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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중일전쟁은 더이상 극동에서의 "작은 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대전의 한 부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서 중국은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으나 동시에 또다른 투쟁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이 총성없는 싸움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전쟁보다 더 복잡하고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로서 장개석 앞에 놓인 과제는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로부터 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원을 얻어내면서 동시에 청말이래 땅에 떨어진 주권 또한 회복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딜레마였는데, 남에게 뭔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종속적인 관계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더욱이 새로운 동맹국들은 중국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중국을 철저하게 경멸하고 있었고 소련은 탐욕스러웠으며 미국은 애매모호하면서 아주 이중적이었습니다.
미국의 대일참전 직후 루즈벨트가 4대강국의 지위와 함께 5억달러의 차관(게다가 이 돈이 사실상 갚지 않아도 되는 무상공여였다는 점에서)을 "거하게" 내놓았을때 장개석은 드디어 중국이 그 위치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라고 자축했지만 그것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조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으며 반대급부로 그에 상응하는 댓가 또한 뒤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추축국 진영에서 이탈리아가 제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서 그 처지가 점점 독일의 괴뢰로 전락한 것처럼, 어느 나라이건 자립할 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승리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했습니다. 현실은 냉엄했으며 무임승차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철저한 힘의 논리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만 존재할 뿐이었죠. 오만한 처칠조차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화되면서 대영제국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소련은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도 큰소리 칠 수 있었는데 만약 소련이 패배하거나 독일과 강화할 경우 미국 단독으로 독일을 격파하고 서유럽을 해방시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황의 지적대로 중국은 마땅히 협상을 벌일만한 카드가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중국이 일본 육군의 대부분을 잡아두고 이들이 다른 전선으로 전용되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도 연합국의 승리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태평양전쟁은 독소전쟁과 달리 주요전장이 바다였기에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비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미국이 태평양보다 유럽전장을 우선으로 하기로 결정한 이상 일본군을 중국 대륙에 최대한 묶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중국 대륙에서 이들을 몰아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전혀 없었죠. 따라서 중국은 미국의 지원을 필요로 한 반면 미국은 중국의 지원이 불필요하였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궁핍한 상황으로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였고 외부의 강력한 지원없이 공세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현실에서 중국의 지위는 여전히 약소국이었습니다. 장개석과 스틸웰의 극단적인 불화는 그 단적인 사례였습니다. 42년 1월초 미, 영에 의해 연합군 중국전구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장개석이 루즈벨트에게 고위급 장교의 파견을 요청했을때 그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군사고문으로서의 조언과 중국이 다른 두 대국(영, 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원조를 누릴 수 있도록 교섭해주는 중간자 역할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30년대 소련과 독일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그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스틸웰은 그들보다 훨씬 야심적인데다 루즈벨트와 마셜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은 모호적이면서 아주 막강하였습니다.
게다가 스틸웰은 중국으로의 첫부임과 함께 그가 직접 지휘했던 버마방어전은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장개석이 제공한 3개군(제5군, 제6군, 제66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그 책임을 동맹국들에게 돌리자 장개석으로서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미국은 중국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원조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대중원조를 무기로 온갖 모욕적인 언사와 부당한 내정간섭을 한다고 생각했고, 반면 스틸웰은 중국이 제역할은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뭔가를 뜯어내려고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에게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두사람은 서로간의 입장이나 전략의 차이에 대해서 끝까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양자의 갈등과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장개석이 스틸웰을 몇번이나 내쫓으려고 결심했음에도 매번 마지막순간에 포기했던 것은 스틸웰의 배후에 있는 미 육군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대중원조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미국의 대중원조는 결코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 본토를 전략 폭격하기 위한 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고 따라서 원조물자 역시 중국군을 강화하는데 직접 제공되기보다 이런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더욱이 44년 봄 일본의 "이치고작전"으로 중국내 미공군의 비행장들이 완전히 박살난 반면 태평양에서는 맥아더가 사이판을 점령함으로서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확보하자 미국의 전략상에서 중국의 가치는 더욱 하락할 수 밖에 없었죠.
44년 6월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한 미국은 여기서 B-29 폭격기를 출격시켜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갔으며 45년 8월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 "리틀보이"를 투하한 폴 티베츠대령의 B-29 역시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섬에서 출격하였죠. 45년 3월 이오지마를, 6월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하자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은 더욱 용이해졌고 B-29의 융단 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일본은 결국 본토에서의 결전을 포기한채 항복해야 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terran4004/150120421504
"일본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라고 했던 커티스 르메이. 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클레어 셔놀트, 헨리 아놀드와 함께 미 공군내에서 전략폭격을 주도하였던 그는 무차별 폭격으로 일본을 완전히 초토화시켰고 동시에 태평양전선에서 셔놀트 시대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44년 10월 스틸웰이 해임된 직후 셔놀트 역시 해임됨으로서 플라잉 타이거스 이래 그의 활약은 막을 내렸죠.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terran4004/150120421504
한편으로, 미국으로서도 장개석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외세에 한없이 비굴하고 약했던 청조와 북양정권의 위정자들과 달리 "중국의 정신적 지주"를 자처했던 장개석은 항전 당시 그를 직접 인터뷰했던 데오도어 H. 화이트의 표현대로 중국인의 자부심 그 자체였습니다. 북벌 직후부터 30년대 전기간 열강들과의 지속적인 교섭을 통해 주권 회복에 노력해 왔던 그는 43년 1월 11일 아편전쟁 이래 중국이 맺었던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지하고 조계를 반환받음으로서 비로소 중국은 근 100여년간 "열강들의 반식민지"라는 오욕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0월 30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종전후 국제평화조직의 창설과 관련된 "일반 안전에 관한 선언"에 미, 영, 소와 함께 참가함으로서 이후 유엔의 주요 창설 멤버이자 5대 상임이사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죠.
또한 장개석은 한국과 월남의 독립단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두 나라의 즉각적인 독립과 김구의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의 이런 행보는 동시에 미, 영의 강력한 경계심과 견제로 이어졌습니다. 루즈벨트와 처칠은 장개석의 중국이 주변 지역에 대해 팽창적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고 심지어 종전후 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장개석이 지원하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월남혁명동맹, 월남국민당은 미국의 시각에서 본다면 철저하게 중국에게 종속된 친중세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임정의 승인을 끝까지 거부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비협조와 견제는 미국 이상이었습니다. 항상 중국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았던 처칠은 한편으로 중국이 버마,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영국의 세력권을 위협할 것을 매우 우려하였습니다. 일본의 버마침공이 임박했던 42년초 처칠은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웨이블에게 "중국군의 버마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라"라고 지시하였고 중국원정군은 영국으로부터 제대로 병참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버마전역에서 연합군이 참패한 중요한 원인중 하나였죠.
처칠은 중국을 전후 세계 질서를 주도할 4대 강국의 하나로 포함시키려는 루즈벨트의 생각에 불쾌감을 표시했고 43년 11월 미, 영, 중 3국간의 첫 정상회담이었던 카이로 회담에서도 장개석 부부를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킬 생각이었던 그는 "장개석때문에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산만해져 버렸다"라고 불평하였으며 루즈벨트의 버마 상륙 계획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장개석에게 "문제는 처칠이다"라며 영국은 중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은 많은 것을 얻어냈습니다. 일본에게 빼앗겼던 만주와 대만, 팽호열도는 중국에게 반환되고 44년 연초에는 3국이 연합하여 인도와 버마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장개석이 강력하게 제기했던 "전후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은 초안에는 반영되었으나 루즈벨트는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으며 충분한 준비없이 독립할 경우 심각한 혼란에 빠질 수 있다며 신탁통치를 거쳐 "적당한" 시기에 독립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또한 홍콩의 반환과 티벳문제, 전후 일본에 대한 군정에서 중국의 참여, 배상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거론하였습니다.(그러나 처칠은 홍콩의 반환을 거절하였고 미국의 대중정책은 꿈같은 소리라고 말하였습니다.)
11월 26일 중국으로 귀국하면서 송미령은 루즈벨트에게 직접 편지를 써 감사를 표시하였습니다. "총통은 대통령께서 중국을 위해 취해주신 각종 조치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해드립니다. 오늘 오후 각하께 작별인사를 할때, 총통은 감동한 나머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지도 못했고 각하의 우의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이로 선언에 참가한 장개석, 루즈벨트, 처칠. 카이로 선언은 처음으로 연합국간의 대일전략을 토의하고 결정한 자리였습니다. 당초에는 스탈린 역시 참석키로 했으나 장개석이 이 회담에 참석한다는 말을 듣자 불참을 통보했고 따라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에서 별도로 스탈린을 만나야 했습니다.
장개석은 카이로 회담이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기뻐했으나 결국 연합군의 전략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카이로 회담이 아니라 그가 배제된 테헤란회담이었습니다. 스탈린이 늦어도 44년 봄까지는 무조건 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루즈벨트와 처칠 역시 여기에 동의하였고 처칠은 이를 위해서는 가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오버로드작전에 집중시켜야 하며 중요성이 떨어지는 중국을 위해 인도와 버마로 분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스탈린도 우선 독일부터 항복시킨후 소련이 서쪽에서 진격하겠다고 대일전 참전을 약속합니다. 결국 세사람은 카이로에서 장개석에게 약속했던 것을 무시하고 모든 역량을 대독전에 모으기 위해서 적어도 1년동안은 버마에서 대규모 반격 작전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칠 역시 테헤란회담에서 자신이 미, 소라는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서 끼인 신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했는데, 자신의 일기에 "나는 테헤란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 실감했다. 한쪽에는 커다란 러시아 곰이, 한쪽에는 거대한 미국 버팔로가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 낀 불쌍하고 볼품없는 영국 당나귀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중경으로 돌아온 장개석은 카이로에서 이룩한 자신의 전공을 중국 언론에 자랑스레 이야기한 직후에 루즈벨트로부터 미영중이 합의했던 벵골만 상륙작전인 "Operation Buccaneer(해적작전)"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미영소 3대국 사이에서 중국의 체면은 철저하게 무시된 것이었죠. 12월 6일 스틸웰은 루즈벨트와 면담한 자리에서 만약 일본이 장개석을 몰아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묻자 루즈벨트는 그럼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될 것, 이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중-미 양국의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어 루즈벨트의 참모들은 장개석이 싸움은 회피하면서 무리한 요구를 끝없이 하고 있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고 심지어 서머벨장군은 장개석의 경쟁자중 한사람을 1억달러에 매수하여 중국을 전복시키자고 주장합니다.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미국을 극도로 불신하였고 테헤란 선언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전면 공격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와 스틸웰은 장개석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운남의 Y군을 스틸웰이 주도하는 제2차 버마원정에 투입할 것을 강요합니다.
43년 10월부터 스틸웰은 버마로드를 다시 열겠다는 명분으로 휘하의 X부대를 동원하여 북부 버마의 후콩계곡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일본군 제18사단의 저항과 지형의 험난함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이 작전에 원칙적으로는 찬성했지만 영, 미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스틸웰이 또다시 패배할 경우 그 피해는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였습니다. 게다가 Y군은 스틸웰이 직접 지휘하는 X군에 비한다면 비록 장비와 보급이 열악하고 결원도 많았으나 그럼에도 장개석에게는 가장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예비전력이었습니다. 스틸웰의 작전에는 영국군 역시 찬성하지 않았고 44년 가을쯤에 랭군 또는 말레이를 공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Y군은 앞으로 연합군의 본격적인 수륙공동작전이 벌어질때까지는 공세에 합류하지 않기로 당초 스틸웰과 합의했음에도 스틸웰의 공세가 월등히 우세한 전력으로도 교착상태가 된데다 일본군이 임팔을 침공하자 동남아전구 연합군 사령관인 마운트배튼 역시 Y군의 투입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장개석은 신강성에서 발생한 소련군과의 국경충돌, 섬북에서 중공이 유격대를 동원해 서안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화중방면에서 일본의 대규모 공세가 예상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그 요구를 거부할 경우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압박에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Y군을 스틸웰에게 넘긴 직후 일본의 "이치고작전"이 개시되어 모든 역량을 집중한 일본군의 공세앞에 중국의 동부전선은 문자그대로 와해상태에 직면합니다.
무다구치의 임팔작전은 매우 즉흥적이고 졸속으로 추진되어 결과적으로 태평양전쟁기간 일본이 벌인 최악의 실패로 끝났지만 스틸웰과 마운트배튼은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일본군의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던 스틸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의 역습에 큰 충격을 받아 이번에는 도리어 일본군을 과대평가하였고 이미 버마의 정글 깊숙히 진입한 X군의 병참선이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루즈벨트에게 장개석이 Y군을 내놓도록 강력한 압력을 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44년 5월 살윈강을 건넌 Y군은 버마-운남의 매우 험준한 산악지대에 포진한 일본군 제56사단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방어선을 간신히 돌파할 수 있었고 결국 45년 1월에야 X군과 연결됨으로서 2년 반에 걸친 중국의 고립은 드디어 풀리게 됩니다.
북부 버마에서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타고 진격중인 중국군 X부대. 버마에서 스틸웰의 활약은 영웅적으로 포장되었으나 냉철하게 봤을때 그의 승리는 전술적이고 개인적인 것일뿐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38506862
그러나 이를 위해 치룬 댓가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일본군 최후의 공세이자 중일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된 이치고 작전은 투입 병력에서도 총 50만에 달하여 임팔작전의 6배가 넘었고 무다구찌와 달리 지나파견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총력을 기울여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반면 중국군은 그동안의 누적된 손실로 전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중국군 일선부대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장개석 정권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합니다. 사실 스틸웰이 추진한 버마원정은 전략적으로 결코 시급한 것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X군과 Y군의 피해 역시 6만에 달할만큼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작전을 위해 Y군을 반환하라는 장개석의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였고 도리어 섬북에서 공산군과 대치중인 부대를 일본군과의 전투에 사용하라며 응수합니다.
미국의 언론들은 중국전구를 통틀어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것은 버마전선에서 활약하는 스틸웰뿐이라며 치켜세웠으나 스틸웰의 승리는 전적으로 일본이 임팔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독단적인 작전으로 전구 사령관인 마운트베튼과도 충돌하여 영국은 루즈벨트에게 그의 해임을 요구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메릴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5307혼성연대(통칭 "메릴부대") 역시 스틸웰의 지휘방식에 심한 불만을 품었고 이때문에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스틸웰은 미중영 어느쪽에도 환영받지 못했고 오히려 분열과 불화만 조장한 셈이었습니다.
스틸웰은 중경에서 주은래와 접촉하기도 했지만 그가 실제로 중공과 어떤 모종의 관계가 있다거나 특별히 우호적이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의 목적은 단지 장개석에게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그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당연히 격분하였고 양자의 관계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만큼 악화됩니다. 또한 스틸웰은 백숭희를 비롯한 장개석의 정적들과 쿠테타를 은밀히 논의하기도 했고 심지어 장개석이 인도의 중국원정군을 검열하기 위해 험프 루트를 비행할때 비행기를 추락시켜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중국군 제9전구가 형양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이고 있던 44년 7월 루즈벨트는 중국의 능력을 더이상 신뢰할 없다며 장개석에게 중국군의 모든 지휘권을 스틸웰에게 당장 넘기지 않는다면 중국에 대한 모든 원조를 즉각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 "최악의 수모"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형양이 함락되자 큰 충격을 받은 장개석은 한때 굴복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목적이 중경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는 다시 강경해집니다. 장개석은 전략 예비대인 Y군을 스틸웰의 버마원정에 투입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며 중국군의 패배는 전적으로 스틸웰때문이라고 비난하였고 9월 25일 그동안 여러번 결심했으나 끝까지 미뤄웠던 것, 바로 스틸웰의 해임을 요구하는 초강수를 두죠.
결국 굴복한 쪽은 루즈벨트였습니다. 연말에 선거가 다가오자 루즈벨트는 스틸웰로 인해 중국을 상실했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고 10월 18일 그를 전격 해임합니다. 본국으로 귀국한 스틸웰은 전쟁 영웅으로서의 환영 대신 "선거 판세에 영향을 줄만한 어줍잖은 비판을 삼가하라"는 주의와 함께 모든 언행을 철저하게 감시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루즈벨트에게 버림받은 그는 더이상 어떤 직위도 받지 못했고 일본이 항복한지 1년뒤인 46년 10월 12일 사망합니다.
스틸웰을 대신해 중국전구 참모장으로 임명된 웨드마이어소장(1897~1989). 당시 마운트배튼의 참모차장이었던 그는 중국 부임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으나 스틸웰과 달리 미-중간의 관계를 비교적 원만하게 처리해 나갑니다.
스틸웰과 함께 갈등의 또 다른 문제는 중공이었습니다. 서안사변과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던 국공의 관계는 중공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고 41년 1월 환남사변은 제2차 국공합작이래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당초에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으나 연안을 방문한 서방 기자들에 의해 "중국공산당"이라는 존재가 미국사회에 소개되었고 뉴욕타임즈를 비롯해 미국 언론들은 "부패하고 의욕을 상실한 중경과 달리 연안은 활력에 넘치고 있다"라는 식으로 양측을 편향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를 "중공의 악의적인 유언비어와 선전활동때문"이라고 생각한 장개석은 서방기자의 연안 방문과 중공의 언론활동을 통제하였으나 거의 효과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루즈벨트는 44년초부터 연안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압박하였고 모택동 역시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그동안 결렬상태였던 국공간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결국 장개석은 여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44년 9월 루즈벨트의 개인특사로 헐리소장을 단장으로 한 "딕시 사절단"이 연안을 방문합니다.
과연 미국은 국공간의 갈등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고 실제로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있었던 것인가.
사실 미국이 국공문제에 개입한 것은 국공의 갈등이 미소간의 갈등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중 미국대사였던 가우스는 장개석에게 "미국의 관심은 솔직히 중공 문제에 있지 않으며 다만 대일전 막바지에 중국내 두 무장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된 원인을 해결하는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중국내 미국 외교관들은 장개석 정권은 이미 파산 상태이며 향후 중공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소련으로 기울지 않도록 미리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정보도 없이 단지 자국의 전략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어설픈 중재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역효과만 내었고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불신을 사게 됩니다.
44년 9월 중경에 도착한 헐리는 장개석과 모택동을 만났고 양쪽의 중재와 이들의 통합, 그리고 공산군에 대한 원조를 의욕적으로 추진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중공은 중앙정부에 복종하고 지방정부로서의 지위에 만족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반면 모택동은 국공이 대등한 입장에서 연합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양쪽의 주장은 완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었고 이견은 도저히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장개석은 중공의 목적은 정권의 탈취이고 협상에 참여하는 것은 한낱 기만전술이라며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외교부장인 송자문은 헐리에게 공산당의 요구대로 연합정부를 수립한다면 결국 중국은 적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대로 모택동으로서는 장개석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당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에 공산당이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자신이 주도하는 중국을 원했습니다. 그 사이에 중간은 있을 수 없었죠. 헐리는 자신들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했고 단순하게 접근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고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말자 중국에서는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안의 중국공산당사에서 패트릭 J. 헐리 소장과 주은래, 모택동.
레이황은 외교는 장개석의 장기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을 본다면 장개석은 분명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전쟁기간 내내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도 스탈린에게 완전히 휘둘렸고 발트3국을 비롯해 41년 6월 이전에 소련이 합병한 모든 영토에 대해 승인합니다. 폴란드는 소련에게 동부지역을 빼앗긴 대신 독일로부터 동프로이센을 합병하였고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를, 핀란드는 겨울전쟁때 빼앗긴 라도가 호수 주변과 추가로 북쪽의 페트사모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영토의 확장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대서양선언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루즈벨트와 처칠은 이를 묵인하였습니다.
45년 2월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댓가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테헤란회담에서 그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면 대일참전을 하기로 약속했던 것과는 얘기가 바뀐 것이었죠. 그러나 일본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적어도 18개월은 더 싸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요구한 것들, 즉 외몽골의 독립, 러일전쟁전 제정러시아가 만주에서 누린 권익의 회복, 대련항과 여순항에 대한 조차, 일본령 천도군도(사할린)의 할양 등을 모두 받아들였고 스탈린은 독일의 항복후 2~3개월안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킹제독은 "우리는 방금 200만명의 미국인을 구했다"라고 기뻐했지만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팽창을 묵인한 댓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냉전이 시작된 연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소련의 요구는 대부분 중국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였음에도 루즈벨트는 장개석과 아무런 사전 협의도 하지 않았고 4개월이나 지난 6월 15일에야 일방적으로 통보하였습니다. 장개석은 격분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중국군이 독자적으로 만주를 회복할 역량이 없는데다 중국으로서도 소련의 대일참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송자문을 모스크바로 보내 소련과 교섭을 진행합니다.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스탈린은 중국이 얄타회담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대일참전의 선결조건이라고 강조하였고 협상의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송자문은 얄타회담을 묵인하는 댓가로 스탈린으로부터 장개석정권이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권이라는 보장을 받아내었고 여순항에 대해 "소련의 조차"에서 "중소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이 항복한후 3개월내에 모든 소련군은 철수할 것과 만주에서 국민정부가 행정체계을 조직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합의합니다. 중소우호조약은 일본이 항복하기 바로 전날인 8월 14일에 정식으로 체결됩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막상 만주를 장악하자 당초 약속과 달리 만주에서 일본이 건설한 대규모 산업시설을 무단으로 약탈하였고 철수를 지연시켜 국민정부군의 만주진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합니다. 더욱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된 대량의 무기를 공산군에게 제공하여 국공내전 초기 만주에서 참패했던 공산군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소련의 개입은 중소우호조약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고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되었죠.
스틸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의 눈에 중국과 장개석은 많은 문제가 있었고 상당부분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국인이었고, 중미 양국의 합의에 의해 파견된 일개 야전 군인에 불과했습니다. 공산군을 포함해 모든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과 인사, 재정, 작전권을 내놓으라는 그의 요구는 장개석의 입장에서는 청일전쟁 직후 이홍장을 핍박했던 이토 히로부미와 다를 바 없는 행위였고 부당한 내정간섭이자 월권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장개석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모택동이라도 자신의 군대를 아무런 유대감도 없고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미국인 장군에게 맡기는데 동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스틸웰은 장개석이 자신을 기만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기만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장개석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심지어 장개석 정권의 전복과 암살까지 추진하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설령 중국에 대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일개 외국 군인에 불과한 스틸웰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 이른바 "Blue Whale(푸른 고래)"라 명명된 스틸웰의 장개석 암살계획은 그의 참모이자 그 계획을 실제 수립하고 추진했던 프랭크 돈 대령이 1973년 5월 21일 인터뷰에서 폭로함으로서 알려지게 됩니다. 카이로회담직후 루즈벨트를 면담한 스틸웰은 돈 대령에게 장개석 암살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장개석의 인도 방문 직전에 일본군의 "이치고작전"이 시작되면서 그의 인도방문은 취소되었고 암살 계획 역시 연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틸웰은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루즈벨트는 장개석과의 화해를 선택하였고 결국 스틸웰은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루즈벨트가 스틸웰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스틸웰이 이런 중요한 계획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루즈벨트 역시 이 음모에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스틸웰의 오판은 장개석 정권이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과소평가였습니다. 이승만이나 고딘 디엠과 달리 장개석은 외세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차지하였고 중국은 미국의 식민지도, 보호국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대중원조를 무기로 장개석을 길들일 수 있다는 스틸웰의 생각은 착각이었고 그의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야심과 오판은 대일전쟁에 도움이 되기보다 상황만 더 악화시켰을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도 해가 되었습니다.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은 단 한번도 중국을 대등한 파트너로 보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중국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후 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는 분명 중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미영소는 중국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중국을 견제할 필요 또한 있었습니다. 이런 전략적인 딜레마에서 비롯된 그들의 대중정책은 그러나 아무런 일관성이 없었고 근시안적이었습니다.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개석이 패하자 대중정책이 실패한 책임을 전적으로 장개석의 잘못으로 돌렸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의 오판에 있는 것이었고 한국전쟁에서 그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첫댓글 그나저나 얄타회담에서의 외몽골독립은 중국으로서야 어쨌든 지금의 몽골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자 바른 조치이겠죠;;
믿을놈 하나 없다능.......