없기 위해서 얘기를 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있기는 있지만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왜냐면 나에게 이러이러한 은혜를 확실하게 베풀어 줬지만 안 보이니까 나는 모른다.
성령도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은 알지만 성령이 어디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는 모른다. 그 성령을 받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안 되더라. 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서 성령이 왔다 하고 꿈을 꾸면서 성령이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나는 방언도 안 되고 꿈도 안 꾸어지고 아무것도 안 되었다.
그러니 내가 성령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없다는 말이 아니고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조심해서 몇 번이고 강조해서 얘기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유명한 어떤 분이 지난주 목요일에 나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님은 하나님도 없고 성령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너무 놀라운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해지더라. 그렇게 설명을 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도 없다고 했고 성령도 없다 했다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성령이다’ 이러면 다 된 말 같은데 안 된다. 이것에 대해서 각자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꿈에 들었다. 나는 기적을 통해 봤다. 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또 모호해진다.
예수가 끝에 와서 마무리할 때 제자들이 어렵다고 하니까,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디로 가버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그 살과 피를 먹는 세계로 지금 들어왔다. 이렇게 안 되면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말씀하신 일, 그 속에서 내가 예수를 먹을 수 없다. 너무나 높고, 너무나 다르고, 너무나 나와는 멀기 때문이다.
예수가 마지막에 하나님, 하나님, 그때는 아버지라는 말도 못 하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을 때, 옛날에 여러분이 다 들었을 것이다. 세상에 누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이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얼마나 완전하게 자기를 드렸으면 나를 버렸냐고 하겠는가.
이것은 예수밖에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렇게 여러번 얘기했다. 아주 매끄럽게 누가 들어도 손색없이 내가 해석을 한 셈이다. 누구도 내 말에 대해서 아니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예수를 구체적으로 찾다 보니까 유대인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내려와 보라 했는데 그래도 못 내려왔다. 제자들이 이것을 끝까지 보고 있다가 완전히 실망 되어서 고기 잡던 데로 돌아갔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옛날에 기도하실 때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랬다. 여기서는 아버지라는 말이 없어져 버린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렇게 나왔다.
이번에는 그것을 보니까 아하, 이것이 맞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대답을 했다면 뭐라 했겠는가. ‘나는 신이다. 그렇지만 너는 사람이잖아. 아니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면 죽는 것이 당연하지 어찌하여 버렸냐고 하냐? 그전에 말하지’ 이런 말로 들리더라.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분리되는구나.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신이고 쫙 갈라지는구나. 그렇게 하니까 예수 아는 것이 아주 명백해진다. 나는 한 번도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도 그러니까 항상 걸려있었다.
여기서 나는 완전히 벗어났다.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알고 나서 교회 앞에서 그랬다. ‘나는 이제 만날만한 예수를 만났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를 만났다. 다른 예수는 모르지만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를 만났다’
내 죄를 위해서 희생양이 됐다는 것도 잘 모르고. 부활했다는 것도 잘 모르고.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도 여러분도 잘 모른다. 부활을 본 사람이 있는가? 부활을 본 사람들도 모른다.
40일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떠날 때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 3년 전에 했던 말을 또 한다. 그러니까 예수와 4십일 동안 함께 있어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안다고 하겠는가? 참 재주 있는 사람들이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사람들이다. 현장에서도 몰랐다는데 어떻게 안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말한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산다. 내가 그와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같은 모양으로 산다.”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이 우리에게는 정확하지 못하다. 바울에게는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정확하지 못하다.
그래도 하여간 그렇게 해석을 해서 잘 먹고 잘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쫙 갈라지니까 이것이 명백해진다. 이 말씀들이 확실해진다. 아하 그렇구나.
왜 이것이 옳으냐면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라야 한다. 씨는 씨고 흙은 흙이라야지 흙도 아니고 씨도 아닌 것은 다시 열매가 될 수 없다. 여자는 여자이고 남자는 남자라야 한다. 남자도 반 여자도 반이면 아기를 못 낳으니 아무 쓸모가 없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자라야 한다.
여자는 완전히 남자와 다르다. 사람은 사람인데 둘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평생 함께 살아도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모르는 법이다. 여러분 남편 조르지 마세요. 왜 나를 몰라주느냐고 졸라봐야 헛일이다. 모르는데 어쩌겠는가?
아내에게 조르는 사람도 있다. 너는 왜 내 속을 모르냐? 이것이 부부 간의 분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서로 달라야 한다. 완전히 달라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도 완전히 달라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게도 필요하고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칼빈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자기의 구원관에 대해서 말할 때 마지막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했지만 연합할 방법이 없다. 뭔가 비슷해야 연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그러면 여자를 보고 나하고 비슷해야지 결혼하지, 너무 달라서 결혼하겠나? 이러면 결혼을 못 한다. 잘 생각해 보라.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완전히 달라야 한다. 그래야 둘이 서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특별한 목적은 둘이 연합해서 하나 되어야 할 그런 목적을 말이다.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안에 있다는 이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예수를 먹으려면 거기 와야 먹을 수 있지 다른 데서는 먹을 방법이 없다. 어떻게 예수를 먹겠는가?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여기 보면 먹으라고 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해서 살리라. 이렇게 쉽게 명백하게 써있다. 이렇게 쉽게 써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먹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산 사람을 먹느냐? 아니면 어떻게 죽은 사람을 먹느냐? 이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는 그로 인해서 그는 나로 인해서 살리라. 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내가 그를 먹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다.
보니까 아무리 봐도 나다. 여러분 잘 봐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그게 누구인가? 예수인가? 나인가? 나 아닌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아니 나는 아니야. 그럴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 나다. 그러니까 예수와 내가 하나 된다. 나도 그 사람이고 그 사람도 그 사람이다. 나도 그 사람 그도 그 사람이다.
이번에 주윤숙 자매가 오늘 한번 나올 것인데, 빵 터진 것이 뭐냐면 선포를 하는데 내가 ’나도. 나도‘ 그랬더니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냐면 ’나다. 나다‘ 이 말로 알아들었다. 나도 나도 라는 말을 나다 나다 이 말로 알아들었다. 같은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확 밝아졌다. 야, 목사님과 내가 하나구나. 이렇게 발견됐다. 그래서 우리 집에 오는데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서 왔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냥 먹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니까 먹지 그렇지 않으면 먹어지겠는가. 무슨 수로, 어떻게 해서 내가 예수를 먹고 마시고 하겠는가.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를 먹고 마신다고 한다. 한번 호흡할 때 주 마셔. 그런 노래가 있다. 그래서 ’오 주 예수여‘ 계속 부르짖는 이유가 예수를 마시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예수가 마셔지는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 사람들은 마시면서 그렇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때, 자기와 완전히 연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었다. 그것이 절대적인 목적이다. 절대적인 것이 다른 게 아니다. 자기와 연합할 수 있도록 지은 게 특별한 목적이다.
영이요 생명이신 신과 육이요 뼈밖에 없는 인생이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절대로 불가능한 두 존재가 만나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것이 복음이다.
절대로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자는 남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둘이 결혼하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니까 흙과 씨는 완전히 다르다. 씨 같은 흙도 없고 흙 같은 씨도 없다. 비슷한 것이 없고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흙에 씨가 심기면 그것이 나와서 열매가 된다.
옥수수밭에서 옥수수가 열린다. 콩밭에 콩이 열린다. 미국은 그 농장이 얼마나 큰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봐도 큰 덩어리로 보인다. 옛날에 창경이 형제가 오리온 제과에 있을 때 그 농장을 견학하고 온 적 있는데 한 바퀴 도는데 차를 타고 하루종일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직선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없고 빙빙 돌아가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농장이 넓다. 거기서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옥수수가 나온다. 그것이 잉여 농산물이 되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동물 사료로 들어왔지만 우리는 배가 고파서 그것을 먹고 살았다.
이것이 신기한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고 아주 신기한 일이다. 이것은 어떤 과학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꼭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한다.
앞으로 과학이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발전해도 이것은 안 된다. 여자 만들고 남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고 봐라. 그때까지 살지 안 살지 모르지만 하여간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하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면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창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신기한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냥 와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신기한 세계에 와 있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 세계에 왔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평범한데 아기 낳는 세계에 왔다.
남자 백만 명이 모여도 아기 하나를 낳을 수 없다. 아무리 친해도, 절친이라도 안 된다. 그런데 한 사람의 여자가 아기를 낳게 된다. 아기를 낳는 데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지 백만 명의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잠자다 일어나도 신기하다. 너무너무 신기하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예수와 연합하다니! 내가 평생 예수밖에 모른다고 하고 살았지만 연합은 안 되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 아니다. 이것은 신화다. 이렇게 버리면 자유주의자가 된다. 아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믿어야 한다. 이러면 보수 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보수 꼴통도 되기 싫고 자유주의자도 되기가 싫다. 그래서 나 대로 이렇게 해석을 했다. 썰렁하던 내 인생에 예수가 개입하시니까 잔칫집처럼 풍성해지더라. 이것은 내 경험이 그랬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석을 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공감을 했다.
이렇게만 알았지, 그렇다고 예수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 되지 못한다. 하나 되는 것은 몰랐고 하나 되려고 생각도 안 했다. 너무 놀라운 분이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분이라고 생각만 했지 나와 하나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언제 벌써 하나가 되어있다. 하나가 되어있다. 나는 그대로인데 예수가 그렇게 잘게 쪼개져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나와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로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하나님이 하신 것이 복음이다.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다. 그런데 전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놓으신 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해놓으신 일이지 내가 원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예수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를지도 모른다. 그만큼 했는데 왜 나를 버렸을까? 자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버림 받은 것을 모를 수도 있다.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모른다.
예수님도 몰랐다고 하면 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알았으면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을 왜 하겠는가. 몰랐으니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를 버린 하나님을 몰랐으니까 한 것이다.
솔직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을 가지고, 남이 얘기한 것을 가지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솔직하게 모르니까 모른다고 한 것이고, 버림받았으니까 버림받았다고 한 것이다. 답이 없었으니 없다고 한 것이다.
성경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 참말만 했다. 지금 와서 보니 애매했던 것, 이럴 수 있나 했던 것이 다 알아진다. 그러니까 너무 신기하다. 이것은 마치 어떤 다른 언어 같다. 이 자리에 와서 보니까 전혀 다른 말 같다.
선포를 해봐라. 선포를 왜 하냐? 선포한다고 뭐가 되냐? 뭐가 나타나야지, 향기가 나야지, 본받을 만한 것이 있어야지, 이런다. 그 말이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것은 모르는 일이다. 예수와 하나 되면 뭐가 되냐? 뭐가 될지 모른다.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그 결과기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기가 오줌똥 싸는 것을 보고 이것을 안 싸야 어른이 될 것이다. 장가를 갈 것이다. 하는데 그것은 뒤로 다 경험해 보고 한 말이다. 맨 처음에 어떤 사람이 아기를 낳았다고 생각을 해보자. 맨 처음에, 한 번도 아기를 본 일이 없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누가 아기를 낳았다고 생각해 보자. 뭘 알겠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똑같다.
우리가 지금 아주 솔직하게 사실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 때문에 상식 때문에 속은 것에서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왜 결과를 요구하는가? 향기를 요구하는가? 무엇 때문에 요구하는가? 세상에 잘 보이려고 그런다.
내가 만약에 예수와 연합했다고 해놓고 저 사람 휼륭하게 됐어. 놀랍게 됐어. 그러면 나도 좋고 세상이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오지는 않는다.
그러면 세상을 좋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찍히지 않기 위해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못하면서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자기는 향기가 나는가? 자기는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것이 있는가? 자기도 그것이 없다. 그런데 왜 하는가? 그렇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바울은 말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부끄럽다는 말을 썼는가? 그 사실 자체가 부끄러우니까 그런 것이다. 사실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다. 너희 주님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 묻는데 이러저러해서 죽은 사람이요. 그것이 뭐 자랑할 것이 있는가?
서울에 가니 아이들이 욕하는 것도 서울 사람답다. 아이들이 서로 욕하기를 뭐라 하냐면, ’너희 아버지 퍼야 퍼‘ 그러는데 무슨 말이냐면 ’똥 퍼‘ 라고 똥 푸러 다닌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똥 퍼‘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처럼 수세식 변소가 없고 항아리 같은 데 싸면 그것을 일일이 거둬가는 사람이 있었다. 똥을 퍼가는 사람이라고 ’똥 퍼‘인데 아이들이 욕하기를 퍼, 퍼 그런다. ’너희 아버지는 퍼야 퍼‘ 제일 창피하게 하는 말이다.
욕도 아주 점잖다. 어린아이들이 욕을 하면서 개자식이라고 한다. 다른 욕이 없다. 개자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스러운 말인가. 서울 사람들 점잖다. 말씨가 매끄럽고 곱다.
음식도 참 매끄럽게 해 먹는다. 우리가 먹는 단술도 어떻게 먹느냐면, 단술을 만드는데 그 단술 그대로 상차림에 내놓는 것이 아니고 삭아버린 꽉 짜서 건져 놓고 설탕물에 타면 하얗게 떠오른다.
거기에 잣이나 대추를 썰어 놓는다. 봄철 같으면 진달래꽃 하나를 얹으면 보기 좋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단술이 아니고 설탕물이다. 그렇게 깔끔하고 보기 좋은 것을 좋아한다. 음식도 그냥 먹지 않고 다 색깔을 맞춰서 먹는다. 서울 사람은 역시 다르다.
그런 세계니까 개자식이 욕이다. 저 전라도 쪽으로 가면 욕이 무지 많다. 욕에서 욕으로 연결해서 얘기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별로 크게 생각지 않는다. 다 그러니까. 그 정도인데, 서울 가면 욕이 없다. 개자식, 퍼, 이거밖에 없다.
그러니 상대방을 제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욕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뭔 일이 있어야 그 말을 하지 그냥 그 말을 하겠는가. 예수를 예수대로 내놓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아니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더군다나 희랍세계는 유명한 사람을 보고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세계다.
유명한 철인을 보고도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황제를 보고도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황제를 천자라고 한다. 하늘 天(천) 아들 子(자)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유명한 사람을 놓고 할 때 더 이상의 찬사를 드릴 수 없을 때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니 그것이 말이 되겠는가.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이 말을 하기 부끄러우면 복음을 못 전한다. 이 말이 당당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야 이 선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무조건 선포하고 가라고 한다.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하라고 한다. 그랬더니 하고 간 사람마다 다 좋다고 한다. 생각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것이 주문이 아니다. 주문 외운다. 혹은, 말뿐이다. 그러는데 그것은 다 세상에 자기가 부끄럽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다. 대구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말을 안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어떤가? 누가 들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믿는 교회다.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에이 그거 이단이구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구만. 이럴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아멘 한다. 신기하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대번에 아멘 한다.
오늘 나와서 간증했던 태진이와 지선이가 그렇다. 지선이가 맨 처음 우리 집에 왔다. 그날 저녁이 크리스마스였는지 마루에 사람들이 가득 찼었는데 조그마한 학생이 차분한 말로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지선이라고 한다.
지선이, 지극히 선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 하고 在新民(재신민) 하며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 이니라
임금의 도는 지극히 선한데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네 이름이 참 좋다고 했다. 지극히 선한데 이르겠다고 했다더니 한 번도 구부러짐이 없이 계속 저렇게 선포를 한다.
저것이 대학지도다. 지극히 선한 도다. 그러니까 저런 지선이와 사는 태진이가 저렇게 안 될 수 없다. 마누라가 저러니 안 될 방법이 없다.
오늘 우리는 참 어떤 역설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세계가 우리에게는 너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 자다가 일어나도 나는 신기하다. 신기하다. 어찌 이런 세계가 다 있나. 어떻게 이런 세계가 다 있나. 이런다.
머뭇머뭇하는 사람은 다 이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이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 말을 해도 되나. 그러면 내가 이런 사람 되는가? 이런 것 때문에 못한다. 여러분도 다 경험이 있다. 그래서 망설이고 그랬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면으로 보면 대단히 놀라운 사람들이고 다른 한 면으로 보면 지극히 이상한 사람들이다.
놀라운 복음, 신기한 복음, 복음은 사람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해놓은 것이 복음이다. 그것 아닌 다른 것은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다 할 수 있는데 왜 복음인가. 내가 다 할 수 있는데 뭐가 복음인가?
기도도 내가 할 수 있다. 충성도 내가 할 수 있다. 믿음도 내가 가질 수 있다. 다 내가 할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내가 못한 것을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 그것이 복음이다. 내가 예수를 먹을 수 없다. 내가 만나는 먹었지만, 예수는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딱 준비해 놓았다.
봐라. 눈으로 봐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다. 말만 듣지 말고 봐라. 보면 안다. 이보다 쉬운 것이 없다. 보고 아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말을 듣고 안다는 것은 참 어렵다. 좀 전에도 말을 했지만, 말을 어떻게 해야 안 걸릴까? 그렇게 주의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이 없고 성령이 없다 한다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말한 것이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들었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이 생길 때마다 뭐가 부족했는가? 이 생각을 한다. 왜냐,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그렇게 실족케 했으니 미안하다. 그렇지 않은 일도 실족케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실족을 하게 되면 어찌 되겠나.
다른 일도 나를 보면 실족할 일이 많다. 이것은 신성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의 깊게 말해도 빗나가버린 사람이 있다. 왜냐? 말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눈으로 보라고 한다. 와 보라.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내려가서 와보라. 내 모든 것을 말하는 사람을 봤다. 이 여자가 그랬다. 와보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이 사람을 보여주러 가는 것이다. 와 보라. 교회를 와보라. 아니면 나를 봐라. 이러려고 가는 것이다.
와보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보고, 야 여기 사람 살만한 데구나. 어떤 사람은 보고, 여기 시시한 사람만 모여 있네, 오죽하면 저런데 와 있나. 이렇게 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왔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영광스러우니까 이것이 신기한 일이다. 뭐가 넉넉해서 온 것이 아니다. 대부분 다 어쩔 수 없어서 온 사람들이다.
그래도 이번에 희망이 보이는 게, 공부하면서 알았다는 그 기술사는 고급 인력이다. 그런 사람도 알게 된다면 희망이 있다. 그러면 꼭 가난한 사람만 오는 게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올 사람이 있구나. 왜? 인간의 본질은 다 똑같으니까, 능력은 다르지만 인간은 같으니까 결국은 만날 것이다.
우리가 이 가난한 자리에서 충만해지면 그때는 부유한 사람이 보고, 우리 부유함보다 낫구나. 하고 올 것이라고 바울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예수로 인해서 풍성해진 것을 보면 우리 동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언젠가는 다 돌아온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듯이 언젠가는 돌아온다. 갈 데가 없다. 인간이 어디 갈 데가 없다. 아무리 다른 것을 찾아보려고 해도 없다.
어찌하면 저 길을 피해서 내가 다른 길을 찾아볼까? 아무리 해도 없다. 찾아봐야 헛일이다. 2천 년 동안 찾았는데 안 된다. 그런 예수를 버리고 더 좋은 길을 찾아봐도 없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죽은 예수를 먹으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시 산다.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살게 된다.
Life가 Live다. 생명이 Live다. 이 떡을 먹은 자는 영원히 살리라.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고 이 떡을 먹은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을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셨느니라.
아주 확실하게 말해 놓았다. 우리는 이 땅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경계선이 분명한 땅이다. 그래서 아무리 무슨 일로 팔아먹었어도, 아무리 무슨 일로 빼앗겼어도, 50년이 되면 반환해야 한다. 무조건 반환해야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법이다. 우리에게 경계 지어준 것은 영원히 우리 것이다. 이것을 버리면 나는 기업이 없는 사람이 된다. 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
열심히 산다. 누구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민족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산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도로 흙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번 쓰이더라도 쓰이고 죽으면 여한이 없다. 한번 쓰이더라도 인생의 값을 100% 받는 것이다. 100%가 아니라 200%, 300% 받는 것이다. 그래서 여한이 없어진다. 하나님께 쓰이고 나면 여한이 없어진다.
그러기 전까지는 계속 뭔가 갈증이 생기고 부족함이 생기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다. 세상이라는 것이 묘하다. 천만 원이 생기면 일억만 있으면 하는데 일억을 가지면 만족이 안 되고 십억만 있으면 되는데, 이것이 이상하다. 만족이 되어야 하는데 만족이 안 된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이것은 만나면 만족이 된다. 내려간 것 같은데 더 만족이 된다. 내려갔는데 만족이 된다. 신기한 세계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지 못하니라.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하지 마라. 한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높아지는 세계에 와 있다. 밑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높아지는 세계로 떨어진다.
우리 은혜가 그 얘기를 한다. 올라가려니 힘들어 못가겠더라. 밑으로 내려오니 쉽더라. 그런데 마지막에 오니까 앞이 안 보인다. 그런데 갈 데가 없어 뛰어내렸더니 평지더라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반대다. 천로역정은 끝까지 올라가서 천성문 앞에까지 갔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은 천로역정이 아니라 너무 쉬운 길이다.
이 말을 들어줘서 감사하다. 내가 유명한 설교를 해서 들어줬으면 당연하지만, 유명한 설교가 아닌 말을 했는데 들어줘서 감사하다. 박수 한 번 치고 마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