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邑山)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마읍산은 고구려가 건국한 곳과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할때 진을 쳤던 마읍산 두군데가 있다. 초기 마읍산과 마지막 마읍산이 같은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마읍성은 매우 유명한 지명으로 산서북부 현재 대동에 있는데 흉노의 근원지 대군(代郡)이 있던 곳이다. 이 대군은 북부여의 마지막 중심지였던 곳으로 보여진다.
在山西朔縣東北四十里桑乾河北岸。通山陰縣孔道。即元馬邑縣故治。清廢爲馬邑鄕。設訓導。民國初設縣治。尋裁。改設縣佐於此。所管八十五村。地方富庶。⦿在山西沁水縣東。〔寰宇記〕「史記白起與趙括相戰於長平之時築此城。養馬其處。」今名馬圈溝。-고금지명대사전
1920년에 발굴된 연남생의 묘비에서 그를 사후 산서중부를 맏는 燕嵐冀汾 도독을 추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도 이 마읍산을 모른다고 했으니 현요동으로 옮긴 당시 고구려가 산서에 있었을지 알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읍성을 후대 조선사가들이 마읍산으로 표기한지도 모른다. 세종지리지에는 마읍산을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현 평양근교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인종은 고구려가 원래 산서의 요(遼)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후진 석경당의 연운16주의 요도 이곳이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