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불이 들어오다
1970년대 농어촌에는 새마을 운동에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전화(電化)사업이 한창이었다. 전기화(電氣化)사업이다. 국가에서는 읍내의 건장한 청년들을 고용하여 한전기술자들과 농어촌 각 지역을 다니면서 콘크리트 전주를 세우며 전화사업이 한창이었다. 내가 사는 만가대 라는 마을에도 전깃불을 켜며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집은 마을 끝집에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진 산 밑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어릴 적엔 우리 집도 마을 한 가운데 있어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가 주라이 산 밑에 경작하는 아버지 소유의 경작하는 밭이 삼천평정도 되었으며 밭 한쪽에 집을 신축하고 이사를 했다. 그 당시엔 읍내의 다른 마을가 마찬가지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로 빛을 내며 살고 있었다. 내가 성장하여 세월이 흘러 군에 입대했다. 정해진 일정에 모든 유격훈련을 마치고 도피 및 탈출이라는 마지막 훈련은 명지산을 비롯해 가평군 일대를 밤새도록 걷는 야간산행훈련이었다. 그런데 훈련 중 경기도에서 가장 깊고 오지인 가평 어느 오지 마을을 지나오는데 그 깊은 골짜기 마을도 형성되어 있지 않은 외딴집까지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은가?
삼십 사개월 보름 만에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이듬해인 1978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한 정치는 학생들의 소요사태와 세 김 씨의 정치권력다툼으로 인하여 국가는 혼란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국가구호로 정치는 착착 안정되어 갔으며 각종 개혁과 부조리 근절을 위한 위원회가 정부에 설치됐다. 정부종합합동민원실. 그 장소가 종로1가 동아일보 청계천 건너편 구 국회의사당 별관(지금은 업무용 일반사무실 건물)이다. 정부종합합동민원실이라는 긴 단어가 내 머리에 똬리를 틀고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평군 주민들은 오지 깊은 산골짜기 외딴집에도 전기가 들어와 편안한 문명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 집은 마을 끝집에서 불과 이백 미터 정도 거리뿐인데도 불구하고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넷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과 그읆 많고 냄새나는 호롱불 밑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의구심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전역하기 훨씬 전이었으며, 중학교 다닐 때였다.
전역 후 서울에 올라온 나는 취업하기 전 니트 제품을 제일모직에 납품하는 직원 이 십여 명 정도인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정부합동민원실을 찾아갔다. 위에 소재한 곳이다. 그야말로 민간인 군인 할 것 없이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다. 포천에 살면서 군 생활 오지에서 훈련 중 보았던 전기가 들어 온 그 집을 예로 들면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정부합동민원실을 방문하여 농어촌 전화사업 관련 담당자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아마 지금 생각하니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나의 인적사항과 주소, 그리고 포천 집주소 까지 자술서를 쓰듯 제출하고 그곳을 나왔다.
기억나는 자초지종을 이렇다. 농어촌 마을에 전화사업이 한창 진행될 당시 내가 사는 마을에 이 00라는 이장이 동네일을 보고 있었으며, 전화사업으로 인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터 기억나게 들은 이야기인 즉 우리 집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기가 들어오게 하려면 거리가 멀어 공사비가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다른 가정에게 많은 부담을 줌으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모두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당시 재량권이 마을 주민보다도 그 이장에게 많이 있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마을 주민들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이장이었기에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 어떤 감정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도 융통성이 없었다고 할까? 그런데 그 후 이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하에서 이 모 이장이 동네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에 알렸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자기의 영달을 위해 동네주민 모르게 이상한 짓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장성하여 다시 어머니께 물으니 그 이장의 마음씀씀이가 영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사는 마을의 이장인 것을.
한 달 여가 지났을까? 서류를 제출하고 기다리던 어느 날 정부합동민원실 발송에 우편물 한 통이 배달되어 왔다. 어느 날 몇 시까지 민원실에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만사를 제치며 일손을 놓고 담당자를 방문했다. 한국 전력의 전화사업 과정과 제출한 서류내용을 검토한 결과 이전에 전화사업은 국가사업이라 모두 끝났고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려면 자비로 해야 한다는 민원담당자의 말이었다. 그러면 거리가 이백 미터가 넘는 것 같은데 소요건설비가 얼마정도 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 당시 돈으로 육십 만 원 정도 소요 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 많은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골집에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 끝에 다니는 직장 사장한테 저간에 사정을 이야기 하며 가불하기로 했다. 하루라도 빨리 전기가 들어와 아버지 어머니를 남들처럼 밝은 곳에서 사실 수 있도록 하는 마음뿐 이였기에 말이다. 얼마 후 집 까지 전신주 다섯 개와 전등 네 개 그리고 플러그 꽂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당에 가로등을 켤 수 있는 작은 전주까지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한 닷새는 걸린 것 같다. 지팡이를 의지하며 잘 걷지도 못하고 말씀도 더듬거리시며 좋아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부엌에서 지금은 한 시대 우리를 밝게 해주고 역사 속으로 보낸 30W짜리 백열등을 손으로 돌려 키시며 좋아하시며 웃음을 감추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첫댓글 출근한 사무실 안이 후끈 거립니다.
닫혀 있었던 근무 하는 사무실이 어제 더웠던 공기가 꽉 차 있습니다.
냉방은 안되고 천정에서 바람마 나오는데
며 칠 지나야 수리가 된다고 하니 좀 참아야 하겠죠!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하시는 일에 형통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맹호!
위에 사진은 2013년 5월 필자를 비롯해 수기사 정비대대 출신 전우들과 함께 정비대대
생활관 준공식에 참석하여 대대장을 비롯해 간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정비대대 후배들과 함께 준공식에 참석하며 우리 전우들은 당구대 6대와 도사 1000 여권을 비롯해
250만원 상당의 물품을 전달하며 후배 맹호들에게 용기를 주고, 또한 족구를 함께 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며 왔습니다.
점심 식사에는 살믄 돼지고기를 상추와 함께 병사들 식당에서 함께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부대의 역사를 영상을 통해 시청하기도 했습니다.
제3사관 출신의 대대장은 이라크 자이툰 부대 제1진으로 파병되어
아침공기 상쾌한 월요일 굿 모닝~~^^
저두 생각나요
심지박힌 하얀 도자기같은거에 불붙이던 등잔불과 콜라병처럼 굴곡진 투명한 유리 안에 불켜던 호야불. 맞죠??
울동네 전기불은 언제 들어왔는지 기억이....
음악님 덕분에 부모님께서 환하고 편하게 지내셨겠어요.
착한 아드님이심을 인정인정
참 잘했어요 도장도 꽝!!
코알라야님 어제 저녁 잠자리는 편했는지요
감사합니다.
열대냐는 아닌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 아내가 창문을 꽉 닫았어요^^^
더워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심지박힌 불도 잇었지만, 우리는 유리램프로 된 불을 켰지요.
그리고 거멓게 그으름 생기면 저녁에 수세미와 물로 닦고 또 불을 켰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생활 할 때 가평은 상판리 골짜기에도 모두 전기가 들어와 있던데요.
오히려 가평이 포천보다 전화(電化)사업이 더 잘 되고 먼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만 늦게 된거 같기도 하구요.
오늘 아침 기온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좋은 아침 함께 파아팅
@음악과 대화 75년에 국민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도 전기불은 있었던거 같은데.....
벌써 인위적인 열대야를 경험하셨군요~ㅎㅎㅎ
저흰 밖의 베란다문 한쪽만 열어놓구 거실문 다열고 방 창문까지 하물며 방문까지 몽땅 열고자니 새벽녁은 썰~~~렁.ㅎㅎㅎ
아침에 산에 다녀왔는데
이젠 산 가는길이 덥고 발걸음은 무겁고..
더 더워지면 등산도 쉬어야겠어요.
무리해서 다니면 더위먹을 듯~~~ㅎㅎ
일익을 담당하며 한국군의 우수함과 성실함을 주고 귀국했답니다.
지금은 후배 맹호들과 대구에서 근무하는 대대장과 이따금 통화하며
담다른 부대와 후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나 사진을 보고 있는 카페 친구 여러분!
어느 부대에서 복무를 했던 국가에 복무한 우리들은 모두 국가에 충상한 애국자 이십니다.
수소문 하여 연락되는 복무했던 부대출신 선 후배 할 것없이
후배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방문한다면
병사들의 자긍심과 또한 후배들의 사랑도 받으며
뿌듯한 마음도 자신의 가슴속에 자리 할것입니다.
지나간 사진을 올리며 몇 자 적었습니다. 맹호!
우리집도완전산골이라서 76년도에전기불이들어왔네요 시골이라지만 이장집에동네전화는한대식있엇지만 전기불은늦게들어왔네요
우리동네에서 우리집이전기불은제일먼저켜답니다 왜냐면 전가공사하는분들이 우리집에서머물다보니제일먼저키게되엇네요
제일 먼저 전기불이 들어왓다구요?
그것 참 대단한 축복입니다^^^
1976년 이면 좀 늦은 편이었군요!
아뭏든 전기화사업은 국가의 대단히 큰 사업이었답니다.
맹호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 모두가 좋아하던 시절을 상상해봅니다
이젠 백열등은 보기도 힘들죠 ?
지금은 모든게 편리하고 빠른 세상이니 ~`ㅎㅎ
예. 안녕하세요. 힐링톡님!
비가 그친 거 같군요.
그렇습니다. 극히 일부 작업장은 모를까
시내에서도 거의 볼 수 없지요.
편리한 세상에
아주 잘 써야 하겠습니다.
점심시간 입니다!
맛나는 식사로 충만하게요. 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